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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 이건의 『쿼런틴』(2022 허블판)을 다시 읽고

이 어려운 양자역학 SF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일명 "현존하는 최고의 하드SF 작가" (두 명 중 한명, 다른 한 명은 테드 창) 그렉 이건의 한국어 최초 번역 장편 소설 『쿼런틴』이 또다시 출간되었다. 2022년에 이르기까지 행복한책읽기판의 절판으로 중고책 되팔렘이 기승을 부리던 중, 허블출판사에서 '그렉 이건 시리즈'의 일환으로 다시 출간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난 2003년 행복한책읽기판을 읽고 리뷰까지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이 이 작품의 첫 만남은 아니다. 2007년에 쓴 나의 『쿼런틴』 리뷰는 지금 보니 매우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다행히도 읽지 못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소설의 줄거리나 양자역학의 설명 기타 등등, 책에 대한 얘기들은 그때 충분히 만족스럽게 한 것 같으므로, 이젠 좀 다른 얘기를 해 보자.


물론 나무위키 '양자역학' 항목을 대충 읽고 『쿼런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래, 니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수학만능주의적 사상에 빠져 있으며,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법들을 배우지 않았다면 코펜하겐 해석이니, 슈뢰딩거의 고양이니 하는 양자역학 얘기들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라고 인정 할 수 없다. 양자역학(을 포함한 모든 물리학) 이해의 중심 부분 수학이라는 거대한 중심 보석처럼 자리잡고 있다. 『쿼런틴』 이라는 소설은 양자역학의 핵심 키워드를 중심 소재로 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양자역학의 수학을 마스터한 자만이 이 작품을 (충분히가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고 체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작품에서 간간히 나오는 "닉-더하기-포콰이"라는 표현은, 단지 둘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더하기'라는 수학적 단어를 차용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파동함수의 수학적 중첩을 나타내는 '더하기'의 실제 의미로서 받아들여야 한다.(이른바, 브라-켓 표현법이라 부르는 파동함수 중첩의 표현법) 그러나, 양자역학의 브라-켓 표현법조차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나무위키의 양자역학 항목을 한 번 읽어본다 해도 사람의 파동함수를 더한다는 의미를 완전히, 온전히 이해하기엔 택도 없다. 왜냐하면, "닉-더하기-포콰이"라는 표현 자체가 양자역학을 배운 이들만이 공감 가능한 특별한 문화적 코드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담에 밥 한 번 먹자"라는 표현이 장래엔 결코 같이 밥을 먹는 일이 없음을 암시하는 의미라는 걸 한국인이라면 대번에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Greg Egan - Quarantine (허블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쿼런틴』에 나오는 양자역학 이론들이 실제 학계에서 연구되고 있는 분야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양자역학 초창기의 해석이자 사실상의 정설이라 인정되는 코펜하겐 해석의 경우, 파동 함수의 수축(또는 붕괴, Collapse)을 일으키는 관측자가 꼭 의식적 존재여야 한다는 가정을 한 적이 없다. 단지 "모든 물질은 파동함수의 형태로 존재하고, 측정을 한 후에야 입자적 실체를 갖는다."고만 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측정이라는 행위에 대해 '의식적 존재가 측정을 해야만 파동 함수의 수축이 일어난다'고 주장한 소수의 물리학 학파가 있었을 뿐이고 (대표적으로 유진 위그너), 이젠 물리학의 역사에서 이 해석은 정설은커녕 소수파의 괴상한 해석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최근 학계에서는 측정이라는 행위에 주관적 행위자를 완전히 배제하고 단지 입자의 상호작용으로만 해석하는 새로운 양자역학 해석이 정설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렉 이건의 양자역학과 측정자 의식에 관한 작품 내에서의 해석은 실제 과학이 아니다. 즉, '일부러 틀린 세계'다. 어쩌면, 실제 과학이 아니란 말은 '과학이 아니'라는 말과 같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쿼런틴』은 말만 하드SF인가? 실제로는 현실의 과학 이론이 아닌 가상의(판타지적인) 이론을 소재로 하고 있는 판타지 소설인가?하드SF의 마스터피스 작품인 『쿼런틴』 조차, 엄밀한 '진짜' 과학 이론이 아니라 판타지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얘기는 넌센스다. 당연하지만  『쿼런틴』은 가장 그럴듯한 하드SF다. 『쿼런틴』이 하드SF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도대체 뭐가 하드SF라고 인정받을 수 있단 말인가?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는다. 하드SF란 현실 과학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없다.  SF엔 반드시 어느 정도 가상적인 요소가 존재하는데, 그게 하드SF인 경우도 그렇다.




