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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전부 설명할 수 없는 백신에 대한 공포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를 읽고

나는 백신 반대주의 운동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애기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백신이 실제로 사람에게 해로운데 백신의 부작용을 겪지 않아서? 정부와 세계의 음모를 눈치채지 못해서? 애초에 안티백서의 사고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기는 한 것일까? 팬데믹의 시대, 위대한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과학을 거부하는 자들 때문임이 드러났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와 백신 이슈와는 상관 없는 주제로 얘기해 본 적이 있었다. 인간의 정신질환(의 진화)에 관련된 주제였는데, 내가 과학과 의학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이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순간 깨달았다.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와는 다른 것이다. 물론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매우 극히 일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자들 또한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과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런데, 과학에 반대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과학-러들에게 준엄한 충고를 내린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과학이 설명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누가 설명할 수 있는가? 종교든 인문학이든 음모론이든, 그런 것들이 과학의 나머지 부분을 전부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최근에 어떤 정체불명의 의사가 자신이 직접 백신을 현미경으로 관찰해 정체불명의 미생물 발견했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이런 얘기를 믿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었다. 백신에 정체불명의 미생물이라고? 백신은 공산품이다. 철저한 품질관리 계획 아래에 이루어지는 제품이다. 현대 과학기술은 백신 품질관리를 못해서 '정체불명의' 미생물이 번식한 제품을 시중에 내놓을 리가 없다. 애초에 코로나 mRNA 백신은 영하 74도에서 유통되는데, 어떻게 미생물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래, 뭐 실수는 있을 수 있겠지. 백신에 제조장비 부품 입자가 혼입된 사건도 있었으니. 만약 백신 회사가 진짜로 실수로 미생물이 번식한 것을 출시했다면, 산부인과 의사의 허접한 현미경 관찰이 아니라 식약청이나 WHO, CDC 등에서부터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거대한 산업의 규제를 회피하고 몰래 백신에 미생물을 넣어놨다는 건가? 그럼 그건 또 누구일까? 백신 회사 임원? 미국정부? 정말로 알 수 없는 주장이다. 백신의 품질관리에 의심이 간다면, 소비자 입장으로 그 과정 자체를 꼼꼼히 검수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백신 제조 회사에 이슈를 제기할 일이지, 무작정 백신을 반대하는 건 절차상으로도 이상다. 자동차의 품질 이슈로 사고율이 높아질 때 원인을 분석해 더 리콜하고 안전성이 보증된 자동차를 받지 않고, 자동차 산업 자체를 반대하는 꼴이다.


백신을 맞으면 몸에서 블루투스가 뜬다는 주장은? 블루투스가 뜰려면 디지털 정보를 어디엔가 코딩해 넣어야 하는데, 도대체 액체로 이루어진 백신 물약의 어디에 그런 디지털 정보를 새겨 넣는다는 건지? 주사바늘을 통과하는 매우 작은 나노 반도체가 물약에 들어있다는 건가? 거기엔 전파를 발생시키는 통신 모듈이 있고 그 모듈을 작동시키는 배터리까지 결합되어 있는 걸까? 빌 게이츠가 우리의 몸을 조종한다고? 빌 게이츠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작동시키는 건 무리일 테고, 그럼 외주를 주거나 해서 근무 인원을 늘려야 하는데, 그럼 백신 접종자를 조종하는 빌 게이츠의 유령 회사가 막대한 통신망을 쓰면서 우리를 조종하는 명령을 발송시키는 걸까?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주장들을 믿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정말로 내가 이해불가한 일이었다. 백신의 제조공정은 미지에 싸여 있는 게 아니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부분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인간이 발견하고 발명한 과학기술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백신에 '정체불명의' 미생물이 들어있다는 허위정보를 믿고 과학기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만약 내가 백신에 미생물이 들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성취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비춰볼 때, 그건 말이 안 된다"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아니, 백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니까.


