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eji' 온라인 글쓰기 연습 모임 참가자의 글
자동차 공유, 타다의 서비스를 이용해 본 주변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 가격이 약간 비싸기는 하지만, 택시보다 편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존의 택시 서비스에 대한 불만들을 털어놓는다. 나 역시 택시를 타면서 불편했던 일들이 있었지만,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택시는 늙은 남성의 영업 공간이어서 불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핸들을 잡고 있는 그 사람이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말을 걸면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게 된다. 귀찮지만 혼자서 외롭게 보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의 말동무를 하는 것도 역할이라 생각했다.
오래전엔 그들이 민심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치 여론조사를 하듯 궁금한 척 여러 가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대부분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보수적인 입장으로 거친 말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sns와 유튜브가 발전된 이후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한때는 택시 운전사가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개인택시 하나 뽑으면 넉넉하진 않지만, 자식들 대학 교육 보낼 정도는 되었다. 친구들 중 아버지가 택시 기사여서 부러워하기도 했다.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유독 자식 자랑을 하는 건 아마 평생 운전대를 붙잡고 그래도 가족을 건사하였다는 자부심일지도 모른다. 몇 살이냐 물으며, 자식 또래와 비슷하면 알고 싶지 않은 가족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대답이 시원치 않아도 아저씨는 떠드신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감사합니다고 형식적으로 인사하면서 문을 닫는다. 최근에 탔던 어떤 택시 운전사의 모습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늙은 남성이었을 뿐.
택시업계가 파업하거나 집회를 하는 모습에 불편하기도 했다. 워낙 대중교통이 발달된 도시라 큰 불편함은 없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태극기 집회와 이미지가 겹쳐지기도 한다. 그런데 몇몇 분이 분신을 하셨다. 죽음 앞에서 다시 문제를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타다의 이재웅 대표의 발언은 그 자체로 정치를 생성시켰다. 이재웅 대표가 상징하는 기술 벤처 자본주의들에겐 정치도 규제도 사회도 낡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를 우버와 같은 세계적 추세에 뒤떨어진 사회로 진단한다. 많은 ‘소셜’ 주의자는 사회를 거부한 채, 현재를 표백해버리고 자신의 비즈니스를 혁신적인 ‘솔루션’이라 주장한다.
문제는 이미 해외에서는 우버를 좀비기업이라고 규졍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버의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지위로 전락했고, 노동을 파편화하였다. 어플 하나 만들어 놓고, 마케팅 비용을 통해서 ‘약간의 편리’를 제공하며, 생태계를 굴복시키는 플랫폼들이 사회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길목에 서서 통행세를 받는 강도짓을 하면서 이것이 ‘정의’라고 외치는 산적과 같은 비즈니스를 하였다. 인간이란 내 몸의 약간의 편리함을 위해서 누군가의 고통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평평해진 경험들로 자영업자들은 모두 플랫폼의 노예로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술의 승리인지, 마케팅의 승리인지, 혹은 독점의 폐해인지 우린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옳은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거만함에 불편함이 느껴진다. 만약 중산층 정도의 경제력이 있다면야 이러한 플랫폼들은 편리하고 안전하고 게다가 알뜰한 미학적인 소비를 하는 좋은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소비자의 편리함이 중요하지, 내 돈 내고 이용하는데, ‘소비자가 왕인 시대’는 지속될 것이다.
이번에 타다 서비스가 문제적인 것은 여러 번의 택시 공유 서비스의 실패와 반대를 피해서 11인승 이상의 차량을 공유하는 꼼수를 썼다는 것이다. 공유 경제가 자원을 순환시켜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만, 타다는 오히려 환경적, 경제적 문제를 증폭시켜 놓았다. 이는 이동하는 원룸 공간을 대량 공급한 사실상 부동산의 확장일 뿐이다.
고객이 느끼는 편리함은 타다 서비스가 기존의 불편한 동거가 아닌 자신만의 사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동을 목적으로 한 초단기 임대 서비스인 것이다. 결국 차량이 아닌 부동산으로 전환시켜서 소비자의 편익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영리하게 법망을 피해낸 것이다. 이것은 공유경제의 승리가 아니라 부동산의 확장으로 봐야 할 것이다. 몇 천대의 이동하는 원룸을 만들어 골목상권을 침해한 대기업과 같은 전략을 쓰면서 시대와 기술을 논하는 뻔뻔함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서비스로 포장하기 위해선 기존의 서비스를 낙후시켜야 한다. 기존 택시 기사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혐오감을 조장하고 증폭하는 것이 마케팅을 핵심이다. 실제로 특히 그동안 젊은 여성들은 가부장적 남성들에게 ‘피해’를 받아왔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몰락해가는 그들도 사람이고 이웃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다. 개인의 불안과 불편함을 이유로 다른 집단을 혐오하면서 공격하는 건 인종주의적인 폭력의 메커니즘일 뿐이다. 그리고 기술과 자본, 외세의 논리를 차용하여 일방주의적으로 낙인찍는 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태도와 닮아 있다. 그들의 삶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여 모욕하며 몰아붙이고 있기에 죽음으로 몰아 놓는다는 걸 반성하지 않는다. 문제에 대한 불편함 이전에 이 문제의 구조적 모순을 따져보는 게 중요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이야기하는 태도가 필요한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살을 부딪치면서 서로의 불편함과 차이를 느끼고 때로는 모순과 다툼이 있는 사회. 이를 소비자와 행위자만 남긴 사회로 단순화하고 낙오하길 바라는 건 혁신이 아니라, 복잡한 현재와 불안할 미래 사회를 투기적 자본주의에 헌납하여 바치기 위한 사냥꾼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피를 흘려 만들어 낸 서비스를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라고 이야기할 때, 인간성은 사라진 채, 시민의식은 고갈되고, 소비자로서만 갇혀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불편함을 인내하고 타자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좀 더 성찰적이려 노력하지 않으면,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아내는 결정에 암묵적인 동의와 협조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