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호의 『경계 너머로, GEMAC』을 읽고
전윤호 작가는 전기컴퓨터공학 박사이자 IT분야의 전문가로서, SF를 쓰기 시작한 지는 2019년부터이다. 그의 전작 『모두 고양이를 봤다』는 탄탄한 공학 지식을 바탕으로 SF의 합리적인 상상력이 덧붙여진, 잘 쓰여진 SF이자 테크노스릴러 장르의 소설이었다. 그가 쓴 2019년 단편소설이 있는데, 『페트로글리프』라는 책에 실린 「노인과 지맥」이다. 『페트로글리프』는 SF꿈나무였던 내가 다닌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커뮤니케이터 양성과정 과학스토리텔러 부문'의 1회 우수작을 선정해 출판한 앤솔로지인데, 이 소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첫째로, 그가 처음 쓴 소설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이 작품 또한 『경계 너머로, GEMAC』과 같은 소재를 이용한 같은 세계관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두 소설에서 언급하는 GEMAC이란 다시 말하자면 '증강 침팬지'다. 작가는 Genetically-Enhanced Machine-Augmented Chimpanzee의 약자로 GEMAC이라는 두문자어 단어를 만들었는데, '증강'이라는 우리말 단어는 중간의 'Augmented'의 영어단어의 번역어이다. '증강' 또는 'augmented'라는 단어는 '증강현실'이라는 최신 기술 트렌드 단어로 잘 알려져 있고, 그 뜻은 어떤 것에 무엇인가를 얹어서 더 강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대충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러므로 Machine-Augmented Chimpanzee는 '기계로 증강된 침팬지'를 말한다. 게다가 이 침팬지는 Genetically-Enhanced, 즉 유전학적으로 강화되기까지 했다. 바이오+기계라니, 보통의 작가라면 한 층위의 소재만 쓰는 것도 벅찬 작업일텐데, 이 작가가 SF소재를 얼마나 잘 층층히 쌓는지 그 수준을 알만 하다.
현실엔 뇌파를 이용해 기계를 조작하는 모든 기술들을 BCI (Brain-Computer Interface) 혹은 BMI (Brain-Machine Interface)라고 부른다. 즉, 뇌를 이용해 컴퓨터나 기계를 조작할 수 있도록 인간 뇌파에 알맞는 뇌파 인식 장비이다. 우리는 집중력이나 의식적 주의 등을 통해 뇌파를 유의미하게 변화시킬 수 있고, 그 변화를 바탕으로 기계가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할 수 있다. 오호라? 그럼 혹시 그 인터페이스의 반대 방향의 뭔가를 인간의 뇌에 달아서, 생각만으로도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것까지 가능한 게 현대 기술이다. 이걸 BBI(Brain-brain Interface)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동물과의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할지도? 동물이라고? 절대 안된다. 하물며 인간과의 BBI도 딱히 뭔가 잘 되는 게 없다. 애초에 뇌파는 비언어적이기 때문에, (또는 뇌파 정보를 언어 정보로 인코딩하는 기술은 여전히 요원하기 때문에) 물론 그 정보의 밀도 수준은 우리의 기대보다는 훨씬 떨어진다. 차라리 폰으로 전화를 하는 게 속편할지도 모른다. 뭐? 서로의 감정을 느끼는 통신? 감정이야말로 뇌파든, fMRI든, 심박수나 기타등등 바이오시그날이든, 측정하고 맞추기 매우 어렵다고 소문난 변수다. 차라리 얼굴 표정을 보는 게 제일 편하고 또 맞출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일진대, 대체 동물과 BBI로 뭘 통신할 것인가?
무릇 SF라면 현실에서 어느 정도 개발된 기술보다는 좀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 조금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더라도 그게 더 재미있다는 것을 알고 그 방향으로 과감히 달려가는 자세도 중요하다. 극중 증강 침팬지란 바로 이 인간과 동물과의 BBI가 가능하도록 개조된 침팬지이다. 다만 인간과 인간 사이의 BBI와 다른 점은, 동물을 말을 못하고 또 그에 따라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점. 아니 뭐, 침팬지 통역기 달아주는 격 아님? 요새 강아지 통역기도 나왔더구만. 그게 바로 하드SF가 갈리는 지점일 텐데, 굳이구태여 침팬지가 "인간의 심층 언어 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고 현실적으로 가정하고 그에 맞춰서 BBI 시스템도 작품 내에서 세세한 설정을 추가해 그 세계관을 한층 탄탄하게 갖춰 나가는 묘사. 이게 바로 이 작품에서 추구하는 바일 테다. 작중에서 침팬지의 증강은 심지어 그 뇌 인터페이스를 달기 위해 '침팬지 자체의 유전자를 강화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게 바로 GEMAC 앞부분의 Genetically-Enhanced의 뜻이다. 일반적인 침팬지의 뇌로는 그 BBI 커뮤니케이션이 택도 없으므로, 아예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침팬지를 유전적으로 개발하겠다는 것.