장르를 떠나 소설의 구조를 볼 때 이 작품은 어떠한가? 초반에, 주인공 닉은 익명의 인물에게 수수께끼의 환자의 실종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작중에서 닉은 빈번히 그 의뢰인이 누구인지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이렇게까지 자신이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다니, 이건 독자가 궁금해 해야 함을 의도한 작가의 함정이다(적어도, 초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사실 결말에까지 이르러 이야기 구조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봤을 때, 결국 의뢰인이 누구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작가도 그가 누구인지 밝힐 생각이 없었다. 소설적 재미로서는, 특히 소설 초반 탐정물처럼 이끌어가던 클리셰로서는 잘못된 구조인 것이다. 주인공 닉에 대한 공감 상태는 어떠한가? 뇌에 충성모드를 심는다고 지금까지 조사했던 과정을 내팽개치고 그렇게 쉽게 수수께끼의 단체에 충성을 바치다니,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이 되는가? 아니,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란, 모름지기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을 이뤄야 하는 게 최우선 목표 아니었나?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쿼런틴』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을까? 이 작품은 어떻게 한국에서 두 번이나 출간될 수 있었을까? 왜 이 작가는 이런 책을 쓰게 되었을까?


우리는 왜 하드SF를 읽는가?


"쓰고 싶으면 써야지 그럼 안씀?" 같은 뻔한 대답을 노린 질문은 아니다. 어떻게 이 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지, 수요와 공급이 충족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이 어려운 소설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가 책을 사서 작가를 먹고 살게 하는지, 그리고 한국에서 결국 절판될 정도로 안팔려도 다른 출판사에서 기어이 다시 한 번 출판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막말로, 틀린 과학을 설명하는, 어렵고 와닿지 않는 이공계적 문화적 공감대를 탑재한, 소설적 재미도 충분치 않는, 등장인물에 감정적으로 공감되지도 않는 이 소설의 소설적 재미 포인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시작해 보자. 바로 "과학은 재밌다."는 사실. (그렇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나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재미를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때로는 '하드'하다고 느낄지라도 과학은 재미있을 수 있다. 그 재미 때문에, 대학원생들이 열정페이를 받 때로는 등록금을 내면서까지 연구를 하고 밤샘을 하논문을 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현실삶의 무게 때문에 대학원을 선택하지 못했더라도, 교양과학책들을 읽으며 그 과학의 재미를 즐긴다.


그런데 심지어 이 과학에 대한 재미란 , 때론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과학이라도 상관이 없다. 소설을 읽는데 등장인물이 실존한 역사상의 인물일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그러나...가상의 과학이라니? 과학은 사실로 증명된 것만이 가치가 있는 것 아니던가? 가상의 과학이란 거짓 과학이고, 즉 비과학이 아니던가? 그런걸 진실로 믿어버리는 순간, 심각한 인식론적 위기에 직면하지 않는가? '사이비 과학'이라는 위기 말이다. 


그렇다. 과학의 재미란 때론 그것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사이비 과학에 빠진다. 그들에게, 창조설은 세계가 만들어진 합리적인 과정을 경이롭게 설명한 꿀잼 콘텐츠이며, 백신음모론은 코로나바이러스가 국가의 통제 수단으로써 만들어졌다는 충격적인 반전을 즐릴 수 있는 스토리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옳은 과학을 수호한다. 과학적 방법론의 힘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 과학을 픽션으로 소비한다. 과학이 픽션으로 들어올 때, 그 과학은 일부러 약간 틀린 상태로 들어오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피터 와츠의 말대로 "과학 소설에서 과학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픽션 은 내러티와 등장인물이 포함되고, 장르는 교양과학에서 문학책으로 변신한다. 우리는 등장인물 과학 이론과 맞닥뜨리는 상황을 목격한다. 착각하지 마시길, 그들의 세계에서, 그 과학 틀린 과학이 아니다. 등장인물은 우리 대신 '대학원생 되어' (진짜 대학원에 입학한다는 뜻이 아니다.) 가설을 설정하고 세계의 진실과학을 탐구한다. 그리고 작품을 읽는 우리들은, 그들에게 이입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공감을 가질 필요없다. 이 픽션의 목표는 감정이입이 아니라 이성 이입이다. 그들이 그 세계에서 진실된 과학을 탐구하는 과정, 그리고 목표에 대해 우리는 '이성적으로 공감'한다. 그게 하드SF가 쓰여지는 이유다.


그런 이유로 하여 이 『쿼런틴』이라는 희대의 하드SF 명작이 2022년 말 한국시장에 또 다시 등장한 것이다. 비록 그대들이 구매하지 않을 지라도, 읽지 않을 지라도,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내가 책을 두 번 사고, 세  읽으면 되니까.



그렉 이건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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