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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뱀파이어와 함께 고찰하는 의식의 신비

피터 와츠의 ⟪블라인드 사이트⟫를 읽고

피터 와츠는 해양생물학자 출신으로, 그의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는 학자 출신인 SF작가가 쓴 소설들이 으레 그렇듯이 엄청 어려운 개념, 불충분한 설명들, 그리고 책 뒤의 참고문헌 리스트존재하는 작품이다. 해양생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해양생물학에 대한 내용이 별로 없는 것은, 그의 전작 ⟪Rifters⟫에서 그 전문지식을 만족스러운 양으로 맘껏 뽐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대신 이번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지각, 인식, 그리고 '의식적인 존재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도의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다. 고작 이 순수하게 학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기 위해 창의적이게도 온갖 기괴한 인물들과 세계관을 창조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이 ⟪블라인드 사이트⟫다.


하드SF에서 재탄생한 우주 뱀파이어

그중에 압권은 우주 뱀파이어에 대한 작품 속 설정이다. 뱀파이어는 설화 전설 속의 존재가 아니다. 뱀파이어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분화된 '호모 사피엔스 뱀피리스(Homo Sapiens Vampiris)'라는 인류의 아종이다. 예전에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가 호모 사피엔스와 종분화한 다른  인종이었듯이 말이다. 이 뱀파이어 설정은 아마 작가의 전작 ⟪Rifters⟫에 나오는 모양인데, 작가 스스로 맘에 드는 설정인 모양인지 ⟪블라인드 사이트⟫에까지 등장한다. 주인공과 함께 우주 여행을 하는 줄거리로.


기존 환상 소설의 뱀파이어에 대한 설정을 현대적인 유전학, 신경과학적 SF 설정과 성공적으로 버무린 모습은 작가가 왜 그렇게 이 '현대에 떨어진 우주 뱀파이어'를 사랑하는지 이해할 만 하다. 유전자의 돌연변이 뱀파이어를 어떻게 탄생시켰는지 보자. 돌연변이의 명칭은 X염색체의 Xq21.3 paracentric inversion mutation이다. 이 유전자를 통해 이들은 단백질을 스스로 합성할 수 없게 되었고, 가까이 있던 동적 (호모 사피엔스)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로서 송곳니, 하악골 등의 변화도 생겼다.


뱀파이어 "Zukka Sarasti" - 그린이 Dmitry Skolzki

습성의 진화 신경학적 진화 또한 추동했다. 우선, 동족 사냥은 밤에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야행성 습성이 발달하면서 적외선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원추체의 진화가 이루어졌다. 이제 4색을 볼 수 있게 된 뱀파이어의 뇌는, 그보다 더 복잡하고 부수적인 신경학적 변화를 동반하게 되었다. (사실 여기서는 나도 이해를 잘 못함. 회백질과 백색질의 연결 복잡성 얘기인데 좀 건너뛰겠다.) 그렇게저렇게 하여 그들은 '십자가 결함(crucifix glitch)'라는 증상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직각으로 교차된 두 개의 직선을 보면 신경학적 발작을 일으키는 증상이다.


또한, 뱀파이어들은 여러모로 얻게 된 신경학적 변화를 통해 '전방향 천재성(omnisavantism)'이라는 특성을 얻게 되었다. 뱀파이어는 이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 우리와 다른 시지각과 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흔히 bistable perception이라고 부르는 시각적 착시가 있다. '오리토끼', '네커 큐브', 그리고 '검파-흰골 드레스' 같은 그림들이다. 우리 모두는 '동시에' 검정파랑 배색이면서 흰색골드 배색인 드레스를 지각할 수 없다. 우리 거의 모두는 영원히 둘 중에 하나만 지각한다. 간혹 가다 그 둘간의 지각 전환이 가능한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도 '동시에' 두 지각을 경험할 수는 없다. 네커 큐브도 마찬가지로, 색칠된 면이 앞을 향하는 입체와, 뒤를 향하는 입체를 동시에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동시에' 지각한다는 게 이 소설의 설정이다. 일종의 병렬 지각 것이다. 뱀파이어의 초월적인 지능에 대한 진부하지 않은 설명이이다. 그리하여 호모 사피엔스의 필요성에 의해 되살려진 멸종된 뱀파이어  '주카 사라스티' 외계 물체를 탐사하는 우주선의 일원이자 사실상의 선장으로 선발된다. 그 초월적 지능을 써먹기 위해.


