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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 이건의 『쿼런틴』(2003 행복한책읽기판)을 읽고

어려워서 하드SF가 아니라 그렉 이건이라 어려운 것이다

장르론

난 '장르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아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장르란 객관적 분류가 아니다. 장르는 주관적 감상이다. 60년대부터 락의 계보를 세세하게 따져가며 칠판에 하나가득 트리구조를 그려넣고 학생들에게 그걸 강의했었던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의 모습도 나에겐 약간 껄끄러운 모습이었다(물론 영화 자체는 매우 훌륭했지만). 어떤 장르가 우월하다느니 천박하다느니 하는 골수 헤비메탈 매니아와 너바나 빠돌이의 논쟁같은 건 장르에 대한 심각하게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한다. 장르는 혼자만 이해하고 분류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며, 남에게 강요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SF라는 장르도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SF라는 장르 안에서도 무척 다양한 소분류들이 가능하며, 그것을 분류하고 설정하는 것은 엄연히 개인의 몫이지 분류학의 역할이 아니다. 나는 스타워즈식의 스페이스 판타지를 싫어하고, 최근에 읽은 '어둠의 속도'식의 가벼운 SF를 그냥저냥 재밌게 읽었으며, 『쿼런틴』이라는 소설에 대해서 특별히 '하드SF'라는 식의 소분류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예 SF라는 장르를 편식하고 그것의 의미를 고정시킬 필요도 없다.


'하드SF'라는 장르명도 어떻게 보면 웃기는 말이다. '읽기 어렵다'는 의미로 '하드'를 붙인 것이라면,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상의 시는 '하드시'라고 부르고, 미쉘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같은 프랑스 현대철학책들은 '하드철학'이라는 말을 붙여야 마땅하다. 아니, 그렇다면 아예 양자역학에 '하드역학'이라는 말을 붙이면 어떨까?


어렵다는 것으로 장르를 규정지으려 해선 안된다. 『쿼런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그 소설이 '하드SF'이기 때문에 읽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이건 틀렸다. 같은 장르로 분류될 소설 중에도 읽기 쉬운 것과 읽기 어려운 것이 있고, 역시 SF 안에서도 읽기 쉬운 것과 읽기 어려운 것이 공존한다. 하드SF이기 때문에 읽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드SF라는 장르의 소설 중에서도 특별히 『쿼런틴』이 난해하기 때문에 읽기 어려운 것이다.


다만 내게 있어서 안타까운 점은, SF의 전 역사뿐만 아니라 가상의 세계관을 그린 픽션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라고도 할 만큼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의 핵심이 바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바로 그 부분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소설과 소설가에게 너무나 큰 불행이며, 또한 나에게도 나로 하여금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게 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기가막히고 머리를 뒤흔드는 강력한 한방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다 안타깝다. 『쿼런틴』의 이 핵심적인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쿼런틴』의 1/100도 읽지 못한 것이다. 차라리 『스타 워즈』나 한 번 더 보는 게 낫겠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지금부터 『쿼런틴』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소설이 되도록 알차고 재미있는 양자역학의 그렉 이건식 해석(Greg Egan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을 설명하고자 한다.


Quarantine - Greg Egan (행복한책읽기판)

양자역학과 그 해석(Interpretation)

물리학의 역사는 누적적이고, 확장적이고, 변증법적이다. 그 시초는 확실히 뉴턴부터였으며(이는, 뉴턴 이전 시대의 물리학은 모두 폐기되었다는 뜻이다.), 뉴턴의 역학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거기에 덧붙여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고전역학의 위에 쌓였다.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을 대체했다 할지라도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의 부분집합으로서 여전히 세계를 설명하는 훌륭한 이론으로 기능한다.


