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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Aug 24.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그를 만나다.

그는 사고로 할아버지를 잃었다. 

그에게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모와 같은 존재였을까? 

한 손에 편지를 든 채 다른 손으로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내용을 알 수 없는 편지. 얼룩진 기사.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도 나와 같다는 것을. 

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경험했으므로. 

사고로 소중한 것을 잃고 나만 살아남은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으므로. 

통곡으로 다물었던 입이 벌어진다. 

듣고 싶지 않았던 내 목소리가 울음과 함께 흘러나온다. 

꺽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비에 젖어 울고 얼룩진 편지 위에 내 눈물이 새롭게 떨어진다.      


 고개를 돌리니 거실 창문으로 길게 햇빛이 드리워진다. 

노란빛과 붉은빛이 적당히 섞인 저녁노을이 드러낸 내 발목을 비추고 있다. 

내 눈은 아마 퉁퉁 부어 있겠지. 이 사람은 누굴까? 나에게 편지를 쓴 이 사람. 

눈물이 멈추자 어쩐지 허탈함이 남는다. 

남아 있는 마지막 편지를 바라본다. 

겉면에 적힌 함석헌. 나에게 편지를 쓴 함석헌이라는 사람은 아마 기사의 주인공인 함모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나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 

단지 나와 같은 유일한 생존자라는 이유로 의령에서 여기까지 와 나를 기다린 것일까? 

고작 동질감 때문에? 아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이미 펼쳐져 있는 편지지를 집어 든다. 


‘네가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어.’, ‘어쩌면 너는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게 무슨 말일까? 정확한 답은 아마 얼룩져 읽기 힘든 첫 번째 편지에 있었을 텐데. 

연한 초록색의 마지막 편지 봉투를 뜯는다. 


 ‘나는 일 년 가까이 집에 틀어박혀 있었어. 할아버지가 나 대신 죽으면서 나에게 눈을 줬다는 

생각에 힘들었거든. 죄책감 때문에 할아버지를 따라 죽을까도 생각했었지. 

너도 아마 나와 같을 거야. 뭔지는 모르지만, 누군가를 잃고, 무엇인가를 받았겠지. 

내가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너에게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너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그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에 너한테 미안해진다. 

변명이라고 생각해도 좋지만…… 그때는 나도 힘들었어. 나를 추스르기도 힘들었어. 미안해.’     


다른 편지들에 비해 굉장히 많은 감정을 드러낸 편지였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한편,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눈을 줬다는 생각? 내가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잘 모르겠다. 

그의 말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만나야겠다.



그가 언제쯤 우리 집 앞으로 올까? 벌써 의령으로 가 버린 것은 아니겠지? 

어디를 가야 그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1층 현관 계단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 그의 편지를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를 만나 직접 들어봐야겠다. 


퇴원하고 처음으로 휴대폰 전원을 켰다. 

연락 올 곳이 없다는 생각에 방치해 두었던 휴대폰. 

안 켜지던 휴대폰은 충전하고 나니 다행히 전원이 들어왔다. 

지금 계단에 앉아 1분에 한 번씩 시간을 확인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다.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몇 장 안 되는 이모 사진을 들여다본다. 

이렇게 될까 봐 휴대폰을 꺼 놨는데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휴대폰을 보다가도 누군가 지나가거나 같은 빌라에 사는 이웃 사람들이 올라가기 위해 

그림자가 어른거리면 혹시 얼굴도 모르는 그가 왔을까 봐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아니면 우리가 서로 얼굴을 못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오후 5시 37분.

아직 한 낮처럼 햇빛이 내리쬔다. 

초여름의 미풍은 살짝 더운 공기와 먼지가 섞여 있다. 

아침에 시리얼 한 그릇 먹은 게 고작이라 배가 고프다. 

오늘은 그가 오지 않으려나? 아니면 아침 일찍 돌아갔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의령으로?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서파랑.”


고개를 든다. 

길게 늘어지기 시작한 그림자 끝에 그가 서 있다. 

역광이라 얼굴을 볼 수 없지만, 그가 맞을 것이다. 함석헌. 

순간 두려움이 일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그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그는 나에게 다가서지 않았다. 1층 현관문 밖에서 움직이지 않고 나를 바라본다. 


 “오늘은 도망가지 않네? 괜찮아?”


나는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다. 어제 내 이름을 불렀던 사람. 이 남자가 함석헌이구나. 

나는 입을 다물고 한 걸음 그에게 다가선다. 

우산을 쓰고 있던 남자. 좁은 골목길에서 3층을 올려다봤던 남자가 여기에 서 있다. 

그는 약속한 대로 매일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렸구나.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를 휘감는다. 


그는 여전히 밖에, 햇빛 속에 서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늘 속에 숨어 있던 나는 걸음을 내디뎌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보인다. 

조금 큰 키에 다부진 체격, 짧은 까까머리에 가늘고 긴 눈, 살집이 있는 코와 도톰한 입술이 친근하다. 

그는 내가 그를 바라보는 것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지 않았다. 

그는 연민과 슬픔이 깔린 반가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이번 주까지만 기다리려고 했어. 그래도 너와 만나지 못한다면 의령으로 내려가려고 했었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가늘고 긴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미소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듣기 싫은 내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또 입을 다문다.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 다급하게 문자를 입력한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궁금한 것들이 많아요.’


화면이 보이도록 그에게 휴대폰을 내민다. 글을 읽은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여기 근처에 갈 만한 곳이 있을까?”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고 휴대폰에 글자를 입력한다. 


 ‘우리 집’


글자를 본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혼자 살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뭐가 문제지?


 “그럼 다른 곳으로 가자. 오는 길에 편의점이 있던데 그리로 가는 건 어때?”


나는 잠시 고민한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나를 감싸지만, 그의 말도 이해가 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초여름 노을이 쏟아지는 거리로 발을 내딛는다. 



어제 씨리얼과 우유, 컵라면을 사기 위해 이 편의점에 왔었지. 

오늘은 다행히 어제처럼 음악이 크게 틀어져 있지는 않았다. 

우리는 유리창과 맞닿아 있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내 앞에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있다. 

궁금한 것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과 마주한 것이 꽤 오래전이라 더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그는 오히려 느긋하다. 

앞에는 콜라가 놓여있고, 등을 의자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본다. 

아니다. 내가 아니다. 

그는 시선이 닿은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사물을 바라본다. 

내가…… 소리에 이름을 새겨 넣는 것처럼. 

그래, 알겠다. 그는 시력을 받았구나. 

할아버지의 눈이라는 말이 바로 이거구나.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편지…… 읽어봤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손에 잡고 있던 휴대폰에 글자를 입력한다. 


 ‘첫 번째 편지는 젖어서 읽을 수가 없었어요.’


이번에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글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


그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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