사실 굳이 이런 설정을? 그냥 말하는 침팬지가 여기 있다고 하자. 라고 하면 안됨? 이란 생각도 들겠지만, 거기서부터 하드한 SF의 재미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전통적으로 인간과 동물을 상호호혜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주고, 우리는 그들의 유전자가 번영하도록 돕는다. 말, 소, 양, 닭, 다 그래 왔다. 물론 가끔은 그들이 제공하는 물질은 그들의 고기와, 그들의 생명인 경우가 있지만. (아니, 가끔이 아니고 대다수인가?)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또 가장 특수한 관계는 바로 인간과 개의 관계이다. 개와 인간의 관계는 단지 서로의 이득을 보전해 주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감정적으로 얽혀서 가끔씩 손해를 보면서까지 돌봐주는 관계까지 발전했다. (고양이도 있다고? 한낱 떼껄룩의 역사는 갓댕이와 인간의 그 끈끈하고도 유구한 역사에 비하면 근본이라곤 없는 역사일 뿐이다.) 꼬리를 흔들어 격하게 주인을 반겨 주는 개와, 때로는 가장 내밀한 공간일 침대에까지 그들을 뉘이는 인간들의 행태를 볼 때, 이건 확실하다. 인간은 때로는 자신의 종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까지 기꺼히 감정을 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뭔가 감정적이면서도 상호이득을 넘어선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를 그리는 창작물은 무엇인가 마음을 울리는 게 있다. 그리고 그걸 성공적으로 그려내어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세계관이 있다. 바로 포켓몬스터. 그들의 관계는 주종관계, 또는 한낱 싸움 도박의 유희를 위해 키우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서 있다. 그러나 난 이 포켓몬스터의 동물-인간 관계에 끝도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포켓몬스터라는 동물은 인간에게 포획된 후로 단지 몬스터볼이라는 케이지에 갇혀서 거의 평생을 보내지만, 그에 대해 인간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동물윤리에 있어서 한없이 물음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걸로 괜찮은가? 동물은 괴롭지 않은가? 인간은 그런 동물을 다루는 관점에 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가? 이 세계관이 하드SF로, 또는 하드한 현실 윤리학을 중점적으로 다루려면, 이런 식이어야 한다. 실제로 동물들은 그 좁아터진 케이지에서 극도의 괴로움을 느끼고, 인간은 그 한없이 비윤리적인 주종관계, 한정된 공간만 제공하고, 가끔씩 불러내서 시킨다는 게 도박성 싸움인 그 비참한 동물들의 생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간의 감정과 정보를 다이렉트로 통신하는 증강-뇌 인터페이스가 껴든다고? 그리고 그걸 위해서 아예 동물의 유전자를 변형하고, 인간도 그에 맞춰서 아기 떄부터 훈련받아 왔다고? 이렇게 비인간적인 처사라니! 여기서부터 당신의 하드SF 감성은, 포켓몬스터의 그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지만 위화감이 드는 세계관에 지친 당신의 감정은, 다시금 촉촉하게 젖어들어야 한다. 하드SF는 딱딱하고, 수학공식이 난무하고, 못알아들을 우주의 신비 운운하며 현학적인 물리학 놀이를 하는 장르가 아니다. 기술 사이에 숨어 있는 휴머니즘이다. 주인공과, 테크놀로지를 통해 그와 원초적으로 교감하는 침팬지들, 그러나 그들이 받은 비인간적인 처우들은 소설적 장치를 통해, 때로는 또 다른 하드SF적인 설정들을 통해 해결된다. 그렇게 이 작품은 훌륭한 결말로 끝맺는다.
생각으로 침팬지 군단을 조종하는 (포켓몬) 트레이너가 거대 기업의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기라니, 재미있을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는 거대한 철학적 질문을 준비해 놓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인류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가?
- 김필산 과학 유튜버/SF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