다만 우리가 '특수한 경우의 물리학'인 고전역학을 훨씬 잘 다루는 이유는 우리의 인식의 틀이 고전역학에 잘 맞도록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너무 우주적이지도 너무 미시적이지도 않은 우리의 몸과 뇌와 눈은 0.01아보가드로수의 원자와 100아보가드로수의 원자 집합의 언저리 쯤에서 세상을 가장 인식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으며, 여기를 지배하는 양자역학의 법칙은 근사적으로 고전역학의 법칙들로 수렴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체계는 양자역학보다 고전역학을 이해하기 수월한 구조로 되어 있다.


양자역학은 너무 미시적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은 큰 불편함을 느낀다. 때문에 양자역학은 '관점'보다 '이론'이 먼저 발전했다. 현재 양자역학의 이론은 수학적으로 매우 깔끔하고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으며, 또 실험적으로 관측된 데이터도 이론과 훌륭하게 들어맞는다. 하지만 현재 그 수학공식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 본질과 인식 사이의 끝없는 괴리를 잇기 위해 양자역학에서는 '양자역학의 무슨무슨 해석(무슨무슨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이라는, 고전역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다리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많은 양자역학 책이 이 해석들에 대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내가 본 양자역학 책에도 가장 유명한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 CIQM)이 단지 한 페이지로만 나와 있을 뿐이다. 물리학자들은 해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수학공식이며, 수학공식은 틀림없이 확실한 내용을 말해주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물리는 해석이 없어도 확실하게 기능할 정도로 '수학적'인 학문이 되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역학의 유년기에 탄생한 것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확실하다고 평가받는다. 물리학자들은 확실히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코펜하겐 해석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반-인식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코펜하겐 해석을 설명해 주는 김필산의 사이언스비치 동영상


양자역학은 물질을 파동으로 기술한다(수학적으로 말이다.). 우리가 물질을 '한 공간의 일정한 부분만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양자역학은 물질이 가능한 공간 전체에서 넓게 퍼져 있다고 말한다. 파동은 중첩(superposition)이라는 성질이 있으며, 이 성질이 다시 한 번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거시세계에서는 우리의 몸과 당신의 몸이 '중첩'되어있는 상황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가능하며, 왜냐하면 물질은 기본적으로 파동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물질은 파동이기 때문에 회절(diffraction)이나 간섭(interference) 등의, 파동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파동 특유의 현상이 관측된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확실히 우리가 보는 물질은 파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순간에 파동은 '한 점'으로 오그라들며, 우리는 그것을 보고 어느 특정한 위치에서 파동이 아닌 무언가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공식적으로 '파동함수의 오그라듦(Collapse of wave function)'이란 용어로 불리며, 『쿼런틴』에서 툭하면 말하는 '수축되었다'는 건 이 오그라듦 현상을 말한다.


문제는 이 오그라듦 현상이 '언제' 그리고 '왜' 일어나는가 하는가다. 코펜하겐 해석과 여타 다른 많은 해석들에서는 오그라듦 현상이 '관측'시에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왜 존재에 있어서 관측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가?


' 관측'이라는 행위가 이론으로 난입함에 따라 양자역학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진다. 그 혼란스러움을 과장되게 표현한 가상실험이 바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다. 고양이는 상자 안에서 파동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것도 '살아 있는 고양이의 육체와 정신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파동'과 '죽은 고양이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파동'이 중첩(superposition)된 상태로 말이다. 우리의 관측은 파동을 오그라뜨리고, 두 파동 중의 하나만을 결정하며, 고양이를 삶/죽음 상태 중 어느 하나로 만들어 놓는다.


이 실험의 두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드러난다. 하나는 관측의 문제이고, 하나는 거시세계의 문제이다. 관측의 문제는 아까 말한 대로, 왜 관측이 필요한가이다. 누가 관측하면 그렇게 되는가? 인간이 아닌 기계가 관측해도 될까? 상자 밖의 다른 고양이는? 의식이 없는 환자는? 신은 어떤가? 관측의 어떠한 특성이 관측 전과 관측 후의 우주를 바꾸어 놓는가?


