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크레스의 『허공에서 춤추다』를 읽고
나는 중단편 소설을 읽은 후에 그 소설의 간단한 줄거리와 결말, 그리고 글자수를 적어 놓는 습관이 있다. SF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부터 해 왔던 습관인데, 2018년부터 기록해 왔으니 1000편도 넘는 작품에 대한 꽤 많은 데이터가 쌓여 있다.
문제는 ‘글자수’인데, 출판물에 작품의 글자수를 써놓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글자수는 수동으로 산출하는데, 방식이 다소 투박하긴 하다.
페이지 안의 줄 수 × 한 줄당 글자수 (공백 제외) × 페이지 수
이 공식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어떤 페이지엔 줄이 부족할 수도 있고 (처음 페이지나 끝 페이지, 챕터 전환 등), 어떤 줄에는 글자수가 모자를 수도 있다. (문단의 끝, 따옴표로 묶인 대화 등) 그러므로 이 공식은 전체적으로 소설의 길이를 과대평가한다. 하지만 과대평가된 길이의 오차범위는 한두 페이지에 해당하는 글자수를 넘지 않을 거라고 보며, 그 정도의 데이터 불완전성은 감수할 만하다고 가정한다.
기록된 소설의 글자수를 히스토그램으로 그려 보았는데, 다음과 같았다.
장편소설 데이터는 빠져 있어서 전체 소설 집단을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이 분포는 하한이 0으로 막혀 있는 로그 정규 분포인 것 같다. 내가 이 글에서 자세하고 지루한 수학적 분석을 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다만 눈여겨 볼 점은 0~10만 자 범위의 소설 길이는 카테고리화되지 않은 연속적인 분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분량이 카테고리화되지 않았다는 말은, 소설 창작에 있어서 단편과 중편의 장르의 기준을 제대로 세우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대개 우리나라에서 소설의 분량은 ‘원고지’로 측정되는데, (대체 언제적 원고지인 건지? 이젠 워드프로세서에서도 원고지 기준 분량 측정은 제대로 지원되지도 않는데) 내 경험적 측정에 의하면 원고지 1매 당 글자수는 146.66자(공백 제외)이다. 이 기준으로 공모전 등에서 통용되는 단편과 중편의 기준을 (제미나이를 시켜서) 조사해 보았더니, 대개 다음과 같은 기준이었다.
단편: 11733자(80매) 내외 또는 10266자 ~ 14666자 (70~100매)
중편: 29332자(200매) 내외 또는 29332자 ~ 58664자 (200~400매)
이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범위가 있다. 14666~29332자(원고지 100~200매) 분량의 소설은 ‘경계지대’이다. 만약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와 중편소설이라는 장르가 다른 장르적 방향성을 추구한다면, 아마도 내 히스토그램 데이터에서 14666~29332자 사이의 구간은 분포가 좀 줄어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차트에서 보듯이 그 구간은 꽤 많은 작품이 존재하며 연속적으로 스무스하게 이어지는 구간이고, 앞뒤로도 나눌 만한 구분점 같은 변화량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이렇다. 단편에서 중편으로 이어지는 길은 연속적이라, 추구하는 방향성이나 장르적 특성 또한 나누기엔 연속적이다. 즉, 단편과 중편을 나누는 기준 따위는 작위적이다. 그러면 왜 소설은 단편과 중편을 구분하는가? 내 생각에, 그건 현실적인 문제다. 단지 공모전과 출판사에서 “중편은 출판하기 좀 곤란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낸시 크레스의 『허공에서 춤추다』에 실린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중편 소설이 소개되기 어려운 이유로는 잡지에 연재될 때 나눠서 연재해야 하는 애매한 분량임을 꼽았다. 그리고 소설집이 출간되거나 장편으로 개작되지 ‘않으면 독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도 했다. SF잡지라는 출판물이 거의 씨가 마른 우리나라 출판업계 사정과는 살짝 다른데, 추가로 우리나라에서의 문제를 꼽자면 애초에 작가들이 중편을 잘 쓰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소설 공모전이 중편을 잘 받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내가 소설을 좀 써보니 느낀 점이 있다. 본격적인 SF를 쓰는 데 있어서 고작 단편 14666자 분량은 내용을 담기에 너무 빡빡한 상자같이 느껴진다. 한 10~20분 정도면 읽을 단편 분량에는 세계관이나 설정에 대한 내용을 생략해야지만 겨우 사건과 줄거리를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예외도 있고 아주 많다. 단순하면서도 잘 짜여졌으며, 사건만을 서술해도 그 세계관지 덩달아 설명되는 최고의 SF 단편, 초단편도 있다. 예로, 앤디 위어의 「알」, 테드 창의 「우리가 해야 할 일」, 스타니스와프 렘의 「세계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등은 초단편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사건과 대화를 읽으며 대단한 세계관을 상상하게 만드는 대단한 작품들이다. 나 또한 이런 짧고도 강렬한 SF작품들을 써보고 싶어해 왔지만, 아무래도 나는 무리인 것 같다. 나의 작품 기획은 항상 단편으로 시작하지만, 쓰다 보면 중편 이상을 훌쩍 넘어 버린다.
