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SF의 엄밀함에 대해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은 어슐러 K. 르 귄의 『헤인 연대기』 작품들 중 『어둠의 왼손』과 함께 양대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하드SF와 스페이스 오페라뿐이었던 남성 중심, 과학 중심 SF 장르에서 사회적 하드SF 또는 사상 실험 SF를 정립하고, 그 장르적 실험을 SF의 새로운 갈래로 분화시켜, SF의 사상적 기반을 넓힌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흔히 하드SF의 ‘반대말’로 잘못 정의되곤 하는 ‘소프트 SF’란 바로,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 그리고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 심도 깊게 추구하는 인류학, 정치학, 사회학,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대해 ‘하드SF식으로’ 탐구하는 장르를 일컫는다. 소프트 SF의 정의를 통해 SF의 외연을 확장해 보자면,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은 더이상 과학Science에 대한 픽션이 아니다. ‘Science’라는 말은 관습적으로 바꾸지 못한 잔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때 S를 Speculative라는 단어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관습의 관성력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사라졌다.)
다른 관점의 의견도 있다. 소프트SF가 여전히 Science Fiction인 이유는 사회과학, 인문과학적 지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학이 아닌 사회과학, 인문학이 아닌 인문과학이어야 하는 학문의 경계가 존재하고, 소프트SF는 바로 이 학문의 경계를 넘는 지점--인문주의가 과학주의로 탈바꿈하는--에서 사회학이나 인문학이 아닌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의 '과학'적인 면모를 탐구하는 장르로 정의내리는 것이다. 즉, 소프트SF의 ‘소프트’란 하드함(어려움, 남성적임)의 반대어로서의 ‘부드러움’이 아닌, 강성과학(Hard science)의 반대어로서 연성과학(Soft Science)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후자의 정의에 의하면 SF는 여전히 '과학Science'이 중요한 키워드이다. 전자와 후자의 충돌에는 SF를 '탈과학'하려 하는 Speculative와, 과학이라는 대전제를 지키며 영역을 확장하는 Science의 모순적 긴장감이 있다. 그 세력 싸움은 70년대에 이루어졌지만, 2020년에도 여전히 SF라는 장르를 주관적으로 정의하려 하는 대한민국 SF 독자층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적용시켜 보는 것도 재미있을 테다.
최근 이런 얘기가 짤로 돌았다.
이 짤에서 주장하는 바 한국 SF 팬덤이란, 『스타워즈』, 『스타트렉』, 『닥터후』팬 뿐이라는 얘기로 해석될 수도 있어서, 저 세 시리즈 어떤 것의 팬도 아닌 하드SF 팬으로서 아니꼽게 느껴져서 살짝 불편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하드SF와 스페이스 오페라 팬덤이 그 좁은 영토를 가지고 치고박고 할 만한 상황도 아닌게, 스페이스 오페라건 하드SF건 남성 중심의 SF는 이미 소설쪽에서는 한줌도 안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독서 시장에서, SF의 절대다수가 소프트SF다. 그리고 그 시작은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수 없다면』이 출간된 2019년부터이며, 그 이후로 한국의 SF란 여성주의와 트랜스휴머니즘과 LGBT에 대한 사회과학적 실험, 즉 소프트SF가 메인이 된 시장이다.
한국 소프트SF의 중흥에 대해 하드SF 팬이 바라보는 몇가지 상반된 관점이 있다. 첫째로 소프트SF의 흥행은 SF의 전체적인 파이를 키울 것이라는 범SF 시장주의자의 관점. 반대의 관점으로, 소프트SF는 SF의 본질에 벗어나 있으므로 SF시장은 가짜 SF만 득시글대는 끔찍한 시장으로 변모할 것이라는 SF 순혈주의자의 관점. 순혈주의 관점은 이미 틀렸는데, 왜냐하면 어슐러 르 귄의 작품들이 당당하게 SF로 인정받은지 50여 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주의자의 낙관적인 희망이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경제학에서 낙수 효과가 없는 것처럼, 소프트SF로 유입된 독자층이 하드SF를 기웃거릴 거라는 희망 섞인 예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느 소설 장르와 마찬가지로, 이미 한국 독서 시장은 여성 독자 중심으로 흘러간 지 오래이다. 그렇기에 남성적인 하드SF나 스페이스 오페라 따위는 이미 잘 팔릴 만한 것들이 아니다. 즉 두 가지 관점 다 틀렸다.
막간 광고 - 시간에 대한 본격 하드SF 『엔트로피아』
아니, 또 하나의 관점이 있다고 본다. 과연 한국의 소프트SF가 제대로 된 소프트SF인지 의심을 가지는 관점. 어쩌면 SF 순혈주의자의 관점과도 비슷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조금은 다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소프트SF란 부드러운 SF가 아니다. 그건 본격적으로 인문과학의 제반 주제들을 탐구하는 ‘사회과학적 하드SF’이다. 그렇기에, 소프트 사이언스의 주제를 명민하게 탐구한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과 『어둠의 왼손』은 SF로 인정할지언정, 그 기준에 못미치는 대중적인 한국 소프트SF들은 SF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는 SF 순혈주의자의 주장과 비슷한 식으로 흘러가는데) 한국의 SF시장은 가짜 SF만 득시글대는 끔찍한 시장으로 변모한 지 오래이다.