거시세계의 문제는 어떠한가? 입자 단 하나가 스핀 1/2와 스핀 -1/2의 상태로 중첩되어 있음을 우리는 그냥 수학을 통해 안다. 그런데 어째서 고양이가 중첩되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서 그러한 상태에 있는 고양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못 볼 수밖에 없는게, 보는 행위는 당연하게도 오그라듦 현상을 일으키는 '관측'이라는 행위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사실이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사실이라면 실제로도 사실인가? 또 실제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가?


코펜하겐 해석은 실재와 인식의 커다란 골짜기를 해결하지 않고 남겨놓은 채 우리에게 이것을 그냥 믿으라고 강요한다. 이에 반해 다세계해석(Many-World Interpretation: MWI)은 좀 더 인식에 부담가지 않는, 알기 쉬운 해석을 제시한다. 우주는 단일역사가 아니고 계속해서 분기하는 다중역사이다. 고양이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순간 우주는 둘로 나뉘며,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는 각자 다른 우주에서 각자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관측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해석의 단점은, 왜 '나'는 저쪽 우주로 가지 않고 이쪽 우주에 존재하는가를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이 이론은 실험적으로 증명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많은 물리학자들이 미심쩍어 하는 상태이다.


다세계해석을 부정한다면 여전히 관측이 문제다. 이를 위해 '의식'을 관측의 대상으로 끌어들인 소수파의 해석도 있다. 의식적 존재가 관측을 해야 파동함수가 오그라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의식인가가 문제가 된다. 개미가 관측을 한다면? 인공의식이 관측한다면? 문제는 이 의식의 유무가 칼로 두부를 썰듯 정확하게 썰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의식적 존재의 관측 해석은 그래서 문제점이 많은 이론이다. (하지만, 『쿼런틴』에서는 이 의식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의식에 의한 관측 해석을 설명해 주는 김필산의 사이언스비치 동영상


여기까지는 『쿼런틴』의 해석이 아니라 그냥 물리학에 대한 내용이다. 100년 전부터 닳고 닳은 내용이니 이 부족한 텍스트를 굳이 읽지 않고 다른 문헌을 참고하시는 게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 『쿼런틴』에서 만들어낸 양자역학의 해석은 다음 글에서 해설할 것이며, 때문에 『쿼런틴』을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미리 말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결정론, 양자적 우연, 자유의지

현재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인 이유로 꺼리고 있는 입장인 '결정론'은, 이 세상의 어떠한 사건이든지 그 일어나는 때와 장소, 양상 등이 정해져 있다고 하는 입장이다. 뉴턴 이전에는 종교적 믿음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결정론이, 뉴턴역학의 도움을 받아 '과학적 결정론'으로 급부상하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른바 '기계론적 결정론'이라고 알려진 과학적 결정론은 라플라스의 생각으로 절정에 달했다. 라플라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입자의 초기위치와 초기속도를 알기만 한다면, 미래를 전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뉴턴역학 내에서는 무작위성을 발생시키는 어떠한 메커니즘도 발견되지 않았다. 뉴턴역학을 마스터한다면, 누구나 라플라스의 결론을 내릴 것이다. 나도 뉴턴역학의 체계 내에서는 당연히 기계적 결정론이 결론으로 도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연적 사건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인과적 법칙에 따라서 일어난다. A의 뒤에 B가 일어난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A의 뒤에는 B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결정론적 세계관 내에서, 인간 자체도 필연적 운명에 따르게 된다. 미래가 고정되어 있는 그런 운명 말이다.

고전적 결정론으로 자유의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김필산의 사이언스비치 동영상


현재까지의 과학에서 완전히 순수한 무작위성을 발생시키는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알려져 있는 분야는 양자역학이 유일하다. 컴퓨터도 난수를 발생시킬 때 초기값을 입력해 줘야 한다. 하지만 양자가 관측될 때(파동함수가 수축될 때) 그 양자가 발견되는 위치는 순수하게 무작위적이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우리는 파동함수를 수축시키며 미래의 예측력을 완벽하게 무효화시키는 양자의 불확정적인 위치를 관측하거나(코펜하겐 해석) 계속해서 갈라지는 복수 역사의 갈림길 중에서 단 하나을 무작위적으로 골라서 그 속의 역사 속에서 입자를 관측하게(다세계 해석) 된다.


