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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고

바벨탑을 세우는 퓨전 역사 판타지가 하드SF인 이유

당시엔 나도 SF에 대해잘 모를 때니(지금 SF에 대해 잘 안다는 말 아님!)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특히 책에 가장 앞에 실린 작품인 「바빌론의 탑」을 읽었을 때 어리둥절했다. 배경은 역사적 과거에, 소재는 성경에나 등장하는 바벨탑이고, 세계관은 현실과는 다른 판타지였으니. 이 장르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역사 소설? 신화 소설? 판타지 소설? 그런데 작가는 하드 SF 작가라고?


SF 또는 과학소설이란 무엇인가? 물론 당시의 나도 우주선과 레이저 총과 로봇이 나와야 한다는 '공상과학소설'식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니었다. 지체장애인이 잠시동안 똑똑해지는 『앨저넌에게 꽃을』이나 자폐증 환자가 자폐 능력을 잃게 되는 『어둠의 속도』도 SF 장르의 지평에서 읽어본 적이 있으니까. 셰릴 빈트와 마크 볼트의 『SF 연대기』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텍스트에 일단 그것이 SF라는, 혹은 SF가 아니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그 텍스트를 읽는 경험도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하고, 독자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위치에 따라 그 텍스트의 서로 다른 특징들이 지배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 - Ted Chiang (차례대로 구판, 신판, 양장판)

'리틀 테드 창'이라고 불리고 싶어하는 것 같은 켄 리우 또한 SF 작가라는 테두리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의 몇몇 단편은 'Science' 적이지 않은 Fiction이다. 『종이 동물원』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 동명 「종이 동물원」이 그렇다. 종이접기로 만든 호랑이가 마법에 의해 움직인다. 그런데 책 『종이 동물원』에는 절반 정도는 SF로 불러줄 수 있는 단편들이 있기 때문에 단편 「종이 동물원」을 위시한 절반의 SF적이지 않은 단편들을 SF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면서 작가 켄 리우도 SF 작가라는 정체성을 가진다.


좋다. 그런 취지에서 테드 창 또한 SF작가이다. 작품이 다루는 주제와는 상관 없이 스스로 자신을 SF작가로 자신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드'SF 작가라는 건 또 뭔가? 「바빌론의 탑」이 SF라는 건 그렇다 쳐도 하드 SF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건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드SF란, 아이작 아시모프의 우주적인 세계의 인간과 로봇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던가, 아서 C. 클라크의 중력과 우주여행에 대한 장대한 서사시라던가, 아니면 우주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렉 이건의 『쿼런틴』처럼 물리학적 법칙의 특별한 점 때문에 세계관과 서사가 극적으로 바뀌는 작품을 정의하는 장르 아닌가? 그런데 바벨탑을 소재로 한 역사 판타지 세계관의 소설이 하드SF라니?


물론 이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여러 작품이 과학 이론이 소설의 핵심 주제를 집적거리는 하드SF인 것은 맞다. 「네 인생의 이야기」 ('당신'은 책 제목이고 '네'는 단편소설 제목이다. 구별할 수 있도록 한 번역자 김상훈님의 센스임)는 언어학 이론과 물리학 이론을 복합적으로 이용한 하드SF 설정이고, 「영으로 나누면」은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떠올리게 하는 수학 체계의 불완전성을 증명해 버린 수학자의 고뇌를 다룬 소설이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는 '실미증'이라는 인위적인 신경 손실에 대해 다루는데, 이는 여러 특이하고 괴상한 실제의 신경학적 실인증 증세(무시증, 카프그라 증후군,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등)를 알고 읽으면면 더 재미있다.


그런데 다른 작품들은? 「바빌론의 탑」은 아까 얘기했고, 다음으로 논란이 될 작품이 「일흔두 글자」와 「지옥은 신의 부재」일 것이다. 「일흔두 글자」는 '이름'이 골렘의 물체의 작동 방식을 결정짓는다는 세계관이다. 마치 진명(眞名)에 물체의 본성이 담겨 있다는 판타지 소설 『어스시 연대기』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일흔두 글자」는 스팀펑크라는 장르적 문법 아래에서는 가까스로 SF라고 봐줄 건덕지가 있다. 스팀펑크는 여러 가지 역사적 이유로 인해 (사이버펑크의 계승, 대체역사물이라는 서브 장르의 SF성) SF라고 인정되고 있고, 「일흔두 글자」의 산업혁명 시대 대체역사의 느낌 때문에 스팀펑크 '스럽다'. 그러나 실제로 스팀펑크 장르의 소설은 대체역사적인 재미에 방점이 찍혀 있지, 이 소설처럼 유대교의 신비주의적인 소재가 세계의 진리인 척하는 판타지적인 분위기를 내지는 않는다.


「지옥은 신의 부재」는 더 심각하다. 이 세계는 기독교의 '기적'이 명확하게 또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세계로, 기적을 통해 죽은 사람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천국 혹은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깊은 수준의 작품의 정체성은 '기독교 까기'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세계관은 실제 세계의 물리학이나 과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많이 양보해서 'SF작가가 쓴 판타지스러운 소설'이라고 본다 해도, 이걸 하드SF라고 볼 수 있다니?


