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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Aug 21.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

 잊고 있었다. 시리얼이 떨어졌다는 것을. 

주문했어야 하는데 어제 집 앞에 검은색 우산을 들고 서 있던,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남자를 보고 혼자 놀라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시간에 일어나서 휘적휘적 주방으로 걸어가 비어있는 

시리얼 박스를 보자 그제야 기억이 났다. 


급히 인터넷에 접속해 시리얼과 우유를 주문하려는데 하필 배송 시간 예약이 모두 마감됐다. 

허탈하다. 

이모를 잃고 살아있는 것을 증오했는데, 먹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니. 


……오늘이 주말이었구나. 

대형마트 배송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시간의 개념에 가까이 다가간 모양이다. 

어제처럼 비가 오려나?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 먹을 것을 사와야 할 것 같은데. 

거실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커튼이 쳐져 있어 날씨를 알 수가 없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창문으로 걸어가 커튼을 조금만 열어본다. 

밝은 햇살이 커튼 틈으로 파고든다. 


예쁘다. 이모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고, 나는 햇살 가득한 날을 좋아했지.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하늘은 더없이 화창했고, 내리쬐는 햇살 역시 반짝일 만큼 따사롭다.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싶어 커튼을 치고 창문 가까이에 선다. 

기분이 좋다. 이렇게 햇볕을 쬐고 있으니 시리얼을 사러 밖으로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간 김에 다른 것도 좀 사 올까? 

한참 동안 시리얼만 먹고 있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11시 47분을 가리키고 있다. 

점심시간이네? 잘 됐다.      


 빌라 3층 건물에서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동안 움직이지 않고 집에만 있었던 데다 먹은 거라곤 항상 시리얼과 우유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내 손에는 장바구니로 쓰일 에코백과 지갑을 들려있다. 

얼마 만에 외출인지 지갑을 찾는 데 한참 걸렸다. 

퇴원하고 집에 왔을 때는 이모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아무 소리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내 발소리가 들린다. 

작은 층계참에서 울리는 내 발소리. 

마치 걷지 못했던 사람이 다리를 얻은 것처럼 나 또한 타닥타닥 울리는 내 발소리가 신기하고 새삼스럽다. 


1층 현관에 설치된 우편함은 그동안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편지가 가득 차 있다. 

어차피 고지서들일 테지. 

눈길 한번 쓱 주고 현관을 향해 걷는다. 나중에 정리하면 돼. 나중에. 급한 것도 없잖아. 

현관을 나와 햇빛이 쏟아지는 골목길로 내려서자 현기증이 난다. 

강한 햇살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온다. 

그런데도 기분이 한층 좋아진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햇빛인지. 

지금이 몇 월인지 모르겠지만 날씨는 초여름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반팔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 내려앉은 햇살이 아직 따뜻하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도 기분이 좋다. 

5월 말? 6월 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초여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골목길을 따라 버스정류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차들이 조용히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도 들린다. 가끔 개가 짖는 소리가 난다. 

나는 이 모든 소리를 음미하듯 천천히 되새기며 골목길 한쪽에 붙어 걷고 있다. 

밖에 나오자 오히려 나른하다. 

밝은 햇빛이 모든 것을 여유롭게 만드는 모양이다. 

몇 분 걷자 저 앞에 편의점이 보인다. 언제 생겼지? 원래 편의점은 버스정류장 쪽으로 더 걸어가야 했는데? 

내가 집에 박혀 있는 사이 노란색 간판을 단 편의점이 하나 더 생겼구나.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편의점을 바라보다가 몇 발짝 뛰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약한 에어컨 바람. 생각보다 커서 조금 놀란 음악 소리. 

바코드 찍는 소리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소리와 똑같구나. 

나는 시리얼과 우유를 장바구니에 넣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오랜만에 컵라면과 김밥도 샀다. 


 “할인이나 적립카드 있어요?”


나는 가로로 고개를 젓는다. 

소리가 들리지만 나도 모르게 유심히 점원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보 같아. 이제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쑥스럽고 창피하다. 

내가 그동안 타인의 입술을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문을 열자 ‘딸랑’하며 작은 방울 소리가 난다. 

지금까지 내가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이런 소리가 났구나. 

시선을 올려 문에 달린 작은 방울을 바라본다. 

집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햇빛을 느끼려 노력한다. 

노출된 팔의 피부가 햇볕에 살짝 탔으면 좋겠다. 

어깨에 멘 에코백을 잡고 현관에 한 발을 올려놓는다. 

짧은 외출이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타닥타닥. 

간격이 짧고 체중이 실린 묵직한 발소리. 

누군가 뛰어가는 모양이다. 

조금 전까지 햇빛 아래에 서 있었는데 나는 발길을 돌려 그늘진 빌라 1층으로 들어선다. 

손을 들어 우편함에 꽂혀 있는 편지들을 잡는다. 

양이 꽤 많다. 한 손에 가득 잡힌다.


 “서파랑.”


처음에는 그게 나인지 몰랐다. 

남자 목소리. 등 뒤에서 들리는 가쁜 남자 목소리. 


 “서파랑!”


빌라 입구에서 크게 울리는 소리.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처음보다 커졌다. 

우편함을 마주 보고 있던 내 발끝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저 이름은 내 이름이다. 누구지? 나를 부를 사람이 없는데. 

나는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본다. 

얼굴은 아마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


 “서파랑. 맞지?”


그다! 어제 검은색 우산을 쓰고 빌라 입구에 서 있던 남자.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놀란 나는 그에게 벗어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계단을 올랐다. 

3층 집에 도착해 열쇠로 문을 열 때는 손이 덜덜 떨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문을 열고 재빨리 집에 들어선 후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세게 닫는다. 

두 개의 잠금장치가 나를 지켜주면 좋으련만.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나는 방으로 뛰어간다. 


어제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로 숨어든다. 

그리고 귀를 기울인다. 

방문 밖에서, 현관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쿵쿵거리며 뛰어 올라오는 그의 발소리나 쾅쾅거리며 현관문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서. 

잠시 그렇게 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누구지? 나를 어떻게 알지? 어제 내가 본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우리 집을 그리고 나를 올려다본 것이다. 

이불을 둘둘 말고 덜덜 떨며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가 그냥 갔을까? 

내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쿵쿵 뛰고 있는 내 심장 소리, 작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전부다.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거나,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 

두렵지만…… 호기심도 생긴다. 

그는 누구이고 나를 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그리고 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럼에도 두려움에 거실로조차 나갈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이불을 둘러싼 채 웅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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