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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Oct 01.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생존자

 버스가 산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병원에서 깨어났다. 생존자는 오직 한 명. 그 외 운전자 포함 모두 사망. 

사람들은 생존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나는 박수를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 

단지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이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버스 의자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한 손으로는 앞좌석의 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할아버지를 찾았다. 

내 손을 스치고 앞으로 떨어진 것이 할아버지인지 다른 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됐든 모두 앞쪽으로 쏠린 채 떨어졌다. 

버스는 뱅글뱅글 돌아 한참이나 떨어졌고, 의자 사이에서 여기저기 부딪히기는 했지만, 

몸이 튕겨 나가지 않은 나는 끝내 살아남았다. 


어쩌면 그들과 달라서 운이 따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볼 수 있는 그들은 버스가 전복되고 추락하는 과정을 전부 눈으로 보며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볼 수 없는 사람이기에 시각적인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기억도 나질 않는다. 

병원에서 깨어나 보니 머리를 비롯한 몸 곳곳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뇌진탕, 고관절과 손목 골절. 갈비뼈 골절.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만 크게 숨을 쉬어도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시력이었다. 

항상 깜깜했던 세상. 

나는 그 세상에서 살아왔고, 그것이 깜깜하다는 것도 몰랐다. 

그 어떤 빛도 허용하지 않았던 내 세상에 작은 빛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점점 여러 색깔의 옷을 입고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허락도 없이 형태를 갖추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쓸모없던 내 눈동자도 빛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병원이었지만 나는 압도됐다. 

다소 불분명하긴 해도 암흑이 아니라 형광등이 달린 하얀 병원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깜박인다. 깜박여도 그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헛것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었더니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빛이 번진 것처럼 뿌연 세상. 

내가 올려다보던 천장 가장자리로 무엇인가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선을 내리자 뿌옇고 구불구불한 어떤 형체가 움직인다. 

사람들은 모두 이런 걸 보는 걸까? 


 “일어났네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지금 과장님 모시고 올게요.”


형체가 왔던 길을 따라 사라졌다. 

그 사이 눈을 굴리지만 모두 똑같은 풍경뿐이다. 

하얀색. 방금 사라졌던 형체와 비슷한 형체 몇이 줄줄이 들어온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요?”


나는 비교적 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못 알아듣는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어디 있어요?”


웅얼대며 뭉개진 발음. 

내가 들어도 알아듣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말하면 안 돼요. 당분간 안정을 취해요.”     


깜깜했던 세상에 뿌연 빛이 들더니 집에 돌아오자 점점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집에는 나 혼자. 아무도 없다. 

나중에야 버스 사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할아버지와 이웃집 아주머니 모두 죽었다. 

동네 꼬마가 앞 못 보는 나에게 돌팔매질을 하면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약을 발라주던 아주머니.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 

모두 죽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죽었을까? 이런 생각들이 한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나는 왜 살아남아야 했을까? 고아가 된 나를 거둬준 할아버지는 왜 죽어야 했을까? 


한겨울 집에는 한기가 들고, 나는 냉기가 도는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소문을 들었는지 보내준 기부 물품들이 작은 부엌을 가득 채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지금에야 먹고 싶었던 컵라면을 매일 지겹도록 먹는다. 

그리고는 재빨리 이불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간다. 

그렇게 스스로를 가뒀다. 


이 시기의 나에게 차고, 넘치는 것은 시간이었다. 

가끔은 이불에서 벗어나 할아버지와 살던 집 안을 둘러보기도 했다. 

매일 만지고, 걸어 다녔던 집이었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눈을 감으면 익숙한 곳이지만 눈을 뜨면 낯선 곳. 

나는 할아버지의 옷을 만져보고, 냄새를 들이마시기도 하고, 매일 함께 잠을 자던 방바닥에 

볼을 대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나까지 삼대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그 사실을 느낄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그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종일 먹은 거라는 컵라면 한 개. 밖은 아직 어두웠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시계는 있었지만 난 시계 보는 법을 몰랐다. 

그때의 나는 단지 보는 것뿐이지 그것들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밝은 낮에 비해 더 차갑고 서늘해진 공기의 흐름으로 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밤은 모든 것들의 색을 훔쳐 갔다. 