테드 창의 17년만의 두 번째 소설집 테드 창의 『숨』을 리뷰한적이 있다. 이 책에서도 '정체성은 하드SF 작가, 작품은 판타지'라는 문제에 봉착할 만한 작품들이 발견된다. 중세 아랍 배경의 시간여행 포탈을 다룬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바빌론의 탑」과 비슷한 역사적 판타지), 산업혁명 분위기를 내는 데이지의 기계식 자동 보모」(「일흔 두 글자」와 비슷한 스팀펑크'라이크'),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실이라고 가정한「옴팔로스」(「지옥은 신의 부재」와 비슷한 기독교 까기)가 있다.




이에 대해 지은이 테드 창이 SF 장르의 특성에 대해 한 얘기가 있다. 나무위키에 나와 있다. (나무위키 꺼라...라고 말하고 싶은 거 아는데 엔하 위키 시절에 내가 저 내용을 옛날에 절판된 잡지 『판타스틱』에서 뒤져서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SF와 판타지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판타지는 근본적으로 우주의 일부는 영원히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오랫동안 판타지가 이어져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우주를 신비한 존재로 여겼고 신 또는 마법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래를 배경으로 판타지를 쓴다면 언뜻 SF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을 파고들면 실제로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판타지와는 달리 SF는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우주는 기계와 같은 것이고, (과학을 통해) 그것을 탐구하면 우리도 우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주를 더 깊게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 지식은 전파되고 인류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과학적 사고방식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이라서, 그런 관점에서 쓰인 이야기들을 500년 전, 1000년 전 사람들이 읽는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SF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런 식의 새로운 이야기들이다.


이 장르 구분 이론에 따르면 『스타 워즈』와 『듄』은 판타지이고 『해리 포터』는 SF이다. 『스타 워즈』의 '제다이'와 『듄』의 '예지력'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즉 '마법'이다. 그러나 『해리 포터』의 시민들은 적어도 마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낸다. 마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지식을 전파하여 '마법부' 등의 정부 기관을 세우고, 철도와 신문, 장난감들을 만든다. 물론 이 구분이 칼로 깔끔하게 잘리는 구분법은 아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엔 머글과 마법사의 구분이 있는데, 머글이 아무래도 절대 다수를 차지할 테니 마법사 사회에서 전수되는 마법의 논리적 설명 같은 건 여전히 머글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판타지이다.


여기서 익숙하지 않은 문과 단어인 '핍진성'을 얘기해야겠다. '개연성'과 비슷한 말인데 좀 다르다. 누가 트위터에서 우스갯소리로 이런 얘길 했다. 조선시대 영의정이 오도바이를 타고 출근해도 괜찮지만, 주상전하 앞에 오도바이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천인공노할 짓이라고. 조선시대에 오도바이가 등장한다면 개연성은 똥망이겠지만, 만약 장르가 퓨전 판타지 사극이라면 개연성이 똥망이 되어도 별 상관 없다. 세계관 내에서의 정합성을 일컫는 '핍진성'을 지켜진다면 괜찮다는 말이다.



테드 창이 작품 내에서 '판타지적인 세계관'의 정합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어떻게 보면 '과학적 핍진성'이라고 불러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니까, SF에서 다루는 '과학'에도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인가? '과학적 개연성'은 현실 세계에서 다루는 과학 이론을 작품 내에서 '고증'하는 걸 말한다. 때로 어떤 하드SF 매니아들은 작품의 과학 이론이 '고증'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여기서 '고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틀렸다고는 하더라. 그래도 대체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므로 걍 쓰겠다) 그들에게는 테드 창의 작품들이 SF도 하드SF도 아닌 판타지일 테다. 그런데, 핍진성 측면에서는 어떤가? 테드 창의 작품은 '과학적 핍진성'에 있어서만큼은 SF를 넘어서 '하드SF'라고 불릴 만하지 않은가?


「바빌론의 탑」의 세계관은 현실 세계처럼 하늘 위로 무한히 펼쳐져 있는 세계가 아니다. 주인공은 태양과 달을 지나 하늘의 '끝'을 맞이한다. 그 끝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과학적 핍진성'을 따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질문이다. 일반적인 판타지 소설에서 '세상의 끝'이란 말 그대로 '끝'일 뿐,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굳이 궁금해하지 않는다. 「일흔두 글자」의 이름도 마찬가지. 판타지 소설의 『어스시 연대기』의 이름 설정보다도 더 상세한 설정을 자랑하며, 등장인물은 이 이름을 공학적으로 응용하다가 결국 생물학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한다. 「지옥은 신의 부재」는? 글쎄, 아예 SF라고 불릴 만한 건덕지 없는 작품도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나? "독자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위치에 따라 텍스트를 읽는 경험도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하니까 말이다.


'과학적 핍진성'이라는 근본 없는 개념에 대해 불만이라고? 상관 없다. 내가 말했지만 어쨌든 가설에 불과하니까. 테드 창이 하드SF 작가면 어떻고 '비록' 판타지 작가에 불과하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의 작품이 어쨌든 하드SF를 즐기는 독자들에게 꼭 맞는 작품들이면 되는 거 아닌가?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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