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
과연 유라에게 건네받은 일기장에는 작년에 있었던 모든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게 과연 증거로 채택이 될 수 있을까?
한창수 경장은 유라의 일기장을 한 장씩 넘겨보며 읽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를 골라 앞잡이로 사용하고 그늘 속에 숨어 있었다. 유라의 곁에는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잡아먹기 쉬운 먹잇감인가.
박정호는 유라를 휘두르면서 포식자의 기분을 한껏 느꼈을까? 그 기분에 도취되어 있었을까? 재혁이가 죽은 후에도 박정호는 유라를 착취했다. 호감형의 체육선생님. 실제로 그는 평판도 좋았고, 유라와의 알리바이가 확인되면서 일찌감치 수사선상에서 제외되었다. 전에 근무했던 학교에서도 나쁘게 말하지 않았는데…….
“야! 이 년아! 아무리 애미 없는 자식이기로서니 남에 물건에 손을 대? 네가 도둑년이야?”
솥뚜껑만한 손이 허공을 가르며 유라의 왼쪽 뺨을 때린다. 유라는 가는 다리로 서 있다가 아빠의 따귀에 종잇장처럼 바닥으로 쓰러진다.
“아니에요. ……저 아무 짓도…….”
“아무 짓도 안 해? 내가 오늘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아? 이 창녀 같은 계집애가!”
철썩 철썩.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매질에 유라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유라아버님 이시죠?”
조금 일찍 출근길에 오르던 남자는 대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남자와 마주친다.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젊고 잘 생긴 남자.
“저는 유라 체육 선생님이에요. 아버님 잠깐 얘기 좀…….”
담임도 아니고 체육 선생님? 남자는 눈을 껌벅였다.
“아……. 갈 만한 곳이 없는데…….”
“괜찮습니다. 잠깐이면 되요. 아……. 제 차에서 잠깐 얘기할까요?”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밝힌 남자는 옆 집 앞에 세워져 있는 스포티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러 가더니 조수석 차 문을 열었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학교에서 작은 일이 있었어요.”
“무슨……?”
남자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아끼더니 다짐한 듯이 입을 열었다.
“유라가…… 체육시간에 친구 돈에…… 손을 댄 것 같습니다.”
“뭐요? 유라가?”
“예, 아버님. 큰돈은 아닌데……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서요. 아마 다들 체육시간에 나가 있는 틈을 타서 그런 것 같아요. 아직은 학교에서는 모르고 저만 알고 있습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그렇게 자식새끼를 키웠단 말인가? 애미가 없으면 더 조심히 댕겨야지 어디서 도둑질을?
“……유라가 그런 게 맞습니까?”
“……네.”
선생이라는 젊은 남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가 체육시간 중간에 화장실을 간다거나 양호실에 간다고 자주 빠졌어요. 아무래도 여자아이라서…… 보내주곤 했는데, 그때 그런 것 같습니다. 같은 반 아이가 저한테 얘기를…….”
“얼맙니까? 내가 물어드리죠. 그리고 유라한테 혼꾸녕을…….”
“아뇨. 아버님. 말씀드렸다시피 금액은 크지 않습니다. 돈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문제는 그것 말고도 또 있어서…….”
“또요? 뭐가요?”
“……이번에 이 근방에서 죽은 아이가 있어요. 제가 맡은 반 아이인데…….”
남자가 주저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라의 아버지는 기다렸다.
“유라랑…… 그 아이가 친했나보더라고요. 복도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꽤 있더라고요.”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요?”
“유라가 저, 그 남자아이랑…….”
“뭐요? 유라가 그 아를 죽이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갸는 저기 멀리에서 발견 됐다 하지 않았어요? 거기까지 우리 유라가 무슨 수로 간단 말입니까?”
“아니요. 아버님. 그게 아니라…… 학교에서 소문이 좀 돌았나보더라고요.”
“소문? 무슨 소문!”
점점 이성을 잃어가며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에게 남자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재혁이가 죽은 것과는 별개로…… 유라가 재혁이랑…… 그……”
“뭐요? 뭔데요?”
남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유라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추잡한 영상이 떠올랐다.
난감하다는 듯이 남자가 손을 비비며 내키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그게 아무래도 아이들이 사춘기이고 또 이성에 눈 뜰 때이다 보니…….”
“아니요! 유라가…… 걔가 그럴 리…….”
문득 도망간 아내가 생각났다. 유라의 엄마. 그래. 그 년도 다른 놈이랑 눈이 맞아서 도망갔지.
필시 그랬을 것이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이 빌어먹을 집구석.
