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 대회
“고등학교 졸업하면 나랑 결혼하자.”
“……네?”
강제적으로 처음 선생님과 관계를 맺은 날.
행위가 끝나자 선생님은 두려워하는 유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유라는 두려움과 치부를 보인 창피함에 혼란스러운 마음만 더해졌을 뿐이다. 결혼이라고?
“지금은 네가 중학생이잖아. 나는 너를 사랑해. 너 고등학교 졸업하면 그때 결혼하자.”
대답할 수 없었다. 결혼? 흐물흐물 늘어지는 유라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선생님은 계속 말했다.
“그때까지 기다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알았지?”
선생님은 손을 들어 유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가 사랑하는 거 잊지 말고.”
그런가? 이런 것이 사랑인가? 잘 모르겠다. 유라는 싫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라를 범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해서 그렇단 말인가?
엄하고 폭력적인 아빠를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다. 어디에도 정을 붙일 수가 없었던 유라에게 친구는 사치였다. 그런 유라에게 살갑게 다가와 줬던 선생님. 그런데다 사랑한다고까지 하지 않았나. 다리 사이에서 피가 흐르고, 욱신거리지만 유라는 이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유라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래. 선생님을 믿어야 한다. 나를 구해줄 사람이니까.
절대 나한테 나쁜 일이 생기게 두지 않을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렇게 명확한 것을 왜 의심했을까?
선생님이 나를 원할 때 왜 항상 싫다는 말을 했을까? 이런 사소한 것들이 선생님께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선생님은 항상 내 편인데.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라는 선생님께 사과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뭐라도 해 드릴까? 대체 뭘 드려야 선생님이 기뻐할까? 일단 밖에 나가서 뭐가 있는지 봐야겠다. 갖고 있는 돈은 얼마 없지만 선생님은 분명 기뻐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니까. 유라는 가방을 열고 지갑을 꺼냈다. 갈색 가죽으로 된 카드지갑.
허탈하다. 잠에서 깬 표건은 깊은 공허함을 느꼈다. 그가 맞았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알았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휴대폰이 조용하다. 누구라도 꿈을 꾸고 난 뒤에는 바쁘게 울리던 휴대폰이었는데.
표건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 어째야 하지?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걷는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정말 담임선생님이? 어느 순간 귓가에 문교의 말이 메아리쳤다.
“너희 담임이 구두 신고 온 거 본 적 있어?”
가은은 머리를 흔들었다. 혼란스럽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벌써 가을이다. 매일 학교에서 얼굴을 보고 교탁에서 공지사항을 전달하던 담임선생님이 정말? 하지만 며칠 전에 교무실에서 봤던 선생님의 이상한 모습을 떠올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 전혀 말이 안 되지도 않아.
어제 잠에서 깨고 난 뒤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으리라. 누구도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알고 있을 것이다. 아침에 학교에 오기 전에 표건에게 단 한 줄의 메시지만 왔을 뿐이다.
표건: 합창대회 끝나고 우리 반에서 보자.
터덜터덜 걷다보니 벌써 교실이다. 가은은 내내 생각에 잠겨 있다. 유라. 유라를 어디에서 찾지? 유라가 필요해.
그때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꺄! 꺅! 가은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교실 앞문에 서 있는 담임선생님을 보고 급히 숨을 들이마신다.
“선생님! 멋있어요!”
“와! 멋져요!”
“잘생겼다!”
환호하는 아이들. 체육을 가르치는 담임은 양복을 입고 왔다. 양복에 구두. 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아이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을 발을 움직여 걸음을 걸었다. 성큼성큼 교단에 서더니 숨김없이 기대감을 드러냈다.
“얘들아! 오늘 합창 대회잖아. 너희들 열심히 했으니까 꼭 상을 받자! 오늘을 위해서 1년에 딱 한 번 스페셜하게 양복도 입었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자, 자. 조용히! 목을 함부로 쓰면 안 되지. 오늘 아름다운 합창 부탁한다!”
선생님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교실을 나갔다. 뚜벅뚜벅. 구두 굽 소리를 남기고.
2학년 4반은 학년별 우수상을 수상했다. 담임은 기뻐했다.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모처럼 차려입고 온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만 보였으리라. 하지만 가은과 효민, 태호, 문교, 표건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내내 의심하던 그가 양복에 구두를 신고 왔다. 1년에 단 한 번…….
합창대회를 끝내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몇 몇 아이들은 학교에 남았다. 그리고 2학년 3반 표건의 반에 모였다. 오늘 3반은 아무것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안중에도 없었다.
“……너희도 봤지? 그 자식이야.”
표건이 친구들이 모이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문교가 효민을 향해 물었다.
“너는 작년에 그 인간 반이었으면서 왜 몰랐냐? 구두 신고 온 거 한 번도 본 적 없다며?”
