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원작 소설에서는 우리 호크아이께서 수학이니 피보나치 수열이니 말로만 깝치시다가 결국 "0.08333=1/12야!" 이런 수학 상의 대발견이나 하는 역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사실은 이 물리학자가 하는 역할이 지대했었고 그게 플롯의 핵심 사상을 관통했는데 그게 삭제되어 아쉬울 뿐. 물론 갑자기 영화 중간에 닥터 이안의 재미있는 물리학 강의 같은 게 나온다면 김필산 같은 '혼모노'나 열광하는 영화가 되고 말 테지만.
물론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도 까딱했다가는 보-링한 물리 이론 설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걸 넘어서 이 글이 원작자 테드 창의 소설 해제 비스무리한 것같이 보이고 싶긴 하다. 내가 요새 SF글쓰기 강의를 듣는데 SF소설가이신 강사님께서도 SF 중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물리학 강의는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만 할 필요악이고, 독자는 그냥 자연스레 아 그렇구나...하하하...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하면서 넘어가도 된다고 말씀하시더라. 테드 창의 소설에도 사실 그 장면이 있는데, 심지어 물리학자 이언(소설에서는 게리라는 이름)이 루이스한테 그림을 그려주면서까지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림은 구글에 '페르마의 원리'로 검색하면 나오는 누구나 다 아는 빛의 굴절 그림인데, 물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페르마'는 여백 부족 드립의 그 페르마가 맞다.
페르마의 원리를 설명하는 원작 소설의 삽화
놀라운 사실은 페르마의 원리가 빛이 어떻게 가는지를 뉴턴 역학이 통상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방식을 취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페르마가 뉴턴 이전의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뭐 뉴턴이 물리를 평정하기 전에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넌지시 시도하다 틀리면 "헤헤 틀렸네… 아님 말고"라 해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여럿 재야 학자들의 활동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페르마의 원리는 사실 '해밀턴 역학'이라는, 뉴턴 역학 외에 물리학의 또 다른 가지가 된 '대안적 법칙'의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페르마의 원리 안에는 어딘가 기묘한 설명 방식이 존재한다. 빛이 두 점 사이에서 최소 경로를 선택해 간다는 설명인데, 빛이 '선택'한다는 얘기가 웃기기도 하거니와 빛이 최소 경로를 알기 위해, 즉 선택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디시전 메이킹을 하듯이 이 경로를 한 번 조사해 봤다가 음 최소가 아니군... 하고 또 다른 경로를 조사해 보고... 이런 "트라이얼 앤 에러(Trial and error)"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소린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당시 원리가 알려졌을 때는 아 뭐 이런 설명도 있겠네... 흥미롭군... 하고 그냥 괴짜 물리학 정도로 치부해 버렸는데...
해밀턴 역학이 등장으로 물리학의 역사가 또 한 번 뒤집어졌다. 해밀턴은 누구나 다 아는 그 '케일리 해밀턴 정리'의 그 해밀턴인데, 해밀턴 역학의 핵심은 운동에너지가 최소로, 위치에너지가 최대로 되는 경로로 물체가 선택을 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틀릴 가능성 있음. 10년 전 배운 거라...) 그게 뭐냐면 "선생님 물체는 왜 떨어져요?"라는 질문에 위치에너지가 최소로 되기 위해 떨어진다는 초딩 수준의 답변과 일맥상통인데, (틀릴 수 있음) 해밀턴 역학은 페르마에서의 빛을 모든 물체로 확장했기 때문에 페르마의 원리보다 더 범용적이면서도, 실제로는 페르마의 원리와 동일하게 '최소 작용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완전한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대딩 2학년 때 권영준 교수님의 고전역학 수업에서 해밀턴 역학을 처음 접했는데, 대충 에너지 때려박으면 뉴턴의 3법칙 쓰지 않고도 문제가 술술 풀려서 놀라움을 느낀 적이 있었던 생각이 난다. 즉, 해밀턴 역학은 뉴턴 역학과 동일한 설명력을 가지면서 고전 체계 내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완전성까지 갖췄다는 것이다(후에 설명하겠지만, 사실 해밀턴 역학은 뉴턴 역학 그 이상임)
경이로운 사실 아닌가? 세상이 설명 가능하단 사실도 경이로운 와중에(아인슈타인이 그랬다지. 이해 불가능한 것 중 하나는 세상이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두 가지나 되다니. 원래 "내 인생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출발하는 소설이었다. 만약 해밀턴 역학을 메인 인식으로 하는 외계 종족이 있다면? 그리고 그 종족이 해밀턴 역학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그 불가해한 "경로의 선택"을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인지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면?
이 내용이 소설에서 어떻게 작용하냐면 인과론적(뉴턴적) 시간의 흐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언어든 물리학 법칙이든 인과적인 사건의 발생 순서를 가장 쉽게 받아들이는데 비해, 헵타포드는―그 생김새도 그렇지만서도―시간의 전체적인 처음과 끝을, 마치 빛이 최단 경로를 시간 순서에 상관없이 미리 아는 것처럼, 미리 알고 그것을 최소 작용의 원리에 입각하여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헵타포드의 시간 관념을 가지면 과거와 미래를 전부 다 인식하는 와중에, 언어 발화든 행동이든간에 개체의 의지적 행동은 미래를 바꾸는 가능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을 시장으로 임명합니다"와 같은 선언적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미래의 사건을 안다 해서 그것을 토대로 과거의 역사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근데 영화에서는 그런 "페르마의 원리"적인 인생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고 미래의 장군에게서 전화번호를 따오는 기제로만 쓸 뿐이다. 이 설명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루이스는 딸이 불치병에 걸릴 것을 알았으면서도 임신했으니 쌍년이네"같은 오해도 나오고 그러는 것이다. 애초에 원작의 해석대로라면, 딸이 불치병에 걸릴 줄을 알면서도 미래를 바꿀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인생이 '최소 작용'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해밀턴 역학의 미래는 어떻게 되나? 해밀턴 역학의 원리인 '최소 작용의 원리'는 양자역학을 구축하는 데 토대가 되는데, 이것은 뉴턴 역학보다도 더 기초적인 원리가 바로 해밀턴 원리라는 얘기가 된다. 리처드 파인만은 사실 빛이 경로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빛이 지나갈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전부 지나간다는 존나 또라이적인 설명을 만들어 냈다(경로 적분). 이쯤 되면 거의 현실이 SF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물론 SF는 일반인에게도 영향력을 미쳐야 하므로, 파인만이 스티브 워즈니악이라 치면, 테드 창은 그 성과를 재밌게 잘 포장한 스티브 잡스에 비유할 수 있겠다. 물론 그 프레젠테이션에 과감하게 '최소 작용의 원리'같은 개념을 집어넣어도, 좋은 서술만 한다면 사람들이 좋아해 줄 수 있다는 과감한 자신감이 있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