아, 어쩌면 내가 가진 저 소설의 히스토그램 분포는 ‘편향’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SF밖에 읽지 않는 편식쟁이 독서가이므로, 순문학이나 다른 장르문학까지 ‘제대로 샘플링된’ 데이터의 분포를 살펴본다면, 단편과 중편 사이 14666~29332자 분량의 분포가 확연히 줄어든 분포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편의 인기가 별로 없는 순문학 영역을 보자면, 어쩌면 14666자 이상부터 장편 분량의 구간에 이르는 모든 분포의 빈도가 드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중편의 가치를 논하는 건, SF 장르의 특성을 따져볼 때 다른 소설 장르보다는 중편 분량이 더 SF에 맞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일례로 SF작가 테드 창은 단편소설만을 쓴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중편으로 알려진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외에 꽤 많은 수가 중편이다(「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네 인생의 이야기」, 「일흔 두 글자」). 단편과 중편 사이 경계지대 14666~29332자의 소설도 많다(「이해」,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옴팔로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지옥은 신의 부재」, 「바빌론의 탑」, 「숨」). 한국 기준의 진정한 단편 소설은 여섯 편에 불과하다. (「영으로 나누면」,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거대한 침묵」, 「2059년에도 부유층 자녀들이 여전히 유리한 이유」, 「우리가 해야 할 일」, 「인류 과학의 진화」)
낸시 크레스의 『허공에서 춤추다』는 중편 분량의 소설이 네 편이나 실려 있는 (「스페인의 거지들」, 「경계들」, 「올리트 감옥의 꽃」, 「허공에서 춤추다」) 작품집이다. 물론 단편 분량이나 초단편 분량의 소설도 실려 있긴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쓰다 보면 자연스레 중편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고 세간에서도 ‘중편에 능한 소설가’로 평가받기도 했으니, 이 작품집의 가치는 이 중편 네 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가 중편을 쓰는 이유로 다음 이유를 들었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에 충분할 만큼 길면서 하나의 플롯만 있어도 충분할 만큼 짧다. 또한 장편소설보다 밀도가 높으면서도 작업을 할 만한 중분한 공간은 있다.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중편은 SF의 복잡한 설정을 담을 충분한 공간이 있으면서도, 스피디한 진행과 단순한 플롯이 있다. 나만의 주장이지만, 이러한 중편의 특성이야말로 앞으로 미래의 콘텐츠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이 아닐까 한다. 쇼츠, 릴스 등 짧은 순간의 도파민 콘텐츠에 중독되어 가는 콘텐츠 소비자들은 이미 장편의 지루하고 현학적인 스토리를 즐기기 어려워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단편의 단순하고 얇은 세계관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중편에는 이것들이 있다. 도파민을 우러나게 할 정도로 충분히 깊이 있는 세계관, 그러면서도 스피디하게 뚝딱 읽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스토리.
조만간 중편 SF의 봄이 오지 않을까?
낸시 크레스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유전공학을 소재로 하면서 그 과학의 윤리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그에 덧붙여 가족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의 거지들」은 유전공학으로 잠을 자지 않게 태어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주인공과, 평범하게 태어난 동생 간의 관계를 그린다. 「올리트 감옥의 꽃」은 기억 왜곡 실험의 윤리성과 함께 동생을 스스로 살해한 언니의 기억에 관해 다룬다.「허공에서 춤추다」는 유전공학으로 슈퍼휴먼이 된 발레리나의 윤리적 문제, 그리고 엄마와 딸의 갈등과 용서를 그린다.
「스페인의 거지들」은 가장 많이 알려진 낸시 크레스의 최고작이다. 잠을 자지 않게 유전자 조작을 행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보유한 사회가 이미 태어난 그들을 왜 차별적으로 대하는지, 그리고 그들은 그 차별을 어떻게 이겨 내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말은 차별을 이겨 내기 위한 연대와, 서로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 발짝씩의 발걸음으로 끝난다. 괜찮은 작품이었으나, 몇 가지 점에 대해서는 사소한 불만이 있었다. 첫 번째로, 과연 잠을 자지 않도록 설계된 인간이 모두 뛰어난 인간이 될 것인가? 내 생각엔 아니다. 게으른 사람은 (그 기질을 유전적으로 고쳐놓지 않으면) 밤새 게임이나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수면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밤에 어떤 생각을 할까? 내 기억에, 시험 전날의 밤샘 공부는 새벽의 슬픔, 우울, 멜랑콜리함이 몰려오는 감정의 시간이었다. 소설의 인물들은 거의 밤 동안 내내 공부만 하는 괴물같은 공부 머신으로만 그려진다. 밤의 어두움이나, 홀로 있음, 공포 등의 감정에 대해 좀 더 그려줬으면 훨씬 더 공감이 갔으리라 생각한다.
「올리트 감옥의 꽃」은 과감하게도 인간과 인식이 다른 외계인과, 여러 외계인 간의 소통이 존재하는 우주적 스페이스 오페라이다. 가족 간의 관계 같은 작은 이야기들에 능한 작가 특성상 무리가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꽤 잘 만든 설정을 가진 좋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떻게 현실을 구성하는지,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명확한 현실의 지도를 머리에 담고 다니는지에 관한 이야기”, 즉 철학적 인식론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말은 열린 결말인데, 내 기준으로서는 썩 맘에 들진 않았다. 이 작품을 장편 시리즈로 개작한 『확률 우주』라는 작품이 있다고 하며, 존 W. 캠벨 상을 받는 등 평가는 괜찮아 보이니 기회가 되면 (번역판이 출간된다면) 결말이 더 좋아졌는지 읽어볼 만 하겠다.
내 기준 최고작은 「허공에서 춤추다」이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혔는데, 내 평도 그렇다. 이 소설은 앞서 말한 슈퍼휴먼 발레리나, 유전공학의 윤리성, 엄마와 딸 관계 외에도 특별히 유전공학으로 설계된 ‘말하는 멍멍이’가 나온다. 정말로 귀엽고 흥미롭다. 발레를 소재로 한 SF라는 참신함도 새롭다. 인물들 모두가 모이는 절정 씬은 마치 봉준호 작품 『기생충』의 파티 씬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결말도 뛰어난데, (사소한 스포일러를 하자면) 자식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에 대해 부모가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다는, 아주 사적이면서도 기분 좋은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