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18년 만에 다시 읽기

by 낭만작가 윤프로

18년 전,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의 나는 참으로 무지했다. 그때의 나에게 이 소설은 그저 눈물샘을 자극하는 슬픈 이야기, 혹은 지독하리만치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그린 조금은 먼 나라의 신파였다. 하지만 18년이라는 세월을 돌아 다시 펼친 책장은 첫 장부터 숨이 턱 막혀온다. 이제 이 소설은 나에게 문학이 아니라, 매일 아침 차디찬 공기 속에서 마주해야 하는 서늘한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소설 속 가족들은 서울역의 인파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리지만, 나는 매일 익숙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엄마를 잃어버린다. 몇 년 전 새벽, 엄마를 돌보러 가던 길에 마주한 풍경은 평생 내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파트 주차장 그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맨발로 서서 나를 기다리던 나의 엄마. 신발조차 챙기지 못한 채 당신의 기억 속 어느 지점에서 길을 잃고 서 계시던 그 작고 파르스름한 발을 본 순간,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배웠다.


그 시각, 아빠는 사라진 엄마를 찾아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을 미친 듯이 헤매고 계셨다. 소설 속 아버지가 뒤늦은 후회로 시골집을 서성이듯, 나의 아빠는 현실의 공포 속에서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어둠 속을 달리고 계셨다. 치매라는 이름의 병은 이토록 잔인하다. 엄마를 한순간에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일궈온 일상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가장 비현실적인 순간들을 현실로 들이밀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어." 곁에서 책을 보던 아내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말한다. 18년 전의 나였다면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엄마의 야윈 손을 잡고 있는 지금의 나는 안다. 우리가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했던 그 헌신이 실은 엄마가 당신의 이름과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어 만든 간절한 사랑의 조각들이었음을.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채 살아야 했던 '바보 같은 엄마'에 대한 반감은, 사실 그 헌신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 없는 자식의 비겁한 변명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소설 속 아들은 서울역에 마중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울먹인다. 나는 주차장에서 마주한 엄마의 맨발을 보며 가슴을 친다. "조금만 더 일찍 올 걸", "어쩌다 엄마의 발이 이토록 시리게 내버려 뒀을까." 치매는 우리에게 후회할 시간조차 넉넉히 주지 않는다. 엄마의 기억이 하루하루 마모될 때마다, 내가 알던 '나의 엄마'는 조금씩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미리 들춰보고 싶어 했던 18년 전의 조급함을 내려놓는다. 결말을 안다고 해서 이 슬픔이 줄어들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작가가 깔아놓은 고통스러운 서사를 묵묵히 따라가기로 한다. 그것은 마치 치매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을 견뎌내야 하는 나의 오늘과 닮아 있다.


엄마는 비록 나를 잊어가고 있지만,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비로소 엄마의 진짜 얼굴을 마주한다. 희생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졌던 한 여자, 맨발로 자식을 기다리던 그 지독한 사랑의 실체를 말이다. 18년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아프게 다가온다. 비록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내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나는 마지막까지 엄마의 손을 놓지 않고 속삭이고 싶다.


"엄마, 이번에는 내가 엄마를 잊지 않을게. 엄마가 잃어버린 그 신발을 내가 다시 신겨드릴게. 내가 엄마의 이름을 끝까지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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