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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F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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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C. 클라크의 『낙원의 샘』을 읽고

경이감의 공학, 탈 것의 등장을 그린 SF

프레데릭 폴은 “훌륭한 SF는 자동차의 등장이 아니라 교통 체증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동차의 등장만으로 훌륭한 SF가 되는 것도 가능하며, 오히려 그게 더 어렵고 위대한 작업일 수도 있다.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 /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Arrival)는 외계인과 처음 만나 외계 언어를 연구하는 인간들을 그리고 있다. 프레데릭 폴의 말에 비춰보면, SF는 외계 언어의 학습법이 아니라 외계인과 의사소통이 이미 자유로운 시대에 대해 다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의 SF는 수도 없이 많지만 외계 언어에 대한 학습에 관한 SF는 단 하나, 「네 인생의 이야기」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서 클라크의 『낙원의 샘』 또한 교통체증이 아니라 자동차의 등장을 그린 SF이다.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치고’ 우주에 올라갈 수 있게 해놓은 SF가 아니라, 궤도 엘리베이터의 설계와 구현 그 자체를 그리는 작품이라는 말씀이다. 아니, 그런 게 명작이 될 수 있는지를 떠나서, 작품이 될 수나 있을까?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모험하는 소설 대신, 우주선을 만드는 과정을 그리는 스타 워즈, 타임 머신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대신 타임 머신 그 자체를 그리는 백 투더 퓨처라고?

Arthur C. Clarke — The Foundations of Paradise

그걸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바로 SF의 대가 ‘아서 C. 클라크’의 힘일까? 아니면 궤도 엘리베이터라는 소재 자체가 워낙에 그런 것일까? 궤도 엘리베이터의 설계와 공학적 구현 과정을 잘 생각해 보자. 


30000km 상공에 위치한 정지궤도는 에베레스트 산의 4000배나 높은 곳에 있다. 로켓을 타지 않고는 현재 어떤 인류도 대기권 만큼도 올라가본 적이 없는데, 궤도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지구 지름의 5배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준다. 설치된 궤도 엘리베이터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공중에서 내려온 줄은 지구의 하늘을 이등분하는 듯한 경이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하늘에서 내려온 줄을 타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내부의 인간은 극도의 고소공포증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줄은 땅에서부터 튼튼하게 올라온 빌딩이 아니라, 아무런 받침도 존재하지 않는 공중에서 내려온 줄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엄미는 SF의 특성 중 하나인 경이감을 극도로 잘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만약에 400km 상공에서라도 사고라도 난다면? 궤도 엘리베이터나 로켓 말고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만한 궤도에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인류에게,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며 이것을 풀기 위해 SF소설로도 이만한 서스펜스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궤도 엘리베이터의 건설은 경이감을 추구하는 SF의 매우 좋은 소재임이 틀림없다. 소재 발굴 능력 또한 좋지만, 그 궤도 엘리베이터의 경이감을 스리랑카의 역사성과 결합시킨 능력은 아서 클라크라는 SF대가의 솜씨임이 틀림없다. 특히 스리랑카의 위대한 유적 ‘스기리야’를 소설적으로 녹여내어, 궤도 엘리베이터의 SF적 경이감과 결합시킨 것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 보라. 하늘을 쪼개는 듯한 장엄한 궤도 엘리베이터가 종교적으로 신성한 산의 꼭대기와 맞물리는 장면을. (물론 실제 스리랑카는 적도를 지나지 않으므로, 정지위성과 궤도 엘리베이터에 필수적인 적도 위치를 위해서 스리랑카는 가상의 나라 ‘타프로바네’가 되어야 했다.)


결말도 놀라운 경이감으로 가득차 있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결국 지구의 적도를 휘감은 인공 고리가 되고, 그것을 외계인이 바라본다. 외계인이 너무 착하고 만능에 아서 C. 클라크 특유의 철학적 결말로 끝을 내어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낭만적인 고전 SF의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더. 한국판 표지 디자인이 매우 좋다. 흰 색의 그림은 지구와 궤도 엘리베이터, 그리고 결말의 사건이 벌어지는 위치를 나타내는 그림이다. 아름답고 깔끔할 뿐더러, 소설 내용을 잘 요약한 느낌이 매우 좋았다. 켄 리우의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도 내용과는 상관 없이 표지가 정말 좋았다. 그놈의 한국 SF의 저변이 이제야 드디어 넓어지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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