검파-흰골 드레스, 네커 큐브, 오리토끼




맹시(blindsight)와 의식

전작으로부터 이어진 우주 뱀파이어에 대한 작가만의 애착을 뒤로 하고, 소설이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얘기해 보자. 제목, '블라인드 사이트'는 무슨 뜻일까? 사실 이 단어는 영어로 'blindsight'라는 한 단어이며 마땅히 '블라인드사이트'로 한 단어처럼 표기해야 한다. 이 단어의 번역어는 '맹시'이다. 영어 단어도, 한국어 단어도 모순적인 두 의미의 합성으로 이러우져 있다. '맹(blind)+시(sight)', 즉 '눈 먼 시지각'이다.


시각장애인을 '맹인'이라고 한다.(음, '맹인'은 차별적 단어인가? 만약 그렇더라도 단어 사용을 허락해 주시길. '맹'에 대한 한자의 의미를 말씀드려야 하거든) 맹인들은 아마도 눈에 이상이 있어서 시각 기능을 잃었을 것이다. 컴퓨터로 빗대 보면 '웹캠'이 고장난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에서 웹캠 멀쩡한 상황인데도, 그래픽 카드(딥러닝 시각 패턴인식 알고리즘을 작동케 하는)가 고장나는 경우 있다. 웹캠으로 RGB 데이터를 받아들이지만, 컴퓨터는 그래픽카드의 고장으로 인해 그 데이터 분석하지 못하고 의미 있는 정보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 그 그래픽카드가 분석했어야 할 행인, 자동차, 길, 횡단보도 등의 정보 컴퓨터 사용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 그런데 사용자는  고장난 컴퓨터의 고장난 부분이 웹캠인지, 아니면 그래픽카드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바로 뇌의 후두엽 아래쪽, primary visual cortex(V1)에 뇌병변을 가지게 된 맹시 환자에게도 일어난다. 이들은 눈을 다친 맹인과도 같은 증세를 보인다.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상태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없는 것은 사실 '시각'이 아니라 '유의미하게 생성된 정보'이다.  차이점은 중요하다. 맹시 환자는 자신이 맹인과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볼 수 없음을'보고'하지만, "못한다"고 굳이 밝힌 환자에게 무리해서라도 부탁을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들은 시키면 컵도 집을 수 있고, 무엇인가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는 (비장애인인) 우리가 보기 굉장히 기묘하게 느껴진다. 무엇인가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이 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라니?


맹시 환자의 이 놀랍고도 기묘한 초능력은 바로 상구 (superior colliculus)라는, 눈에서 뇌 안쪽 깊숙한 쪽으로 이어지는 비상 경로가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기 문이다. 이 비상 경로는 매우 유구한 진화의 역사를 거쳐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전선(wire)이다. 이것은 우리가 뱀 등의 위험물을 볼 때 '의식하기도 전에 재빨리 피하고 보는' 알고리즘을 작동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뱀을 순식간에 피하는 기능이 생존에, 진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보라. 진화가 이 유전자를 주석처리하지 않고 남겨 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만약 상구 비상 경로를 만드는 유전자 (쓸모없는 일이라고 판단하여) 주석처리 채 태어난 인간이 면, 그는 뱀을 만나서 어떻게 살아남수 있겠는가? 그는 뱀을 본다. 뱀의 시각 데이터는 V1을 통하고, 인간은 의식을 통해 판단 내린 후에(음, 뱀이군. 위험한 동물이지.), 그제서야 몸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뱀은 뒤꿈치를 물었고, 그 인간은 비상 경로를 만드는 중요한 코드를 주석처리한 댓가로 진화의 막다른 골목에 내밀려 멸종다.


맹시 환자는 뇌 뒤쪽 후두엽으로 전달되는, V1을 통하는 메인 시각 전달 경로 파괴되었다. 그 경로는 의식, 특히 '시지각 의식'을 생성해 내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V1을 통해 보며, V1의 후속 시각 처리 프로세스(V2, V3, V5, MT...)를 통해 본 것을 의식한다. 그러나 V1을 통하지 않는, "본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비상 경로 하나가 준비되어 있다. 뱀을 재빨리 피하기 위해 준비된 경로는 의외로 잘 작동해서, 컵도 집을 수 있고 손가락도 가리킬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필히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의식 없이도 생존에 별 지장이 없는데, 이 복잡한 의식이라는 기능은 없어도 되는 거 아냐?"


그렇다면 우리에게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이 없어도 이정도로 잘 활동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활동, 행동, 선택, 일상, 상업활동, 문화예술, 정치적 행위 등등 또한 의식이 부재한 알고리즘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것 아닐까?작가'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건 바로 이 거대한 주제. 그는 맹시 뿐만 아니라 inattentional blindness('부주의 맹시'라고 종종 번역되지만 blindsight가 '맹시'라로 번역되기 때문에 다른 단어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agnosia(인지불능증), neglect(편측무시), spilt-brain(분할뇌), 외계인 손 증후군 등의 특이한 인지 이상증을 끊임없이 언급하며, 우리에게 소설을 잠시 덮고 위키피디아를 검색하는 시간을 강제로 할애하게 한다.