어려운 것은 인간이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자유의지는 고전적인 결정론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양자적인 우연론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가? 우리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노래를 부르게 될 때, 우리는 양자의 불확정적인 파동함수의 수축이 도화선이 되어서 그러한 일을 하는가? 우리가 배가 고파져서 밥을 먹게 될 때, 우리는 고전적인 인과론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는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가? 그 무엇이 자유의지를 우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게 하는가?

양자역학으로도 자유의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김필산의 사이언스비치 동영상


현재까지 알려진 자유의지에 관한 과학적 지식은 전무에 가깝다. 사람들은 왠만하면 자유의지를 우연론에도 필연론에도 지배받지 않은 그 무언가로 남겨두고 싶어한다. 만약 자유의지가 우연론 또는 필연론 가운데의 하나로 설명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유의지를 자유의지라고 부르지 않게 될 것이다.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세계관

사실 『쿼런틴』의 양자역학 해석의 아이디어가 완전히 최초인 것은 아니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기상천외한 SF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도 『쿼런틴』의 아이디어와 거의 흡사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우주선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한불가능 확률 추진기'라는 이름의 우주선 추진기는 양자역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확률만 '의도적으로 골라서' 우주선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우주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고래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우주공간에서 주인공들이 극적으로 조우하는 장면들이 전부 이러한 '거의 불가능한' 확률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수적인 현상이다. 더글러스 애덤스는 사실 소설 내에서는 추진기의 원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과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쉽게 지나쳤을 만한 부분이다.


『쿼런틴』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도 이와 동일하다. 우연적 확률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의도하는 바로 파동함수의 수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쿼런틴』의 양자역학 해석은 앞서 설명한 세 가지의 해석(코펜하겐 해석, 다세계 해석, 의식 해석)이 섞여 있다. 기본적으로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라 '파동 함수의 오그라듦(Collapse of wave function)'이 누군가의 관찰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고 있으며, 그 오그라듦을 일으키는 관찰 주체가 '의식을 가진 개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다세계 해석은 이에 비하면 해석될 여지가 적지만, 관찰로 인한 오그라듦이 사라진 마지막 장면의 세계관은 분명 다세계 관점을 연상케 한다.


의식 해석은 『쿼런틴』에서 가장 강조되는 개념이다. 의식적인 존재만이 파동함수의 오그라듦을 일으킨다고 하는 개념은 새로울 바 없지만, 그로부터 과거의 의식이 있는 존재가 살지 않았던 우주의 모습은 의식의 탄생으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다. 의식은 개체의 머릿속에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주의 모든 비결정적인 파동함수를 수축하는 '파괴자'가 되어 버린다.


우리의 우주는 본래 양자적 확률파동이 온 공간을 감싸고 있는 '파동의 바다'였던 셈이다. 모든 가능성이 존재했고, 거기에서 어떠한 행성은 파동함수를 수축시키지 않는 의식을 진화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파동함수의 불확정성을 구조적으로 담고 있는,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신비로운 세계 안에서 살아왔다. 지구도 마찬가지였으며, 의식을 담지 않은 그릇을 지니고 있는 모든 동식물들이 지구 위에서 파동함수의 전(全)가능성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 파동함수를 수축시키는 능력을 지닌 의식을 진화시킨 생물이 출현했다. 이것이 인간부터인지, 아니면 훨씬 전의 유인원이나, 포유류부터인지는 소설에서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하여간 이 생물체는 태어나자마자 '세계와 나'와의 관찰과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하고 풍성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우주의 파동함수를 무차별적으로 수축시키는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우주의 본모습을 제대로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직접 파괴한 우주의 폐허에서 아름다움을 느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설에서 나오는 『쿼런틴』, 즉 버블이라고 불리는 우주의 막은 이 지구인들의 우주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막화'를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었다.