이 문제는 2019년 이후 한국에서 잘 팔린 소프트SF 작품들이 과연 어슐러 르 귄 만큼의 '사회과학적 엄밀함'을 보유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환원되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밝히자면, 이 문제는 좀 불공평한 테스트인 것 같다. 하드SF가 쓰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소프트SF도 그 엄밀성('소프트함'이 아닌 '연성과학'적 엄밀성)을 달성하긴 어렵다. 그리고 그 엄밀성을 극한으로 추구해 SF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어슐러 르 귄 같은 대가와 비교해 한국 소프트SF 작가들에게 ‘국내작가는 왜 그만큼 쓰지 못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부적절하다.
마지막으로, SF에 더이상 과학이 있을 필요가 없다(또는 S는 Speculative다, 등등)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소프트SF에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 게 무슨 상관인지를 주장하는 관점과, 그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SF는 적어도 소프트과학일지라도 '과학'이어야 하는 최소 기준은 필요하며, 이제 한국의 SF란 과학이 한톨도 남아있지 않다는 관점이 있다. 나로서는 이러한 대립쌍에서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마음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다. SF라고 해서 읽어 보았더니 그 설정이란 게 신화나 전설, 판타지에 바탕을 두었거나, 현실 과학은 고사하고 과학적 방법론이나 과학의 엄밀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상현상, 초현실, 환상 등으로 끝마치는 작품을 읽었을 때의 허무함을 종종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 관점 또한 동의하지 않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엄밀한 소프트SF와 '엄밀하지 않은' SF를 명확히 구분할 방법은 없다. 그 경계선은 이분되지 않고 연속적이기에, 그러한 작품을 쓴 작가에게 “내 작품은 SF”라고 주장할 명분이 있다. 그것들은 단지 ‘잘못 쓴’ 또는 ‘못쓴’ SF일 뿐이며, 별로인 작품의 작품성을 탓할지언정 이 작품은 SF가 아니라고 매도하는 일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오해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강조하자면, 나는 한국의 소프트 SF 전체가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매도하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하드SF에만 치우친 극도로 편향된 취향을 가진 나에게, 어슐러 르 귄의 명작 『빼앗긴 자들』, 김초엽 작가의 명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그리고 국내의 여러 소프트SF 작품들에 대한 날카로운 취향적 호오는 없다. (나는 한국 소프트SF들이 별로라거나, 어슐러 르 귄만큼 엄밀히 잘 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 주시길. 그저 취향이 아닐 뿐임을 말하는 중이다) 그나마 어슐러 르 귄의 작품 중에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 바로 『빼앗긴 자들』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사회과학적 사고실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무정부주의 체제의 대립 이야기를 좋아했다기보단, 시간의 동시성에 대한 논의, 그리고 그를 통해 개발된 ‘앤서블’이라는 발명품, 그로 인해 확장된 우주적 세계관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뭐 내가 소프트SF라는 장르 자체를 읽을 필요 없는 장르로 취급하는 건 아니다. 꽤 재미있게 읽었던 여러 소프트SF가 있다. 예를 들어 N. 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는 정말로 감명깊게 읽었던 소프트SF였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장르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하드SF, 또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하드SF의 기준이 까다롭다면)하드에 가까운 SF를 쓸 것이지만, 그것의 작품성이 압도적이라면, 누구든 그 작품을 향유하려 할 것이다. 한국 SF가 여성 독자에 편중된 죽은 시장이라는 전제에 사로잡힌다면, 뛰어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류츠신 『삼체』는 불가해한 현상이 될 것이다. 장르는 성공의 요인이 아니다. 성공의 요인은 작품성이다. 압도적인 작품성이라면, 나에게도 『부서진 대지』를 읽게 만들 수 있고 책을 읽지 않는 남성이나 소프트SF만 읽는 여성에게도 『삼체』를 읽히게 할 수 있다.
이번에 읽었던 『빼앗긴 자들』은 예전에 구매해 놓았던 황금가지 2002년 초판으로, 오랜만에 재독해 보았다. 최신판은 표지가 공통 템플릿으로 바뀐 황금가지 개정판이다(번역자는 ‘이수현’으로 같다. 이수현 작가는 SF소설가로서도 활동중이다. 최근 새로 번역한 '번역개정판'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시공사에서 어슐러 르 귄의 걸작선 박스세트를 내놨는데 이 『빼앗긴 자들』이 빠져 있다. 걸작선이라고 이름붙인 박스세트에 하나가 빠져 있다니(그것도 최고 명작인데) 구매하는 사람이건 출판한 사람이건 아쉽겠지만, 미리 출판권을 현명하게 선점해 놓은 황금가지 측의 권리이므로 뭐라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