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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누구지?

엽편소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게 되었다.


이 말은 참 이상하지만, 하여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었다. 물론 내 머릿속엔 어릴 적의 기억부터 어젯밤 잠이 들기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또렷하지만, 일단 그 기억은 내 기억이 아니라 그 녀석(즉, 어제의 나)의 기억이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가 아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기억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이렇게 특수한 상황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어찌하다보니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앉게 된 것이다.



어머니(그의 어머니)께서 밥을 차려 주시고, 그녀가 날 마치 그인 것처럼 대해 주셨지만, 난 어색해 견딜 수가 없어서 바쁜 척하며 얼른 집을 나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만, 딱히 갈 곳도 없다. 그가 가던 회사를 가서 그의 행세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가던 곳이 있던 것도 아니다.(이상한 일이지만 난 과거의 기억이 없다.)


공원에서 저녁때까지 빌빌거리고 있는데 그의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쩔 도리가 없이 그의 행세를 하기로 작정하고 그녀를 만나러 버스를 탔다. 그녀는 날 만나서 반가운 행세를 했지만 난 맞장구쳐주기엔 어색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일단 그녀는 남의 여자친구 아닌가.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그의 기억이 아닌 내 기억)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다.


일단 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녀에게 이 심각한 상황을 얘기하기로 했다. 그녀를 앉혀 놓고 존댓말을 써 가며 오늘 아침부터 일어난 이 이상한 사태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물론 어떤 사람도 이런 얘기는 믿지 않는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당황했고(보통 영화나 뭐 이런 데서는 요따구의 상황에선 여자가 “싫으면 솔직히 싫다고 말해!”하고는 뺨따구를 한대 후려갈기고 울면서 달려갈 텐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집에 들어가서 푹 쉬고 다음에 다시 만나자 하더니 냉큼 뒤돌아 떠나갔다. 난 또다시 공원에 혼자 남았다.


심각한 상황이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또다시 공원 벤치에 주저앉았다. 하염없이 노을을 보면서 내일이 되면 내가 사라지고 또다시 그가 될까, 혹은 나 또는 그가 아닌 제3의 인물이 또다시 어리둥절하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세상이 살기 싫어졌나? 그의 기억을 모두 나한테 맡기고 영영 세상을 등지고 무의식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 건가?


그럼 나는 누구지? 나는 왜 그의 기억을 끌어안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내 과거의 기억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또 다른 벤치에서 몸을 뉘며 잠을 청하는 노숙자가 보인다. 지금 난 이 상황이 내가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점점 깨달아가고 있다.


난 여기서 꼼짝도 할 수 없다.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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