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
“키.”
선생님이 유라에게 손을 내민다. 유라는 선생님에게 스페어 키를 건넨다.
“일단 너도 타.”
“네?”
함께 차에 타자고 하는 것은 처음이다. 유라의 집 골목길을 빠져나가며 선생님이 말한다.
“너 정가은 알아?”
유라는 대답하지 못하고 놀란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본다.
“재혁이가 정가은이랑 소꿉친구였대. 그 새끼가 누군가한테 뭘 얘기했다면 아마 가은이 일거야.”
대화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가은이의 이름은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 마냥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재혁이는 5시에 만나기로 했어. 그 전에 가은이라는 애 좀 잠깐 보고 와. 혹시 무슨 말 들은 거 없나 물어봐.”
잊고 싶을 만큼 추악한 장면을 재혁이라는 남자아이에게 들켰다.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고 수치스러웠지만 선생님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한 번 더 재혁이를 찾아갔다. 유라는 일부러 재혁을 마주보지 않았다. 쪽지에는 어떤 말이 적혀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재혁의 반응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 남자아이도 나와 같이 꼭두각시가 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하겠지.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창피함을 꾹꾹 눌러 남자아이의 맞은편에 선 채 고개를 돌려 운동장을 바라본다. 어서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곁눈질로 흘끗 본 남자아이는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유라는 그 아이의 손에서 쪽지를 낚아채고, 말하지 말라고 속삭인 뒤 달려가기 시작한다.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믿고 싶다.
그 날 학교가 끝나고 유라는 머리를 잘랐다. 학교에서 지나치더라도 그 아이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가은이 짧은 머리를 칭찬해줬을 때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또래 친구에게 처음으로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했다. 가은이라는 이 아이와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기대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와르르 무너졌다. 그의 입에서 ‘정가은’이라는 이름이 나오다니. 찰나의 순간, 가은이도 나와 같을까 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은이도 그에게 나 같은 존재일까?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고, 처녀를 빼앗고, 결혼하자는 달콤한 말로 다독여줬을까?
두려웠다. 질투가 났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재혁이와 가은이가 소꿉친구?
가은이를 만나고 도망치는 재혁이를 보고 유라는 뒤돌아 골목을 빠져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아빠의 차에 올라탔다.
“어때?”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그가 물었다.
“……재혁이가 왔었어요.”
“재혁이가 정가은한테 얘기했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가은이를 만나러 온 것 같은데 저를 보고 그냥 도망갔어요.”
“오! 내가 뭐래? 가은이한테 올 거라고 했지? 오늘 나를 만나기 전에 혹시나 해서 말하러 왔었나보네.”
“……왜요? ……왜 오늘?”
“얘기가 잘 안 됐어. 그 자식이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전에 있던 학교에서 떠돌던 소문을 들었나봐. 맹랑한 새끼가 그 얘길 하더라고.”
“선생님이죠?”
종례를 끝내고 교실을 나와 교무실로 향하는데 계단 난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재혁이 서 있었다.
……뭐라는 거야.
“뭐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되물었지만 입꼬리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실룩이며 경련이 일 것 같다.
“선생님인거 알아요.”
모르는 척 하려고 했다. 이런 콩알만 한 아이의 입에서 나온 소리야 묵살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확신에 찬 음성을 듣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개처럼 끌려 다녔던 때가.
“무슨 말이야?”
“여기에서 말해요?”
오호, 제법 협박조로 말한다.
“기다려. 곧 연락 할 테니.”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면서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랬다가는 약점을 들키는 꼴이 되고 만다. 어두운 비품 창고에서 어떻게 나를 알아봤지?
“그 애한테 하지 마요.”
처음으로 단 둘이 만난 날. 그 자식이 이렇게 말했다.
시뻘게진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분노를 담아 노려본다.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억눌린 목소리로 말한다. 이게 미쳤나?
“뭐?”
“하지 마요.”
“뭘?”
“…….”
그깟 단어 하나 입에 못 올리는 놈이 어디서 없던 용기라도 생겼나.
“선생님, 그 얘는 분명 싫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지 마요.”
“그러니까 뭘 하지 마? 쥐새끼처럼 훔쳐본 주제에. 네가 걔랑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나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
“선생님 전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쥐새끼 같은 놈이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제대로 잘 덮었다고 생각했는데.
잊고 싶던 기억이 따라다닌다. 떨치려고 해도 도무지 떨쳐지질 않는다. 기억은 끈질기게 따라붙어 발목을 잡는다.
“……소문이요?”
“넌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다 헛소문이니까.”
천천히 차를 몰더니 유라의 집에 도착했다.
“아빠 오늘은 일 안 간다고 했지?”
“네.”
“내일 아침까지 차 갖다 놓을게. 걱정 마.”
다정한 목소리로 유라를 달래주고 그는 차를 타고 멀어졌다. 유라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소문? 무슨 소문? 혹시 그에게…… 나 같은 존재가 또 있었을까? 그때 유라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언제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분하다는 듯이 말했던 그가 내뱉었던 말.
“너는 모르겠지만 난 한 번 더 걸리면 끝이야.”
후두둑. 후두둑. 카페에 앉은 채로 유라는 울면서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들은 유라가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유라가 말을 마치자 젊은 남자가 일어나 휴지를 가지러 갔다. 남은 남자가 유라에게 말했다.
“유라야. 네가 말한 그…… 선생님이 박정호 선생님이야? 작년 재혁이 담임선생님?”
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젊은 남자가 유라에게 휴지를 건넸다. 유라는 휴지를 받아들었지만 눈물을 닦지는 못했다.
“그 날…… 네가 박정호 선생님과 함께 있었다고 말했잖아? 그렇지?”
유라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실은 같이 있었지만 너와 헤어지고 재혁이를 만나러 갔구나?”
“네.”
“그럼 우리한테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어?”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울고 있는 유라를 앞에 두고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잠시 후 젊은 남자가 유라에게 물었다.
“지금 한 얘기들…… 증명해 줄 수 있니? 증거 같은 게 남아 있어?”
유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없어요.”
막막함을 느꼈다. 그를 옭아 맬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니.
유라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로 눈물을 닦더니 의자에 놓아둔 가방을 열었다. 젊은 남자가 재빨리 유라의 손목을 잡았다. 유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젊은 남자를 보았다.
“……일기장.”
“뭐라고?”
“일기장이 있어요. 그거 드리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