힐난하는 질문에 효민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친구들의 눈치를 살폈다.
“야. 됐어. 그만해. 1년도 더 전 일이고, 담임이 입고 온 옷을 어떻게 다 기억해. 얘는 분명 관심도 없었을 거야.”
표건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도 했어.”
“뭐가?”
중얼거리며 말을 내뱉는 가은을 향해 아이들이 물었다.
“처음 교무실에 불려간 날. 그때는 여름방학 전이었는데…… 담임이 지난달에 재혁이가 죽은 날에 아줌마한테 전화했었다고 한 것 같아.”
아이들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그때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 했어. 실종된 날이랑 착각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재혁이가 언제 죽었는지…… 아는 사람이 있나?”
“없지. 시체가 훼손돼서 알 수 없다고 들었던 것 같아.”
표건이 대답했다.
“그리고……너희 기억하지? 작년에는 합창대회를 봄에 했어. 올해는 강당 보수공사 때문에 가을에 하는 거고.”
가은이 말했다.
“그래. 얼마 전에도 얘기 했잖아.”
문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재혁이가 유라랑 선생님을 교무실에서 본 날. 그 날이…… 합창대회였던 거야.”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그날이 언제지?”
“5월에 있던 금요일. 재혁이는 다음 날인 토요일에 글러브를 쓰려고 학교에 다시 왔잖아. 합창대회는 스승의 날 행사 전에 했으니까…… 5월 12일.”
“그러네. 그 전 주 금요일은 5월 5일 어린이날이었어.”
태호가 휴대폰 캘린더를 휘리릭 넘기며 말했다. 가은이 말을 이었다.
“다른 날이었다면 학교에 남아있는 아이들이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날 행사가 있었다면……?”
“들뜬 마음에 다들 집으로 갔겠지.”
표건이 대답했다.
“잘 기억해봐. 재혁이가 글러브를 길들인다고 학교에 갖고 온 날. 했던 말.”
다들 문교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공부 안한다고 글러브 갖고 갔다고 했잖아.”
문교가 또박 또박 말했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적막감이 감돌았다.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누군가 말했다.
“그럼…… 그 새끼가 한 달이나 재혁이를 갖고 놀았던 거야?”
“그리고 결국 죽였지.”
착잡한 모습으로 효민이 대답했다.
한창수 경장은 다시 요상한 전화를 받았다. 미결 사건이긴 하지만 1년도 넘은 사건의 제보전화가 왜 또 본인에게 꽂히는지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오후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건 사람은 어린 학생 같았다. 목소리를 일부러 억눌러 어른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 썼지만 말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이스러움이 묻어났다.
“에……. 작년에 전학 간 아이 중에 송유라라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재혁이를 죽인 범인을 알고 있을 겁니다. 경찰아저씨.”
경찰아저씨? 한창수 경장은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말할 거라면 왜 목소리를 숨기려고 하는 걸까?
“전화 주신 분은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아저씨, 송유라를 찾아주세요.”
“너는 재혁이 친구니?”
순수하게 궁금했다. 친구라서…… 친구를 죽인 범인을 잡고 싶은 것일까?
“아닙니다. 저는…… 어른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한경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사건파일을 꺼내야 할 판이다. 몇 달 전 제보된 그랜저 TG도 찾지 못했다. 재혁이 주변 인물을 모두 찾아봤지만 누구도 찾지 못했다.
송유라.
어쩐지 낯익은 이름. 어쩔 수 없이 다시 파일을 들춰봐야겠다.
태호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제는 경찰이 나서야 할 때다. 모든 열쇠는 유라가 갖고 있다. 하다못해 유라가 적고 있던 일기장이라도 경찰이 찾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공중전화. 세상에. 공중전화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동네를 다 뒤지고 돌아다녔지만 공중전화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경찰에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생각 따위는 사라졌다. 머릿속에는 오직 공중전화만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돌고 돌아 처음 가보는 아파트 입구 앞에 공중전화 부스를 보자 태호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주저하지 않고 인터넷에서 찾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난생 처음 경찰아저씨와 통화 해 봤다.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떨렸지만 내 정체를 숨기고 꽤 잘 해낸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은 아직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범인의 윤곽을 잡은 지금 뭘 할 수 있을까? 태호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처럼 소심한 성격의 태호였다면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고민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언젠가 효민이 말했던 제보전화가 떠올랐다. 공중전화를 찾으면서 몇 번이나 연습을 해 봤지만 실전은 달랐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내가 재혁이 친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역시 괜히 경찰이 아닌가보다. 이제 이 사람을 믿어보는 수밖에…… 내가 재혁이의 친구라는 것을 알아챌 만큼 영민한 사람이니 범인을 잡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