또한 작가는 철학자 존 설의 유명한 심리철학 가설인 '중국어 방' '완전히 직접적으로' 수없이 되새긴다. 중국어 메시지가 수신되는 방 안에서, 중국어를 모르는 어떤 사람이 그 메시지에 답해야 한다. 그는 다행히 "중국어 대화 규칙 대백과사전"을 가지고 있다. 그 책을 참조하면, 중국어의 의미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중국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만약 말하는 컴퓨터나 외계인, 외계 물체가 이런 '중국어 방' 상태라면, 우리는 이 대화 상대가 아무리 재치 있고, 똑똑하고, 지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의식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작중 주인공의 직업인 '종합가'를 보라. 그는 (의식이 만들어 내는)의미를 일부러 배제하고 기호체계를 다루는 직업이라고 한다. 이건 완전히 '중국어 방' 똑같다.




작품의 메시지

작가가 '뱀파이어는 십자가를 무서워해'라는 설정을 끼워맞추기 위해 몇 단계의 하드SF 개념들을 짜 넣었는지를 보라. '외계의 의식적 존재'라는 주제의식을 도출하기 위해 가져온 온갖 신경학, 심리학적 설정들을 읽어 보라. 도대체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Blindsight - Peter Watts

결말에 대해 얘기해 보자. 어쨌든 주제의식은 직접적으로 '맹시'로 대표되는 의식과 의미의 심리철학적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혹시 소설을 다 읽고도, 혼란스러운 개념과 불친절한 문장 융단폭격에 정신이 혼미한 독자가 많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래서 간소하게나마 내가 캐치할 수 있었던 결말의 반전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틀린 거 있으면 말씀 좀 부탁. 나도 틀릴 수 있으니까)


훼방꾼은 사실 시리가 무의식 속에서 상상해낸 것이다. 로르샤흐가 그걸 받아서 형태를 만들었다. → 우리의 의식은 무의미한 상황에서 억지로 인과 관계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다. ('분할뇌' 환자들의 사례) 시리가 뇌 한쪽을 기계로 교체한 '분할뇌' 인간임을 생각한다면, 이는 작가가 의도한 연결점인 것 같다.

로르샤흐가 지구를 침략한 이유는, 단지 지구인들이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메시지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 의미 없이 신호를 조작하는 중국어 방과 연결됨

주카는 애초부터 의식이 없었고, 그 몸체를 조종한 실체는 우주선이자 선장인 테세우스였다. → 아니, 애초에 테세우스 또한 의식 없는 중국어방이었는 지도 모른다. 어쨌든 의식 없이도 모든 알고리즘은 돌아갈 수 있다.

로르샤흐 또한 중국어 방처럼 의미와 의식 없이 작동하는 지능적 존재다.


나에게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히 문장이 너무 불친절했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른 느낌도 가진다. 인지심리학 전공 과목의 수업을 듣거나, 그 분야의 논문을 읽고 써본 경험이 있거나, 해외 학술 컨퍼런스에 참가해 본 경험이 있다면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뭐랄까, 이제야 인지심리학 수업을 들은 학부생 2학년이 전문용어를 남발하며 인터넷 게시판에 떠벌리는 모습을 보는 느낌?


그러니까 이 소설은 독자에게 이해를 시키려는 노력을 잘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야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불친절한 작품이 명작이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런데 내가 느낀 건, 작가가 노력하는 방향 작가 스스로 똑똑해 보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의 지점으로 향해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작가가 문장을 쓴 이유, 개념을 나열한 이유, 작품을 쓴 이유가 "나는 이런 개념을 알고 있고 난 이 정도로 똑똑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는 작품에 이렇게까지 많은 과학 개념을 쑤셔넣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운 개념이 나오더라도 문외한인 독자가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온갖 소설적 장치를 동원하고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설명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엔 그 소설적 장치나 등장인물의 해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개념이나 설명이 너무 직접적으로 제시되어서, 나로서는, 학부생이 쓴 전공 레포트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 평가는 이렇다. 이렇게까지 스노비쉬한 냄새를 풍기는 작품에서 겨우 얻은 주제의식이란, 내가 예전에 열심히 공부해 보았던 분야에서 끊임없이 천착했던 오래된 철학적 질문들이다. 그건 그거 자체로 재미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도 어느 정도는 재미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주제에 대해 읽고 싶다면 그냥 과학책을 읽으면 된다. 소설적인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똑같은 주제와 똑같은 개념들을 가지고 더 재미있고 더 쉽게 작품을 쓸 수 있는 길 반드시 존재했다. 그러나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 길을 회피한 모양이다. 자신이 똑똑함을 자랑스럽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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