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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가 우주를 구한다는 일본스럽고 어설픈 세계  

한나 렌의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을 읽고

일본에야 ⟪일본침몰 같은 클래식 SF의 전통도 있지만, 아무래도 일본만의 SF 정통 계보라고 한다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공각기동대⟫ 같은 만화/애니메이션 쪽 서브컬처의 전통일 것이다. 일본 서브컬처 문화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던 나로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류의 필수 덕후 작품들만을 겨우 감상한 정도로 그 깊이가 얕다.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한나 렌의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서 나는 재미있게도 일본 서브컬처 문화와 비슷한 패턴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씹덕류의 문외한인 내가 이런 얘기를 했을 때의 위험성이 있다. 이쪽 분야에서 갈고 닦은 '전문성'이란 건 무시하기 쉽지 않다. 씹덕 위키라고도 불리는 나무위키를 보라. 그들의 연구 성과는 무시무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외부에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제적으로 지적하며 썰을 푼다. 다음 목록은 이상하게도 한나 렌의 작품들에서 눈에 띈 '일본 서브컬처스럽게 느껴지는' 패턴이다.


1. 사춘기 감성이 세계관과 연결되어 결말을 이룬다.

당연하게도 이 감성은 일본 에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느껴 보았던 감성이다.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 이카리의 사춘기적 외로움과 인간관계의 고민은 세계관, 그리고 작품의 결말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많은 서브컬처 전문가들이 해석한다). 단편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그리고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에서도 이 사춘기의 인간관계가 작품의 핵심 주제일 뿐더러, 세계관 그리고 결말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2. 결말 부분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수싸움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나는 너의 비밀을 밝혀 냈다! 나는 이러저러한 행위를 통해 너를 이겼지!"
"하하, 하지만 사실 네가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기 전에 난 미리 이러저러한 걸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겼다."
"ㅎㅎㅎ. 난 네놈의 그런 것까지 예상했었지! 너의 패배다!"

일본의 유명한 만화 ⟪데스노트⟫에는 이런 수싸움 장면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나오는데, 연쇄의 고리가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유치짬뽕이 배가 된다.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과 ⟨싱귤러리티 소비에트⟩의 결말이 특별히 이런 패턴이 심하게 보였고, 다른 작품들에서도 결말 부분에 정도는 약하지만 비슷한 분위기가 들어 있다.


3.  하나의 기책으로 모든 꼬인 문제를 해결한다.

사실 이 패턴은 일본 서브컬처 패턴이 아니다. '기책 마니아'는 우리나라의 시사만화가 '굽시니스트'가 제시한, 일본 외교적 방향성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특이한 패턴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은 복잡하고 꼬인 외교적 상황을 단 하나의 신묘한 기책으로 해결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직전 일본과 미국의 꼬인 외교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진주만 폭격이라는 단 하나의 기책으로 해결하려 했다. 또 최근에는 한일관계의 복잡하고 꼬인 상황을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해제'하는 기책으로 해결하려고도 했다. 물론 현실 세계의 일이니까 서브컬처의 패턴을 논하는 현 자리와는 별 상관 없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책 마니아' 성향이 일본인의 심연에 흐르는 문화적 패턴이라면, 만약 그러하다면 일본 서브컬처 문화에도 보인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극중에서 단 하나의 신묘한 방책으로, 작품 내적으로는 등장인물이 세계관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작품 외적으로도 기가 막힌 결말과 주제의식을 도출해 내는 작품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서 주인공이 '스스로 약품에 뛰어든다'는 단 하나의 방책으로 친구와 작품 내적으로는 친구와 우정을 얻고, 작품 외적으로는 비정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저떻게 저속화에 대한 해결책을 추론한 후에, 사실에 대한 검증도 없이 단 한 번의 테스트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낸다. 즉, 친구도 구하고, 세계관도 설명하고, 작품의 결말도 이끌고, 주제의식도 도출해 낸다.




그래서, 그 '일본식 패턴'이란게 문제인가? 어떤 문화권이든 그 역사와 전통이 문학에 패턴을 만들지 않는가? 미국도 그런 게 있고, 당연히 한국도 있다. 일본 소설이 일본 문화의 패턴을 따르는 게 잘못된 게 아니지 않는가?


물론이다. 일반적으로 번째와 번째 패턴은 나로서도 문제는 아니다. (아니, 사실 번째는 너무 유치해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네.) 번째 패턴은 문제인데, 이제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세 번째 패턴의 존재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기 힘든, 나만의 생각임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방책으로 모든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려는 욕망은 사실상 '문학'이라는 예술장르 자체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책', 즉 기발면서도 또 복잡하지 않고 심플한 구조의 결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런 결말이 들어 있는 작품을 명작으로 칭송한다. 역사 속의 일본인들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단 하나의 기발한 방책으로 꼬이고 꼬여 버린 국제관계를 풀게 되는 '소설 같은 역사적 위업'을 달성하길 원해 왔다. 현실은 소설이 아니라 때로는 진주만 폭격이나 한일무역분쟁처럼 더 복잡하고 꼬이는 역사적 수레바퀴의 굴레로 들어서기도 하지만.


