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켄 리우의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이하 『...순록 떼가』) 를 읽고 혹평을 내린 적이 있었다. 소설적 재미나 완성도도 떨어질 뿐더러, 소설 내부에 깊숙히 내재된 배타적 중화사상이 (작가가 미국인 2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인 나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얘기였다.
그 글에도 언급하긴 했지만, 『...순록 떼가』가 켄 리우의 대표작도 아니고 B-side 모음집 성격의 책인지라 비판은 좀 과한 면이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켄 리우의 대표작, 『종이 동물원』을 리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작품 전부 일관적으로 재미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켄 리우라는 작가의 본성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가 『...순록 떼가』에서 본 모습은 오해일 가능성이 큰 것이겠지. 차례는 재미순으로.
Ken Liu - Paper Menagerie
상태 변화 (2004)
'황금나침반'의 상징 동물처럼, 이 세계 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떤 상징 물체를 가지고 있다. 이 물체가 파괴되면 죽는다고 한다. 주인공은 얼음을 상징 물체로 가지고 있는 여성인데, 얼음은 녹기 쉬우므로 항상 냉장고 근처에 있어야 한다. 이 세계관에서, 이정도는 준수한 편인 모양. 양초나 조약돌같이 튼튼한 물체를 가진 사람도 있지만, 소금처럼 까딱하면 없어져 버리는 물체를 가진 사람은 삶이 고달플 것이다. 결말에는 반전이 있으며, 이 반전이 소설을 빛나게 한다. 소재는 가장 시시했고 SF도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작품 중 가장 베스트로 꼽는다.
종이 동물원 (2011)
중국인 어머니를 둔 미국 혼혈 주인공이 어머니와의 문화적 갈등을 겪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어머니의 소통을 그리워한다는 이야기. 그 매개체가 종이접기로 만든 호랑이인데, 이 세계관의 종이접기는 움직이고 말을 할 수 있다. 그 분위기는 마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의 마술적 사실주의같다. 표제작 답게 진한 여운을 남기며 가장 좋은 소설의 순위권 내로 꼽을 수는 있지만, 결국 결말이 신파라서 1순위로 꼽기게 약간 망설여지는 감이 좀 있다. SF 아님.
송사와 원숭이 왕 (2013)
명청교체기의 실제 역사서인 '양주십일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재창작한 픽션인데, 역사소설 중 한 에피소드를 읽는 것 같은 중국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역사적 사실과 매끄럽게 이을 수 있는 결말도 그렇고 좋은 여운을 남겼다. 역사를 읽어 본다면 그냥 그런 소재라고 볼 수 있지만(일본에서 발견된 역사서가 있다더라), 이렇게 픽션으로 재창작해 역사적 상상력을 끌어올리는 데 좋은 소재였다(정권에 반대하는역사 기록자가 목숨을 부지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더라. 그 책으로 결국 정권이 몰락했다더라). 마찬가지로 SF 아님.
레귤러 (2014)
여성이 주인공인 하드보일드 작품. 하드보일드의 주인공이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 형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난 좋은 설정이다. (이것이 페미니즘 SF인가?) 주인공 뿐만 아니라 벌어지는 사건과 주제의식도 거슬리지 않게 '적당히' 여성주의적이다. 소재는 '레귤러'라는 단어의 중의성을 이용했는데, 머리 속에 심는 '레귤레이터'라는 장치는 감정을 조절한다는 기기로 좋은 SF적 소재이고, '레귤러'라는 단어의 원 뜻을 이용한 말을 곳곳에 사용해 문학적 느낌도 살린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 (2012)
넷플릭스의 『러브, 데스+로봇』이라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영상화된 소설. 개항기 홍콩의 서양 문명에서 살아가는 시골 출신 요괴 사냥꾼과 여우 요괴 이야기인데, 서양 문명이 증기로 작동하는 사이버네틱스 로봇을 만드는 '스팀펑크' 세계관이라는 점이 좋은 SF 포인트이다. 애니메이션은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담았는데, 홍콩의 빅토리아 피크를 위시한 언덕 위의 까마득히 높은 빌딩숲을 보여주어 소설의 스팀펑크 이미지를 정말 잘 되살렸다.
파자점술사 (2010)
주인공은 대만에 주둔한 미군의 딸인데, '파자점술가'라는 대만인 할아버지를 만나서 파자점술에 대해 배운다. 파자점술이란, 한자의 형태를 분해해 의미로 점을 치는 점술이라고 한다. 대만의 근대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건을 그린 작품. SF라기보다는 '종이 동물원'처럼 마술적 사실주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작품이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2014)
2차 대전을 치루지 않은 대체 역사, 일본 제국과 미국은 태평양을 횡단하는 터널을 공동으로 만든다. 터널의 중간에는 도시가 있으며, 그곳에 터널 공사 인부인 주인공이 산다. 전쟁 죄수들을 이용해 공사를 진행한 주인공은 터널 붕괴 사고로 갇혀 버린 포로들을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죄수들은 같은 고향에서 온 잡범일 뿐이었다. 비극적인 아시아 현대사를 소재로 한 대체역사물이며, '태평양 터널 한 가운데 도시가 있다'는 SF 설정도 좋았다. 그러나, 대체역사의 지점 때문에 (2차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결말의 도덕적 선택의 당위성이 약간 빛을 바랜다 (그렇다면, 전쟁범죄도 없었던 것 아닌가?)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2011)
쌍생성이든, EPR 역설이든 뭐든 간에 입자 관측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에 대한 얘기는 아니고, 그 기술을 통해 역사학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얘기다. 역사는 언제나 텍스트로 전해졌으나, 이 기술이 개발되자 시각화가 가능해졌다. 즉 눈으로 직접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역시나 아시아 현대사에 대한 주제다.
천생연분 (2012)
페이스북 같은 대기업 존재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세상인데, 이웃이 약간 음모론자라서 대기업이 빅데이터를 이용해 감시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들어 보면 흔해빠진 스토리 같은데, 이건 우리가 넷플릭스 에서 2019년에 만들어진 『거대한 해킹』 등의 다큐멘터리를 벌써 많이 접해보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2012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 당시에 이 소설을 봤다면 더 흥미진진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이 소설을 읽어보니, 미래에 대한 기가 막힌 예측력이 이미 다 실현되었기 때문에 진부해진 것이다.
실제로 『종이 동물원』을 읽어보고 느낀 건...내 기대치보다도 더 괜찮았다는 것이다. 소설적 재미에 있어서도 탁월했으며 중화사상보다는 미국 이민자 2세로서 느끼는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과 교감 같은 주제의식이 더 잘 느껴졌다. 많은 소설들이 SF가 아니었지만 그것 때문에 감점될 만한 꼬투리는 잡을 수 없었고, 전체적으로 마술적 사실주의적인 일관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에 작가 스스로 SF 작가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합당해 보였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의 반성의 글이다. 켄 리우는 좋은 작가이며 그의 소설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순록 떼가』에서 살짝 느껴지는 배타적 중화 사상은 사실 오해의 여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왜 표지는 그렇게 이쁘게 만들어가지고...여러분, 켄 리우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순록 떼가』의 표지에 혹하지 마시고 꼭 『종이 동물원』 먼저 읽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순록 떼가』까지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