빛을 받아 다채롭고 영롱하던 색들은 밤의 어둠에 빛과 색을 잃었다. 

예전의 나와 같다. 색을 몰랐던 나.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웅크린 채로 누워있었다. 

내 옆에는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낡은 베개가 놓여있었다. 

이불을 들추고 일어서자 베개 옆에 있던 사진들이 보였다. 

수백 번은 들여다봤을 법한 사진들. 


나는 손을 뻗어 사진을 잡았다. 젊은 할아버지와 아직 어린 아버지. 

누가 찍었는지 모르지만 둘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정면이 아닌 왼쪽 옆얼굴이 찍혔다. 

사진은 원래 이렇게 찍나? 문득 궁금해진다. 

다른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니 모두 비슷하다. 정면을 찍은 사진은 거의 없다. 

대부분 45도 각도로 옆을 보고 있다. 

여기에 뭐가 있기에 다들 여길 보고 있는 거지? 사진 한 귀퉁이를 손끝으로 긁어본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이미지가 겹친다. 

할아버지의 옆모습. 내 눈으로 본 장면. 

……아니다. 나는 할아버지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사고로 할아버지를 잃고 혼자 집에 와서야 완전한 시력을 찾았으니까. 


하지만 기억은 또렷하다. 짧은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확신한다. 

기억의 할아버지는 사진 속의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들었다. 그리고…… 다른 것이 없을까? 

그리고……, 그리고…… 머리카락이……. 다시 사진을 들여다본다. 

할아버지의 검은 머리카락.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짧고 흰 머리카락이었다. 

자꾸 연기처럼 사라지려고 하는 이미지를 잡으려 애쓴다. 

이 기억은 어디에서 왔을까? 대체 어디에서 봤을까? 

다른 감각에 집중하고 머릿속을 헤집다가 드디어 기억과 맞닥뜨린다. 

손에 무엇인가를 잡고 있었지. 

버스 사고가 난 날, 출발하는 버스에서 눈앞을 스쳤던 기억.



내 손에서 할아버지의 사진이 스르륵 떨어진다. 

나는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채 기억에 몰두한다. 정말일까? 내 기억이 맞는 걸까?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다. 

할아버지의 장례는 내가 시력을 회복하기 전에 이미 치러졌고, 그때 나는 병원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억은 대체 뭘까? 


혼란스럽게도 기억이 점점 명확해진다. 잠깐 스쳤다고 생각했는데 이미지가 또렷해진다. 

짧은 백발의 할아버지 옆얼굴. 

반대쪽에는 피를 흘리고 있었겠지. 아니면 사고로 얼굴이 뭉개졌거나. 

버스가 추락하고 나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버스 손잡이를 꽉 붙들고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신음을 들으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잡을 것을 찾아 미친 듯이 더듬었다. 


굴러 떨어지던 버스가 멈췄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내 앞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여전히 의자 사이에 쪼그리고 매달려있었다. 

그때 바로 앞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목소리. 무엇인가 날아와 내 앞에 떨어진 것은 할아버지였다. 

목소리를 알아듣는 순간 나는 오른손으로 앞을 더듬었다. 

할아버지를 내 옆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손이 채 닿기도 전에 버스는 한쪽으로 다시 기울기 시작했고, 곤두박질쳤다. 


그때 내가 할아버지를 봤던가? 아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맹인이 아니던가. 

그럼 이 기억은 대체 뭐지? 착각이라 할 수 없다. 그러기엔 사진에 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았나.


 

어두웠던 하늘이 밝아오고, 다시 빛이 들어도 나는 여전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빌어먹을 기억은 하루 온종일 나를 끌어내렸다. 

설명할 수 없는 기억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사이 내가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종일 멍하게 정신을 놓고 있다. 

내가 발견한 이 기억이 지금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없는데.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연다. 지금이 몇 월인지 오늘이 며칠인지 모르겠다. 

눈을 들자 어두운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붉은 하늘이 보인다. 

그 모습이 아름답고 신비로워 추위도 잊고 한동안 들여다본다. 

나중에야 그것이 늦겨울의 노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온통 붉은색으로 물드는 여름의 노을에 비해 더 쓸쓸한 겨울의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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