우리는 가끔씩, 잘 풀릴 것 같지 않은 꼬여버린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이 기발하지도 않은 해결책을 발한 척 들고 나와서, 억지 플롯에 따라 어거지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척하는 소설 감상하게 될 때가 있다. 그걸 우리는 '억지 설정'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나는 왜 한나 렌의 소설들에서 '기책 마니아' 패턴을 느끼게 되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건 바로, 한나 렌 작품들이 진짜로 일본식 '기책 마니아'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작품들의 세계관과 결말이 '억지 설정'이기 때문이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의 문제

먹어도, 발라도, 희석해도 효과를 발휘하는 약품(신경생리학적인 것)으로 평행세계를 지각하고 또 개입하는 능력(물리학적인 능력)을 잃는다고? 왜 하필 약품일까? 그건...작가 마음 아니야? 약품이든, 전자기파든, 입자가속기든, 뇌수술이든. 하지만 나에게는 이상하게도 세련되게 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봤을 때...작가는 그냥 초능력만 잃게 해 주고 청소년이 다룰 수 있는 간편하고, 부작용 없고, 효과 빠르고, 어려운 과정 없는 손쉬운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복잡한 연구소에 들어가자 박사가 엄중한 경고를 하며 "이 강력한 블랙홀 입자가속기를 돌리면 전체 승각 세계가 위험 처할 수 있어!"라고 경고하거나, 죽을 위험을 감수하는 뇌수술을 통해 평행우주의 지각을 담당하는 뇌 부위를 적출하거나 하는 어렵고 귀찮은 과정을 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손쉽게 수영장에 뿌려서 손쉽게 몸을 담을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이 필요했던 것이다.

なめらかな世界と、その敵   -   伴名練

또한 사실상 결말의  "스스로 승각 능력을 버려 친구와의 우정을 쟁취한다"는 감동 포인트는, 우리가 승각 능력을 가지지 않기에 감동적인 것일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승각 능력을 잃는 게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자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실제 독자와 작중 등장인물들이 처한 서로 다른 처지 때문에, 독자에게 느끼라고 의도한 감동 포인트는 사실 등장인물들에게는 느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니, 우정을 위해서 승각 능력을 자진해서 버린다고?" 이걸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현실 세계의 형태로 바꾸면 이렇다. "아니, 외팔이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스스로 팔을 잘랐다고? 미친년아 니가 샹크스냐?"


다음 문제도 비슷하게 독자와 등장인물의 입장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착시로 인한 긴장감이다. 평행우주를 넘나든다는 승각 능력은 사실상 플롯의 모든 긴장감을 제거할 수 있다. 플롯에서 주인공이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그와 비슷하지만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평행우주로 이동하면 해결된다. 예를 들어 범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우주로 이동해 범인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당연히 그렇게 행동해야 함에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일부러 억지로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로' 몰래 정하고 독자들을 속였기 때문이다.


제목의 의도도 잘 와닿지 않는다. 제목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철학자 칼 포퍼의 유명한 책 ⟪열린 세계와 그 적들⟫에서 따온 것인데, 이 책은 열린 세계를 지향하며 그 세계가 이루는 목표를 방해하는 적들에 대해 맞서는 내용이다. 그런데 오히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서는 주인공이 세계의 적들의 편이 된다. 이런 식이면 제목을 칼 포퍼의 책에서 딸 이유가 없다. 게다가 평행우주는 매끄럽지도 않고, 이산적(discrete)이다.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의 문제

신칸센 저속화 현상의 원인이었던 "대용량의 통신데이터"라는 설정은 정말로 이상하다. 겨우 반 인원 전체의 단체 톡방 데이터가 알려진 물리학 법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무시무시한 저속화 현상을 일으킨다고? 혹시 단톡방 데이터가 아니라 단 한 명이  넷플릭스 4k 스트리밍 동영상 때문 아닌가? 게다가 도대체 그 '대용량 데이터 통신'과 '저속화 현상'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저속화 현상은 뉴턴역학도, 상대성이론도, 양자역학도, 아마도 초끈이론도 설명하기 힘든 미증유의 불가사의한 현상일테다. 인과 관계를 작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자 작가는 기어이 사기 카드를 꺼내든다. 바로 "이 모든 것은 외계인의 획책이다!" 카드. (외계인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작가는 그냥 "반 아이들이 주인공을 위해 열심히 단톡방에서 수다를 떨었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저속화 현상이 발생했다"는 두 사건을 잇고 싶었던 모양이다. 단 하나의 신묘한 기책으로 감동과 결말 두 가지를 동시에 얻고 싶었겠지만, 나는 개연성과 세계관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낀다.




그래서 김필산 너는 이 작품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나는 이 작가와 작품들의 '작품성' 평가를 영원히 유보한다. (물론 말 잘못했다가 돌 맞을까봐 조심하는 중이기도 하지만) 작품성을 측정하는 축에 직교하는 SF성이라는 축이 있다고 하자. 어떤 작품은 이 축에 대한 평가 항목이 하나도 없다. 역사소설, 공포소설, 추리소설 등 SF가 아닌 소설이다. 어떤 작품은 SF성을 평가할 수 있는 평가 항목을 지니고 있는데, 그럼 그 작품은 SF이다. 이 소설도 SF성의 축 위에 점을 찍을 수 있다. '작품성이 나쁘다'라고 할 때 작품성 축의 마이너스 부분에 점을 찍듯이, 이 작품은 SF성 축의 마이너스 부분에 점을 찍는다. 즉, 이 작품은 SF긴 하지만, 매우 안 좋은 SF다.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만약에 나를 욕할 준비가 된 사람들은,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한 후에 욕하시길. SF성이 나쁘지만 작품성이 좋을 수 있다. 두 축은 직교하기 때문에. 다들 이 작품집에서 창의적인 세계관 설정, 사춘기 우정의 소중함, 희생당한 아이들의 비극,(그리고 백합 설정?!) 같은 것을 느끼고 좋은 작품성을 매긴 모양이지만, 나는 작품성 측면과는 아무 상관관계 없는 SF성에 있어서만큼은 나쁘다고 말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 책이 흥행하는 것을 보아, 흥행성과 SF성도 아무 상관관계 없는 것 같다. 잘나가는 작품을 보니 배가 아프냐?라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말한다.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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