그들에게 과학이란 어쩌면 '비자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자연적인 것은 좋은 것이다. 비자연적인 것은 나쁜 것이다. 화학물질, 방사능, 기계와 전자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혹시 바이러스가 백신보다 더 자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바이러스를 받아들이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일까? 뭐, 과학이 비자연이라는 주장에는 나도 동의한다. 우리는 과학을 발전시킨 이래로 자연과는 너무나 먼 길을 걸어 왔다. 아니 사실, 농사를 발명한 신석기 혁명 이후로 인간은 자연과의 사투를 벌였다고 하는 게 맞겠지. 여기에 대해 내가 그들에겐 씨알도 안 먹힐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우리가 백신을 맞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비자연적으로 최대한 많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맞는 것이다. 아니, 자연스럽게 살려면 쌀과 농산품도 먹지 말고 수렵채집 하면서 살아야 한다니까.


그들은 무엇을 주장하는 것일까? 대형 제약 회사들이 의학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정부가 미생물 백신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다고 믿는 것일까? 이 책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해 보자.


그런 걱정이 암시하는 세계관은 심란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니까.


그렇다. 제약 회사와 정부를 믿지 못하면, 과학 기술을 믿지 못하면, 그들은 이 세계에서,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아파트가 무너질 지도 모르는데, 자동차가 갑자기 폭발할 지도 모르는데, 인터넷의 모든 정보가 사실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 정부에서 조직적으로 만든 일지도 모르는데.


Eula Biss - On Immunity: An Inoculation

이 책 『면역에 관하여』는 제목과는 달리 면역에 대한 생물학적 원리 따위를 다루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아이 엄마이자 의사의 딸로서 면역과 백신, 전염병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과 가치를 다루는 에세이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면역에 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책을 읽고 싶었으나, 제목에 속아 에세이를 읽게 된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책 자체는 재미있게 읽었다. 가볍게 생각할 거리도 있었고 과학 주제의 글쓰기에 대한 특별한 방식과 좋은 태도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에서 느낀 것은, 그들에게 아무리 '과학의 위대함', '과학의 신뢰성'을 강조해 봤자, 그들은 아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세계엔 다음과 같은 간판이 달려 있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내가 백신의 위험성보다 자동차의 위험성이 더 크다고 말해도, 그들은 '내가 백신으로 죽을 확률은 50%다. 왜냐하면 나에게 확률이란 '죽거나 혹은 살거나'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언어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다. 과학은 마치 종교 같은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불교를 믿지 않듯이, 그들은 과학이 아닌 무언가를 믿기 때문에 과학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믿는 그 무언가에는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신념이 섞여 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백신에 대해 아무리 안전할 확률이나 과학적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이 책에서, 과학을 타인에게 소개하는 좋은 전략을 이야기해 준다. 이 이야기는 헌혈에 대한 좋은 은유로 다음을 이야기해 준다.


혈액형이 RH- O형인 사람은 다른 모든 혈액형에게 제 피를 줄 수 있다고, 아버지는 설명했다. 혈액형이 RH- O형인 사람을 <보편 공여자>라고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 아버지의 보편 공여자 이야기에서 자신의 피를 우리에게 생명수로 나눠준 예수를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때부터 이미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몸을 빚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 백신의 안전성과 과학의 신뢰성을 강조하지 말고, 백신 접종이야말로 사회 구성원을 서로서로 지켜 주는 이타적인 행동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나도 백신을 맞기는 싫다. 주사도 아프고, 병원까지 가야 하고, 병원에 기다리는 시간도 꽤 되고, 2차까지 챙겨 맞기도 귀찮다. 그러나 나는 이타적이다. 나는 남에게 병을 옮기는 걸 두려워하고, 참된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백신의 두려움을 온몸으로 이겨내고 접종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몸을 빚지고 있다. 즉 서로 도움을 주는 이타성의 발로이다. 어찌 보면 종교적이다. 종교가 출현한 후에야 인간 사회가 이타성이라는 것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니. 면역 시스템이니, 확률이니 하는 어려운 얘기 다 빼고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그들에게 설득력을 가져올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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