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조력자
송유라. 송유라.
박정호 선생님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준 아이. 기억이 났다. 짧은 커트머리의 여자아이. 이 나이의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긴 머리를 선호한다. 뭐 개인의 취향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헤어스타일이 남달라 기억이 났다.
재혁이가 실종 된 토요일 오후 박정호 선생님은 유라와 운동장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담.
당시 순경이었던 한창수 경장은 굉장히 피곤한 상태로 선배와 동행했다. 2인 1조로 움직여야 한다는 규칙 때문에. 재혁이의 사건이 전국 방송을 타는 바람에 일은 끊임없이 밀려들어왔다. 결국 이런 일들은 가장 말단인 순경이 처리해야했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기 일쑤였다.
별 특징이 없던 아이라고 기억했는데. 이 아이가 범인을 알고 있다고?
일단 학교에 확인을 해 봐야겠다.
“안녕.”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려는 유라에게 누군가 말을 건넸다. 유라는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젊은 남자.
순식간에 기억이 밀려들어온다. 유라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새로 전학 온 학교는 잘 적응하고 있니?”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거는 남자. 하지만 유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껌벅였다.
왜? 왜 이 사람이 또 나를 찾아왔을까? 불안했다.
그때 젊은 남자가 커피와 아이스티를 트레이에 담아 테이블로 갖고 왔다. 유라의 앞에 아이스티를 놓아 주고, 남은 의자에 앉았다. 유라는 여전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유라야. 겁먹을 필요 없어. 우리는…… 네가 궁금해서, 몇 가지만 물어보려고 그래.”
유라는 머리를 숙인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라에게 불쑥 사진을 들이미는 남자. 보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지만 보고야 말았다. 박정호 선생님. 그 얼굴을 보자 눈물이 흐른다.
몰랐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아이가 죽었다. 교무실에서 우리를 훔쳐 본 아이.
너무나 치욕스러웠다. 벌거벗은 모습을 들킨 기분이었다. 절망적이고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가 달래줬다.
“괜찮아. 별 거 아니야. 괜찮아. 우리가 해결 할 수 있어.”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창피함에 고개도 들 수 없었지만 그는 달랐다. 남자아이가 우리를 보고 도망 간 뒤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분한 모습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상체를 더욱 더 밀착시키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괜찮아.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잖아. 그렇지?”
밀어내고 싶다. 내 몸과 맞닿아 있는 이 남자를 떨쳐내고 싶다. 주먹을 쥐고 그의 옷을 잡고 밀어보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는 쉬지 않고 밀어붙였다. 더럽기 짝이 없는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남자가 절정에 도달했다. 짧은 신음소리를 내뱉고 나자 드디어 몸이 떨어져 나갔다. 유라는 녹초가 되었다. 다리를 벌린 채 지쳐있는 유라를 보더니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새끼 가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무슨 말인지 유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는 옷을 추스르며 비품 창고를 나가버렸다. 교무실에서 소지품을 정리하는 남자를 보고 유라는 대충 옷을 여미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으며 남자를 따라 나갔다.
“선생님……. 그 애…….”
남자는 유라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걱정할 거 없어. 우리 반 애야. 유라는 걱정할 거 전혀 없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
남자는 휘파람을 불며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교무실로 돌아왔다.
“밖에 글러브 있다. 걔 건가봐. 우리 반 3분단 앞에서 세 번째 자리에 갖다 놔.”
이 말을 남기고 남자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눈물이 떨어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유라의 손과 교복을 적셨다. 이제 그만 울어야 하는데. 계속 이렇게 눈물만 흘렸다가는 아빠처럼 이 남자들도 나를 때릴지 모른다.
“재수 없게 어디서 울고 지랄이야!”
귓가에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앞에 앉은 남자가 내미는 하얀 휴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차마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한다.
“유라야. 괜찮니?”
“아저씨들이 들어줄 테니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다 해.”
야간 일을 하는 아빠. 작년 홍화중으로 이사하면서 아빠는 중고차를 한 대 샀다. 사고경력이 있긴 하지만 싸게 샀다고 좋아했던 아빠. 차키도 두 개나 받았다.
유라는 아빠의 차에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는 항상 걸어 다녔고, 차를 타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아빠의 차에 관심을 보였다.
“내가…… 걔를 좀 만나야겠어. 근데 누가 보면 안 되니까 너희 아빠 차 좀 빌리자.”
유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빠 차를?
“아…… 안 돼요. 선생님.”
“안 되긴 뭘 안 돼? 그럼 그 애가 사방팔방 다 불어버리고 다니면 너는 괜찮아?”
물론 괜찮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가장 아끼는 차에 어떻게 손을 댄단 말인가.
“아빠가 주무실 때 차 키 좀 슬쩍 해 와.”
이렇다 저렇다 유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누가 볼 지도 모르는데 내 차를 쓸 수는 없잖아. 그리고…… 네가 걔한테 어디로 오라고 좀 말해줘.”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고? 치부를 들켜버린 수치스러움을 그는 모른단 말인가?
싫다고 말하고 싶다.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그나 아빠에게 싫다고 표현할 수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항상 내 의사와는 다르게 흘러갔던 상황들.
