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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Aug 23.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편지

아이러니하다. 얼마 전까지 듣지 못했던 내가 지금은 귀를 기울이고 있다니. 

내가 갖고 있는 감각 중 가장 발달하지 못했던 청각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우습다. 

그가 나를 잡으려 했다면 도망치기 전에 손을 뻗었을 것이다. 

그는 나를 붙잡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슬며시 침대를 빠져나와 조용히 방문을 연다. 

아까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실 가운데에 던져놓은 에코백과 우편물이 보인다. 

얼마나 급하게 던졌는지 에코백 옆에 시리얼 박스와 컵라면이 굴러다니고 있다. 

우편물 역시 펼쳐져 있다. 

이렇게 보니 우편물이 꽤 많이 쌓여 있었나 보다. 


나는 조심히 발끝으로 걸어 나와 거실 창문을 바라본다. 

좁은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다. 

현관문을 살펴봤지만 내가 걸어 놓은 잠금장치는 그대로다. 

그가 혹시 현관문 밖에서 기다리진 않을까?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나에게 해코지하진 않을까 싶은 생각에 외시경으로 밖을 내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지만, 그와 동시에 궁금증도 커져갔다. 

터벅터벅 걸어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흩어진 우편물을 주섬주섬 챙겼다. 

각종 고지서들, 광고지. 그리고 그사이에 보이는 편지 봉투. 

우와. 요즘도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있나? 

처음에는 편지를 가장한 광고지라고 생각했는데 봉투 겉면에 서툰 글씨로 쓰여 있는 내 이름이 보였다. 

 ‘서파랑’

받는 사람 주소도 없고, 보내는 사람 주소도 없이 이름만 적혀 있는 편지 봉투. 

 ‘함석헌’


누구지? 함석헌? 처음 듣는 이름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이름으로 보낸 편지가 한 통이 아니었다. 

두꺼운 우편물 속에 네 통이나 이 사람이 보낸 편지가 섞여 있었다. 

주소가 없다는 것은 이 사람이 직접 우편함에 넣었다는 말인데. 

여자 이름은 아닌 것 같고……. 대체 누구지? 


나는 컵라면을 끓일 물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우편물을 분류했다. 

광고지는 모두 버리고 고지서는 대충 훑어본다. 

그러자 남은 것은 함석헌이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뿐이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한 통을 뜯어본다.      


 ‘전에 보냈던 편지가 아직도 우편함에 있는 걸 봤어. 아직 집에서 나오기 힘든 거니? 

전에도 말했지만 나도 너와 같은 일을 겪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이제 나에게 ‘보이기’ 시작해. 너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 네가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어. 

매일 집 앞에서 기다릴게.’     


후루룩. 얼마 만에 맡아보는 라면 냄새인지. 

다른 냄새보다 라면 냄새는 진하고 멀리 펴지는 것 같다. 

음…… 컵라면을 먹으며 읽은 편지는 굉장히 아리송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전에 보낸 편지……. 

나는 아직 뜯지 않은 세 통의 편지를 바라보았다. 

지금 읽은 이 편지가 가장 첫 번째로 보낸 편지가 아니라는 말인데. 

나는 다른 편지를 뜯어보았다.     


 ‘어쩌면 너는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어. 나도 잘 모르겠어. 

너에게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나처럼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다음 주에 의령으로 내려갈 거야. 너와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헤어질 것 같아 아쉽지만 

내가 더 이상 이곳에 있기는 어려울 것 같아.’     


무슨 말인지 더 알 수가 없다. 

의령? 경남 의령을 말하는 건가? 의령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왜? 대체 왜? 나를 만나려고? 

편지를 잃을수록 종잡을 수가 없다. 

남은 편지를 봤다. 

그중 하나는 물에 젖었다가 말랐는지 종이가 울고 있다. 이거다. 

이 편지가 아리송한 모든 부분을 해결 해 줄 것이다. 

봉투를 열자 짧은 편지와 인쇄물이 들어있다. 

인쇄물 역시 물에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있다. 

인쇄물은 인터넷 기사를 프린트한 것이다.     


 ‘의령 버스 사고로 승객 대다수 사망.’


헤드라인은 다행히 읽을 수 있었지만, 기사는 잉크가 번져 읽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중간, 중간 보이는 글자들만으로도 내용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의령 외곽에서 버스 추락 사고가 있었고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 

유일한 생존자는 함모군. 19세. 

유일한 생존자라는 단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방으로 달려가 컴퓨터를 켠다. 

붕붕거리는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마침내 화면이 켜지고 나는 다급히 마우스를 잡고 인터넷을 연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를 입력하는 내 손이 덜덜 떨린다. 


 ‘관악구 장애인지원센터 가스 폭발 사고’


검색된 기사를 대충 훑어보다가 그중 하나를 클릭한다. 


 ‘관악구에 있는 장애인 지원센터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센터를 이용하던 

방문객 대다수가 사망하고…… 건물은 폭발 흔적으로…… 유일한 생존자는 서모양(19세)으로 

현재 인근 대학 병원으로 이송 후……'

  

마우스를 잡았던 손이 떨어진다. 

긴장으로 굳어졌던 등과 어깨가 힘없이 뒤로 기대어진다. 


나는 유일한 생존자였다.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이 들었던 말인가. 

내가 청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즉각적으로 알아냈다. 

사고 당시 상황을 듣고 싶어 했지만, 그들이 봤을 때 나는 별 쓸모가 없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나는 이모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숟가락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절망에 빠졌으므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시 인터넷에 집중한다. 

검색 창에 ‘의령 버스 사고’를 검색한다. 

기사 작성 날짜를 보니 사건은 내가 사고를 당하기 1년 전 겨울에 일어났다. 

의령 외곽을 돌던 시내버스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산길 아래로 추락했다. 

당시 버스에는 운전사를 포함해 총 아홉 명의 승객이 있었고, 대다수가 노인이었다. 

마침 장날을 이용해 의령장에 나왔던 노인들. 모두 사망했다. 

단 한 사람 함모군만 제외하고. 


함모군은 할아버지를 따라 의령장에 나왔다 봉변당했지만 사고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기사에는 오직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왜? 그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왜 기억하지 못하지? 나처럼 정신을 잃었었나?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 봉투 옆에 있는 편지를 집어 든다. 

편지 역시 군데, 군데 잉크가 번져 있다.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어쩐지 마음이 아파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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