남자는 흥분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님. 더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전에 이사 가시는 걸…… 생각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
“네. 유라를 위해서요. 전학 수속은 제가 다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라는 남자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선생님은 배웅을 하기 위해 서둘러 함께 차에서 내렸다. 급히 발을 놀려 아버지가 가는 방향으로 뛰어갔지만 화가 났는지 남자는 인사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몇 분가량 서 있다가 인기척이 없자 선생님도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탔다. 혼자 있자 슬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름 두 개만 말 했을 뿐이다. 둘이 뭘 했다고 내가 한 마디라도 언급 했나? 아니다. 킬킬 거리며 새어나오는 자축의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유라와 재혁이 복도에서 마주보고 서 있던 것을 먼발치에서 본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그때는 화도 났었다. 이렇게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을 곳에서 메시지를 전한단 말인가? 머리가 빡대가리가 아니고서야.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장면은 둘을 옭아매기 좋은 미끼였다. 다 써버린 유라를 어디로 전학 보내야 할까? 선생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브레이크를 밟고 자동차 시동을 켰다.
당분간은 조심해야지. 지난번 근무했던 학교에서는 아이를 너무 오래 데리고 있었다. 그래서 꼬리가 밟혔고. 다행히 평소 성실한 근무 태도와 나름 좋았던 평판 덕분에 교장이 어느 정도 덮어주긴 했지만 전임(轉任)은 어쩔 수 없었다. 뭐 그것도 나를 위해서였겠어? 학교 이름에 먹칠 할 까봐 그랬겠지. 같은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말아야지.
유라같은 아이는 또 있을 것이다. 영혼에 상처받고 찢긴 아이. 너무나 쉬운 먹잇감들. 창문을 열자 상쾌한 바람이 들어와 머리칼을 흩트린다. 가을은 좋구나!
한동안 없던 매타작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빠의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버린 엄마. 왜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왜 나를 아빠 곁에 두고 갔을까? 나와 함께 나갔다면 아빠가 쉽게 우리를 찾아냈을까? 덧없는 생각들이 허공에 날라 다닌다. 아빠라는 남자가 침을 튀기며 소리 지르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벌써부터 남자랑 붙어먹어! 이 개 같은 년이! 지 애미를 닮아서!”
아빠에게서 나를 구해주겠다는 선생님이 떠오른다. 아빠의 입에서 흐르는 상스러운 욕들. 결국 아빠가 알아버린 것일까? 선생님은…… 무사한 걸까? 잘 들리지 않는다. 내가 지금 어느 방향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방이 빙빙 돌고, 앉아있는 건지 누워 있는지도 가늠이 안 된다.
유라의 전학은 재빨리 처리되었다. 어차피 친구 하나 없는 학교생활. 유라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나를 구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선생님과 헤어져 다른 학교로 가야 한다고?
무서웠다. 이제 누가 나를 지켜주지?
“유라야. 나도 헤어지기 싫어. 하지만 너희 아버지가 전학을 결정했으면 어쩔 수 없잖아. 그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으면 내가 널 데리러 갈게. 나랑 결혼하겠다는 약속 잊지 마. 알았지?”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유라는 깨달았다. 자신은 철저히 이용만 당했을 뿐이라고.
그 장소, 그 시간에 선생님과 갇혀 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한 발 벗어나 생각해보니 그의 사탕 같은 달콤한 속삭임과 결혼 약속은 모두 부질없는 메아리였음을 깨달았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유라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니 핵교는 잘 다니고 있냐?”
야간 일을 위해 출근길에 나서던 아빠가 지나가는 말로 유라를 향해 물었다.
“……네.”
“지난번처럼 말썽 안 부리고?”
말썽? 무슨 말썽? 입도 벙긋 못 한 채로 학교에 다녔는데 대체 무슨 말썽?
“네.”
아빠는 유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내키지 않는 듯이 말했다.
“잘했다. 그 남자선생이 참말로 조용히 처리한갑네.”
“……네?”
유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아빠에게 반문했다. 남자선생이 누구지? 담임은 미술 여자선생님이었는데?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설마 그 사람이?
“그래. 니네 핵교에서 왔다던 그 선생. 문단속 잘 해라.”
이 말을 남기고 나가려 하는 아빠를 유라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아빠, 누구? 그…… 체육선생님?”
“그래. 미리 손 쓴다고 집까지 찾아왔다.”
아빠는 반지하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유라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나를 보냈단 말인가? 나 모르게 아빠까지 만나서?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
멍청했다. 내가 멍청했다. 언젠가 그가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거지같은 집구석에서 나를 빼내 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의 헤어짐을 슬퍼하지 않았나? 그를 믿었다. 사랑한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유라가 시선을 내리자 눈물이 떨어졌다. 툭, 투둑. 흐느낌에 유라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시야가 흐릿하게 보여 눈을 깜박인다. 다시 눈물이 떨어지면서 시야가 밝아졌다. 문득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이 보였다. 닦아도,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그릇. 설거지를 해도 도무지 깨끗해지지 않는 그릇.
나도 그럴까?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그릇처럼 나도 이 오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버둥 칠수록 내 몸에는 더러움만 남는 것일까?
홀로 남은 손바닥만 한 주방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