유라는 눈을 꼭 감고 용기 내어 말했다.
“……선생님. 저는…… 못해요”
“뭐?”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낀 유라는 움츠러들었다. 그가 이 사이로 으르렁 거리며 작게 말했다.
“야, 지금 나 혼자 살자고 이러는 거야?”
“…….”
“너…… 지금 미성년자이고, 그 새끼가 어디 가서 불어버리면 난 경찰에 잡혀가. 그러면 널 구해줄 수 없다고. 알면서 왜 이래?”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왔잖아. 너 고등학교 졸업하면 그때 결혼하니까.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유라는 선생님이 지정한 날 아빠가 잠든 사이 TV 장을 뒤져 스페어 키를 훔쳐다 선생님께 드렸다. 선생님이 차를 쓰고 갖다 놓은 날에는 아빠가 혹시 알아차릴까 긴장한 채로 지내야 했지만 다행히 아빠는 눈치 채지 못했다.
“종이에 5월 16일 6시에 XX로 오라고 써서 보여줘. 종이는 다시 갖고 오고.”
유라는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네?”
“내가 불러준 대로 써서 그 자식한테 보여주라고. 어려워?”
유라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아이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쉬는 시간에 비척비척 걸어가 교실 앞에 멈춘다.
“표재혁 좀…….”
기어가는 목소리로 다른 아이에게 재혁이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유라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 나오는 재혁이는 유라를 알아본 모양이다.
종이를 보여준다. 남자아이가 눈으로 글씨를 훑어보는 짧은 시간에도 유라의 다리는 바들바들 떨린다.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남자아이가 약속한 시간에 그를 만났는지는 모르겠다. 어찌됐건 그는 그 시간에 아빠의 스페어 키를 갖고 갔다. 그와 남자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알 수 없다.
“5월 20일에 XX 앞으로 오라고 해.”
“네?”
“그 새끼 말이야. 너랑 나. 훔쳐본 새끼.”
또 그 남자아이에게 약속장소와 시간을 전달하는 것인가? 유라는 수치스러움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새끼가 아무래도 어딘가에 불어버릴 것 같아. 너는 모르겠지만 난 한 번 더 걸리면 끝이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아이를 또 봐야 한다고?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정신이 돌아온다. 유라는 지금 체육시간이다. 아무도 유라와 짝을 짓지 않는다. 고개를 들자 둘 씩 짝을 지어 핸드볼 연습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유라의 옆에서 핸드볼 패스하는 동작을 하면서 지시사항을 내리고 있었다. 손에는 공을 들고 패스하는 것처럼 허공을 가르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내뱉는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 날 스페어 키 좀 갖고 와라.”
선생님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이내 목소리를 키우며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자! 골을 넣을 때는 이렇게 스텝을 밟는 거야! 하나, 둘, 셋!”
골을 넣는 제스처까지 하고 알겠냐는 듯이 웃는 선생님.
5월 30일 체육시간.
“이번이 마지막이야.”
“선생님……. 이제…….”
“뭐? 그만하라고?”
유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걔는 꼭 나오게 되어있어. 이렇게 써. 표예나. 3학년 7반.”
유라는 놀란 눈으로 저도 모르게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표예나가 누군지 모른다. 얼굴도 본 적 없다. 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 남자아이와 같은 표씨. 흔하지 않은 성이다. 게다가 3학년이라면 누나일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라에게 선생님이 박수를 친다. 선생님은 흡족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그래! 잘했어! 유라야. 그렇게 하면 돼!”
아이들이 박수 소리를 따라 모두 유라를 바라본다. 유라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핸드볼 공을 떨어뜨린다. 시선이 집중되자 얼굴이 빨개진다.
6월 10일.
선생님의 권유로 가은이를 찾아갔다.
“재혁이가 정가은이랑 소꿉친구였대. 그 새끼가 누군가한테 뭘 얘기했다면 아마 가은이 일거야.”
아빠에게 사정을 해 다니게 된 영어학원.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원에 다니는데……. 나도 학원에 가면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하지만 역시나 아무도 유라에게 관심이 없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정가은.
가은은 유라의 짧은 머리를 칭찬해줬다.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유라는 가은에게 빌렸던 공책을 돌려줬다. 그 일만 아니라면 유라는 들떴을지도 모른다.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와 물건을 공유하고 특별한 일이 없어도 친구의 집에 놀러가기를 바랐다. 갑자기 집에 찾아온 유라를 보고 가은은 놀라기는 했지만 다른 친구들처럼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조금 어색해했을 뿐이다.
유라에게 공책을 받은 가은은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아 유라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적어도 유라가 만난 가은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알고 있었다면 가은의 얼굴에 경멸스러움이 떠올랐을 것이다. 유라를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이 그랬듯이.
재혁이가 가은에게 아무 말도 안 한 것일까? 선생님은 왜 재혁이가 가은에게 말했을 거라 예상했을까?
그런데 골목길 끝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회색 후드 집업에 검정색 반바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항상 교복이나 체육복 입은 모습만 봤기 때문에.
하지만 그 아이가 유라를 알아봤다. 짧은 머리의 유라를 한 눈에 알아보고 뒤돌아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