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청
컴퓨터실에서 모든 자료를 긁어모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 떠 오른 이미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잔상이었기 때문에 자료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석헌은 지난 일을 되짚어 봤다.
의령의 버스 사고. 그리고 서울의 장애인지원센터 가스 사고.
검색하던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톡톡 두드린다.
이 여자아이. 서모 양. 유일한 생존자.
나와 같다면 이 아이도 뭔가를 보거나, 듣거나, 느끼지 않았을까?
“그렇게 너한테 오게 된 거야. 다행히 네 이름이 특이해서 금방 찾을 수 있었어.”
긴 이야기를 마친 석헌이 파랑을 마주 보았다.
콜라는 이미 비어있었고, 밖은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파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틀렸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파랑은 석헌이 말한 일어나지 않은 사고에 대해 그 무엇도 느끼거나, 보거나, 들은 것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엄지손톱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없어?”
파랑은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아무것도. 미안해요.
석헌은 상체를 뒤로 움직여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어쩔 수 없지. 꼭 나랑 같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석헌이 빈 콜라 캔을 들어 흔들었다.
콜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벌떡 일어나 휴지통에 캔을 버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사고가 나기 전에 너랑 헤어졌다가 다시 센터로 돌아왔던 여자는 누구야?
아는 사이지?”
느닷없는 질문에 파랑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석헌이 어찌할 사이도 없이 눈에 눈물이 맺힌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파랑을 보고 석헌은 당황했다.
급히 편의점에 있는 휴지를 몇 장 챙겨주고는 파랑의 팔을 잡고 대답을 다그친다.
“누구야? 그 사람한테 받은 게 뭐야?”
-귀요. 저는 원래 듣지 못했어요.
파랑이 휴대폰 자판으로 글을 써서 석헌에게 보여준다.
석헌은 휴대폰과 파랑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듣지 못했던 거구나. 그럼 연습하면 말을 할 수 있어.
혹시 사고 전에 뭔가 보이거나 들은 건 없어?”
파랑은 곰곰이 생각했다. 보이거나 들은 것? 석헌이 말하는 환영 같은 것은 당연히 모른다.
그렇다면 들은 것?
-사고 나기 전에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하지만 착각이라고 생각했구나. 들릴 리 없으니까.”
파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야? 그 여자? 엄마?”
-이모.
휴대폰의 글자를 확인한 석헌이 천천히 뒤로 움직여 등을 의자에 기댔다.
“예전에 시설에 있을 때 후원자 덕분에 청각 수술을 받은 아이가 있었어. 그 아이는 매일 말하는 연습을
했었지. 3년 정도 걸리더라. 너는 더 빨리 연습해야겠다.”
내가 말을? 파랑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석헌을 바라보았다.
“이모한테 귀를 받았잖아. 내가 모든 색과 형태를 눈에 새기려고 바라보는 것처럼
넌 예상치 못한 소리가 나면 움찔거리면서 반응하더라. 그게 무슨 소리인지 확인하려고 쳐다봤잖아.”
파랑이 눈을 깜박였다.
석헌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어렵게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어. 넌 분명 말 할 수 있을 거야.”
우리라고? 이 이상한 만남이 계속 이어질 거라 생각하는 건가?
“너에게도 너만의 인생이 있겠지. 물론 평탄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나보다 굴곡진 인생이
아니었다면 이제 일어서야 해. 우리는 달라져야 해.”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 외 영상매체를 보며 파랑은 말하기 연습에 몰두했다.
석헌의 말이 사실일지 알 수 없지만, 말을 하고 싶다는 열망은 파랑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꺽꺽거리며 듣기 싫었던 목소리도 연습을 거듭하자 조금씩 사람 같은 소리가 나기도 했다.
아직은 단어와 단어뿐이고 문장을 매끄럽게 구사할 수는 없지만, 파랑은 노력했다.
그럴수록 혀와 입술을 사용하는데 능숙해졌다.
그리고 석헌이 말한 소리.
사고가 나기 전 파랑의 귀에 들렸던 쉭쉭 거리는 소리가 사고를 예고해 준 것이라면 또 듣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아주 작은 소리는 지나치기 쉬워 발음 연습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텔레비전도 켜지 않았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혹시 놓친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지만, 아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파랑과 이야기를 나눈 후 석헌은 금세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은색 비스토를 몰고 의령으로 내려갔다.
“말하는 연습 열심히 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연습 열심히 해서 다음에는 문자 말고 통화로 하자.”
석헌이 떠나기 전 웃으면서 파랑을 격려해줬다.
석헌을 만난 후 파랑의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매일 말하는 연습을 하고, 책도 읽고, 마트에 가서 물건도 샀다.
이불 속에 틀어박혀 있는 생활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가끔 석헌과 안부 문자도 주고받았지만, 사고에 대한 예견은 진척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늦장마가 기승을 부리나 싶었는데 지루한 장마가 지나자 살이 타들어 갈 것 같은 더위가 찾아왔다.
길었던 여름도 지나고 9월이 시작되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려나 싶을 때 일기예보에서 태풍 소식을 전했다.
그사이 파랑은 열심히 연습한 덕에 짧은 단어 정도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야, 어가 아닌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되자 파랑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문장까지 말하기는 벅찼지만, 더 연습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부풀었다.
“기차, 하나, 오……이.”
입 모양을 옆으로 길게 늘인다. “이…….” 목소리가 귀 안쪽으로 울리면서 오른쪽 귀가 간지럽다.
파랑은 대수롭지 않게 오른손을 들어 귀를 문질렀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여러 가지 소리가 겹쳐 들렸지만 한 가지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빗소리.
파랑은 고개를 들고 창문을 내다봤다. 더위에 문을 열어놓았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태풍 소식으로 수분을 머금은 바람만 가끔 불어왔다.
검은 밤하늘은 고요했고,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 들릴 뿐이다.
하지만 파랑은 빗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빗소리만 들린 것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소리도 들렸지만 무슨 소리인지 구별해 낼 수가 없다. 파랑은 휴대폰을 들어 석헌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소리가 들렸어요. 여러 소리인데 빗소리는 정확해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괜히 초조했다.
잠시 후 석헌에게 전화가 왔다.
“파랑아, 내 말 들리지? 맞으면 ‘응’이라고 대답하고 아니면 ‘으응’이라고 대답하면 돼. 알았지?
“응.”
“방금 소리를 들었어?”
“응.”
“빗소리?”
“응.”
“혹시 사람 소리는 안 들렸어?”
“응.”
“하……. 언제인지, 어디인지 알 만한 단서가 없을까?”
“…….”
파랑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 어쩐지 석헌에게 미안했다.
잠깐 들었던 환청을 다시 떠올려봤지만 설명하기 어려웠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새.”
“응? 새?”
“응.”
“새 소리를 들었어?”
“응.”
“새? 새가…… 지저귀는 소리?”
“으응.”
“아니? 아니라고?”
“응. 아니.”
“그럼 새가…… 뭘 할 때 소리가 나지?”
파랑은 답답한 마음에 전화인 줄 알면서도 왼쪽 팔을 위아래로 크게 휘저었다.
“나…… 나……날”
“날개?”
“응.”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소리?”
“응”
파랑은 반가워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파랑은 전화가 끊어진 것은 아닌가 싶어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석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랑은 재빨리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이틀 뒤에 태풍 영향권에 들어가. 내가 본 이미지랑 네가 들은 소리를 합쳐보면……
이건 산사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