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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츠신의 『삼체 1: 삼체문제』를 읽고

안티-칼 세이건, 광기의 우주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콘텐츠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2020년대, 우리는 국뽕의 반대급부인 중국의 문화 파워를 우습게 보고 있다. 그들의 문화는 확실히 저급하다. 『천랑2』나 『장진호』 같은 영화는 국경을 한발자국만 넘어도 공감력 제로에 수렴하는 애국주의로 점철된 영화이고, SF작가 류츠신의 단편 소설을 영화화한 『유랑지구』도 중국뽕이 치사량은 가까스로 넘지 않게 함유되어 있는 중국식 영화이다.

刘慈欣 - 三体

그러나 놀랍게도, 류츠신이라는 작가의 파워는 강력하다. 류츠신은 테드 창처럼 중국어를 거의 모르는 작가도 아니고 켄 리우처럼 중국어를 할 줄 알지만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도 아니다. 그는 베이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다가 소설 쓰기를 시작한, 중국어를 말하는 본토 중국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역량은 우리가 우습게 보는 중국 현대 문화의 그림자로부터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체』 시리즈는 SF 장르 불멸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소설 『삼체』는 현대적인 느낌보다는 고전 SF의 냄새가 물씬 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과거에 중국의 어떤 과학자가 '홍안 프로젝트'를 가동시킨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전파를 탐색해 외계인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신호를 탐색하는 것이다.


외계인 찾기라니, 정말로 고전적이다. 아이작 아시모프나 아서 K. 클라크도 떠오르지만, 진짜로 유사하다고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천문학자 '칼 세이건' 이다. 전업 작가가 아닌 천문학자인 그가 쓴 소설 『콘택트』에서 주인공은 전파망원경을 이용해 외계인을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삼체』의 줄거리는 바로 칼 세이건 살아생전 『코스모스』라는 교양과학서에서 얘기했던 외계인 찾기 방법론들, 즉 '세티 프로젝트', '드레이크 방정식', 그리고 '페르미 역설'이 이야기되던 시대와 공감한다.


그러나 삼체는 중국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에 깔린 비극적인 중국 현대사, '문화대혁명'의 그림자에서 자란 등장인물 '예원제'는 인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다. 이 세계관에서 예원제는 『콘택트』의 조디 포스터가 맡은 낭만적인 '엘리'가 아니며, 외계인도 평화의 사절이 아니다. 이 외계인들은 마치 H. P. 러브크래프트의 코즈믹 호러 세계관과 비슷한 공포의 존재다. 그들은 단지 양성자 두 개만을 보내 지구를 망쳐놓을 정도의 상상초월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다. 그들의 거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이 지구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광속의 1/10으로 달려도 400여 년이 걸린다. 이제 지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까지가 삼체 1의 줄거리)




삼체 문제 (Three Body Problem)

주목할 것은 작품에 깔려 있는 하드SF 설정이다. 제목이 왜 '삼체'인가 하면 쳐들어오는 외계인이 삼체(Three Body) 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태양계는 태양이 하나 뿐인 일체 계이다. 천문학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체 계도 있는데, 이 시스템에서는 두 태양이 짝을 지어 규칙적으로 돈다. 그러나 삼체 계에서부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 태양이 서로의 궤도를 망가뜨리며 완벽하게 불규칙적이고 카오스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규칙적인 궤도도 없고, 고정된 공전반지름도 없으며, 그래서 계절의 변화도 없다. 이 계의 주민들은 '태양은 반드시 동쪽에서 뜬다', '겨울이 오면 반드시 봄이 온다' 같은 믿음을 가지기가 불가능하다. 겨울은 몇십 년 동안이나 계속될 수도 있고, 어제 시작하자마자 바로 내일 끝날 수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내의 추운 겨울 같은 수준이 아니다. 행성은 세 태양의 궤도에서 명왕성 만큼이나 엄청나게 멀리 떨어질 수가 있으며, 그렇게 되면 아예 행성이 명왕성과도 같은 극한의 기후로 변해버린다. 반대의 상황도 일어날 수 있다. 행성은 셋 중 하나의 태양에, 아니면 셋 모두에 가까이 붙어버릴 지경에 이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행성 표면의 모든 것들이 불타버린다.