앙상블

파동함수를 수축시키는 능력은 인간의 신경 세포, 즉 인간 뉴런의 고유한 능력이고 진화를 통해 완성된 우주적으로 특이한 능력이다. '특이'하다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아무도 그러한 능력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앙상블'은 인간 뉴런의 이 특이하고 파괴적인 능력을 죽이고 인간이 파동함수의 온전한 모습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는다.


사실상 앙상블을 켜도 인간의 지각은 아무런 변화를 감지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각은 파동함수의 수축만 감지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기관이기 때문이다. (외계인은 아마 파동함수의 우주를 관찰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앙상블 켜는 순간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의 그'와 중첩(superposition)된, 혼재된 상태가 된다. 관찰이 더 이상 파동함수를 수축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공간에는 미래에 A를 할 가능성의 나와, B를 할 가능성의 나와, C를 할 가능성의 내가 혼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모든 가능성 중에 하나의 가능성만을 골라서 그 파동함수를 수축시킨다. 이것이 앙상블의 기본 원리이다.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선 두 가지의 자아를 설정해야 할 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그 자아를 '제 1자아', '제 2자아'라고 칭하자. 제 1자아는 우리가 가진 보통의 자아이다. 이 자아는 '자유의지'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그 자유의지는 양자역학의 우연론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자아는 양자역학의 파동함수에 따라 '모든 가능성'을 다 지니고 있다. 이 가능성의 총체인 자아들의 집합은 각각 독자적으로 미래의 어느 순간에 목표 자물쇠의 0000번부터 9999번 까지의 모든 숫자를 눌러보게 된다. 이 가능성들은 아까 말한 것처럼 같은 공간에 '중첩'되어 있으며, 같은 공간이기 때문에 다세계 해석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제 2자아는 양자역학의 우연론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완벽하게 작동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제 2자아는 수억·수조의 가능성들 가운데에서 자물쇠가 열리는 미래의 가능성을 미리 흘끔 보고, 그 가능성만을 '자유의지로 정한 후' 수축시킨다. 이로서 제 1자아는 현실이 되고 선택되지 못한 모든 제 1자아는 '죽어버린다'.


모든 가능성이 공간에서 파동함수로 존재하게 되면, 그 함수들은 파동의 특성상 중첩되어 간섭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닉의 파동함수와 포콰이의 파동함수가 간섭되면 서로 각자 파동함수를 일으키는 것과는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소설의 중간중간에 <나 더하기 포콰이>라는 식의 표현이 종종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파동함수의 컨트롤을 통해 가능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장 기초적인 현상으로, 나 자체를 공간이동 시킬 수 있다. 심지어 막혀 있는 벽 사이도 통과할 수 있다(양자역학의 유명한 현상인 '터널 효과'라는 것이다). 무한불가능 확률 추진기도 이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며, 소설 속의 로라도 사실은 자물쇠를 따기보다는 터널 효과를 통해 병실을 탈출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원자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재배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그것을 통해서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효과도 일으킬 수 있다.


소설의 끝에서, 모든 사람들이 파동함수를 수축시키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아니,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기상천외하고 세기말적인 광경의 마지막에, 특수한 해석으로서의 다세계적 관점이 펼쳐진다. 모든 세계는 수축되거나 선택될 가능성이 없으며, 그에 따라서 수축에서 제외되거나 세계가 통째로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없다. 모든 가능성이 같은 공간 안에서 중첩되어 있긴 하지만, 인간의 지각으로 중첩된 파동을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열린 그 세계는 진정으로 다세계적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끔찍할 정도까지 세계가 일그러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그 천문학적으로 다양한 세계 중에서도 특별하게 끔찍한 세계를 골라서 묘사했다. 가능성은 확률일 뿐이며, 가장 높은 확률은 우리가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다. 작가의 마지막 말이 이 뜻을 함축한다. '모든 것은 결국 평범한 일상으로 귀속되는 법이다.' 대부분의 가능성은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세계를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확률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070905


그렉 이건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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