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종일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누운 채 두꺼운 이불을 통과하는 텔레비전 소리에 정신을 집중하려 한다.
지금이 몇 시인지, 몇 월인지도 모른다.
달력은 그때 이후로 한 장도 넘기지 않았다. 이모와 살았던 그때.
이모를 생각하자 다시 눈물이 흐른다.
이불을 꼭 싸매고 텔레비전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힘을 준다.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모를 죽게 하고, 대신 청력을 얻었다는 생각.
눈물에 이불이 금세 젖어 든다.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살아봤자 내 옆에는 아무도 없는데.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내 일상은 단조롭다.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텔레비전을 켜놓는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보지는 않는다. 오직 소리만 듣는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소리에 이름을 붙여준다.
오직 텔레비전을 통해서 알게 된 소리의 이름들.
휘이익 부는 바람 소리, 쪼르르 흐르는 작은 물줄기 소리,
팔락이며 책장 넘기는 소리, 사박사박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소리.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세상은 고요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세상은 정말 소리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덕분에 지금까지 사용한 적이 없던 내 귀는 매시간, 매 순간 바쁘다.
숨이 막혀 이불을 느슨하게 잡는다.
어느덧 땀이 났음을 깨닫는다. 계절이 또 바뀐 모양이다.
드라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의 목소리는 저렇구나. 낮고, 굵은 목소리.
그에 반해 여자의 목소리는 듣기에 더 편하다.
저들은 낮든 높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하지만 나는 한 번도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혀와 입술, 이를 어떻게 사용해야 저들처럼 능숙하게 말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가끔은 나도 저들처럼 말하고 싶어 시도해보지만, 꺽꺽대는 소리만 나올 뿐이다.
그렇게 내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문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해 다행이다.
배가 고프면 재빨리 시리얼을 먹고 다시 침대로 파고든다.
잠을 청한다. 근육이 빠진 다리를 이불 속에서 포갠다.
내가 언제 잠에서 깼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모와 살던 집은 이제 나에게 시간의 개념에 속하지 않는 장소이다.
모르겠다. 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달그락거리는 숟가락질 소리가 듣기 좋다.
감정이 차오를 때면 먹는 것도 잊을 때가 있지만 사람이라고 배가 고프기도 하다.
내가 이런 생활을 얼마나 했을까? 오늘이 대체 며칠일까? 이모를 잃은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끔 궁금한지만 알아서 뭐 하나라는 무기력증이 나를 짓누른다.
그래, 알아서 뭐 해. 그걸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이모는 내 옆에 없고, 나는 이모를 잃는 대신 청력을 얻었는데.
내가 죽을걸.
그랬다면 이모는 홀가분하게 시집도 가고, 아이도 낳았을 텐데.
다음에는 이모의 아이로 태어날걸.
부질없는 생각들이 흩어진다.
시리얼이 떨어졌다. 안 먹고 살 수는 없나?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살고 싶은 생각은 있나 보네.
나는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질긴 생명 줄을 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는 이모가 죽었을 때 같이 죽어야 했는데.
평소와 같이 인터넷으로 시리얼을 주문하려고 발을 떼다가 갑자기 밖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휘감는다.
가만히 서서 이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고민한다.
투둑, 투둑. 처음에는 깜짝 놀랐었지.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신기하기만 했던 소리.
누군가 내 옆에서 이건 이런 소리야, 이 소리는 이럴 때 나는 소리야. 라고 알려준다면
난 지금보다 훨씬 덜 두려워하며 살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역할은 나에겐 항상 이모뿐이었다.
창문으로 다가간다.
이모의 티셔츠와 이모의 반바지를 입고 창문 밖을 내다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맞은편 골목길에 검은색 우산이 보인다.
우산.
물끄러미 우산을 바라보다가 우산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산을 든 사람은 그 자리에 서 있다.
왜 걸어가지 않지? 왜 지나가지 않지?
저 아래, 내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
좁은 골목에는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텐데.
구름 낀 날씨.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빗줄기는 굵어지고 있다.
우산을 쓴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누굴까?
3층에서는 우산의 그늘 아래 숨어 있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계를 흘끗 바라본다.
4시 15분.
이 집에 돌아오고 처음으로 시계를 본다. 오후구나.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우산을 찾는다.
너는 누구니? 왜 집에 안 가고 여기에 서 있니? 나처럼 집에 가도 아무도 없는 거니?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되뇐다. 가련하구나.
움직이지 않던 우산이 흔들린다. 우산이 움직인다.
이제 가려나 보다. 피식 웃음이 난다. 저게 뭐라고 흥미가 일었을까?
하지만 난 곧 웃음기를 지워야 했다.
우산은 좌우로 움직이지 않고 뒤로 넘어간다.
우산이 넘어가면서 우산을 쓰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턱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우산.
우산에 가려 운동화 끝만 보이던 사람은 남자였다.
헤어스타일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그는 두리번거리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내가 서 있는 3층 창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마치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 뒷걸음을 치다가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근다.
침대로 뛰어들어 이불을 뒤집어쓴다.
누구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다. 기억에 없다. 변태인가?
덜덜 떨며 이불을 세게 끌어당긴다.
왜 그랬을까? 매일 이불 속에 숨어 살던 내가 왜 오늘은 비가 온답시고 창문에 가까이 다가갔을까?
쿵쿵거리며 거세게 뛰는 심장이 좀처럼 잦아들지를 않는다.
이불을 그러쥐고 캄캄한 암흑 속에서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째깍, 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린다.
안전한 곳에 숨었다는 생각에서인지, 시간이 지나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칠던 숨소리가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내 머리는 나의 착각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정말 나를 봤을까? 어쩌면 비가 얼마나 오는지 확인하려고 올려다봤을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우연히 그곳에 서 있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이게 정말 맞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가 나를 기다리고,
나를 올려다봤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가설에 동화되어 간다.
슬며시 침대를 빠져나온다.
급하게 잠갔던 방문을 열고 고개를 쭉 빼고 거실 창문에 슬금슬금 접근한다.
빠꼼히 고개를 들고 아까 그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깊은숨을 내쉰다.
내가 착각했나 봐. 혼자 뭐 하는 거야.
나는 창문으로 한 걸음 다가서서 거칠게 커튼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