삼체 계 시뮬레이션, Dnttllthmmnm from Wikipedia  (CC BY-SA 4.0)

소설에서는 VR게임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이 삼체 행성의 상황을 체험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 광경은 정말로 코즈믹 호러스러운 이미지이다. 하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나의 거대한 태양이 뜨질 않나, 세 개의 태양이 선풍기처럼 빙글빙글 돌며 열풍을 뿜어대질 않나, 세 개의 태양이 일직선을 이뤄서 중력 이상을 일으켜 행성을 쪼개질 않나. '삼체 문제'라는 물리학 문제를 접해본 물리학 전공생이라도, 심지어 그가 컴퓨터 시뮬레이터 같은 것으로 삼체계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적이 있다 해도 이런 충격적인 이미지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을 것이다.


이 삼체계의 주민들에게 생존의 문제인 '살기 적당한 기후는 언제 올 것인가'라는 문제는 지구 행성 인류의 당면 문제와는 달리 상상을 초월하게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인류가 자고로 태양과 달의 주기를 파악하고 문명을 일궜던 이유가 바로 태양과 달은 신뢰로울 만큼 주기적이라는 이유 덕택이었다. 날씨를 관장하는 항성의 움직임이 완벽하게 카오스적이라면, 그 문명이 성립할 수나 있는 걸까?


작중에서 삼체 행성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을 정도의 기후는 '항세기', 그렇지 않은 시기는 '난세기'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한다. 응? 난세기? 난세? 과도한 자의적 해석일 수도 있지만, 삼체 행성의 경험은 마치 '치세'와 '난세'가 번갈아가면서 나타난다는 중화의 역사관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작중에서 '난세기'에 탈수되어 있던 삼체인들이 휩쓸려 무참히 죽어 나가는 것처럼, 중국의 수천년 역사도 수십~수백만의 군중이 '난세'라는 이름으로 대량 몰살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그렇다, 어찌 보면 중국의 역사, 아니 인류의 역사 자체가 코즈믹 호러스럽다. 이 작품은 애초에 이런 무시무시한 대량몰살의 역사 자체가 우주의 근본 법칙이자 필연적인 역사의 흐름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컴퓨터 양성자 설정 (스포일러 있음)

삼체인이 지구를 공격한 압도적인 기술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무기가 바로 '양성자 두 개'이다. 삼체인이 거의 빛의 속도로 쏜 양성자 두 개가, 지구 곳곳을 엄청난 속도로 돌아다니며 입자가속기에 사보타주를 하고 다닌다. 이로서 지구의 기초과학은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정체된다. 과학자들은 400여 년 후 도착할 삼체인의 우주 함대를 막아줄 기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데에 좌절한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서 나오는 물리학적 설명들을 이해하기 어려워 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해는 했지만 개연성 측면에서 납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실제로 물리학에서 밝혀지거나 존재하는 설명과, 아직 나오지 않은 이론이거나 심지어 완전히 창조된 가상 이론이 뒤섞여 있다.


우리의 3차원에는 숨겨진 11차원이 있다: 실제. 초끈이론에 나오는 얘긴데 검증되지는 않았다. 즉, 실제 이론이지만 실제 현실은 아닐 수 있다. 원래 초끈이론이 좀 그렇다.

양성자를 펼쳐 1차원, 2차원, 3차원 등으로 만든다: 가상이라고 생각되지만 초끈이론 연구자들 중에 이런 게 진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하지만 1차원으로 된 양성자가 실처럼 떠다닌다거나 하는 상상력은 완벽한 가상임에도 '그럴 듯'하게 들린다.

펼쳐인 양성자에 집적회로를 새긴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가상 설정이지만, 개쩌는 상상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숨겨진 차원을 펼쳤으니까, 그 안에 무슨 짓을 하건 작가의 맘인 것이다.

그 양성자를 이용해 지구를 보내고, 쌍으로 묶인 다른 양성자로 '실시간' 신호를 받는다: 이건 양자역학의 EPR 현상으로, 진짜 논의되고 있는 양자통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말도 안되지만, 이정도면 실제 이론으로 봐도 될 듯.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드SF라 해도 모든 이론이 다 '현실에 존재하는' 이론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현실 이론을 토대로 가상의 이론을 쌓고, 그 이론의 연쇄가 그럴 듯하면서도 상상력이 개쩌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것이 바로 하드SF의 재미요소가 될 수 있다. 류츠신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훌륭한 과학소설이란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보도처럼 진실되게 쓰는 것". 상상력만 과하면 정신나간 이야기지만, 과한 상상력이 과학적 개연성을 끌고 나갈 때는 좋은 하드SF가 될 수 있다. 류츠신의 사고방식이 고전적인 우주 SF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데도 이제 와서야 걸작을 쓰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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