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기울어지고 새들이 날아간다.
통화를 끝낸 석헌은 눈을 감았다. 기어이 이런 날이 온단 말인가.
석헌이 본 영상은 흙더미였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종을 사 온 날 차 뒷문을 잡았을 때 처음 보였던 이미지. 그것은 단지 흙더미였다.
하지만 사고임이 분명했다. 흙더미 뒤로 멀리 끊긴 도로가 보였다.
그래서 지진일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언제 일어날지, 어디에서 발생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파랑이 들은 소리. 빗소리는 폭우일 것이다.
폭우는 지반을 약화시키고, 마찰력을 감소시킨다.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간 소리 역시 산사태의 전조현상이다.
도시에서 자란 파랑은 모를 수도 있지만, 할아버지와 의령 산골에서 산 석헌은 알고 있다.
나무가 기울어지고 새들이 날아간다.
태풍과 산사태.
인명피해가 크겠지만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전국적으로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는데 모든 곳이 다 위험한 것은 아니다.
위치를 알려줄 단서가 있었으면.
전국이 태풍의 영향권에 들기 전 석헌은 비스토를 끌고 서울로 올라갔다.
파랑의 집 앞에 차를 세우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밖은 어두웠다.
석헌은 시동을 끄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막을 수 있을까?
혼자가 아닌 둘이라면 참사를 막을 수 있을까? 그곳이 어디든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
오래된 비스토가 둘을 데려다 줄 수 있을까?
막막했다.
석헌은 작은 짐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3층 파랑의 집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스무 살 여자아이가 혼자 사는 집.
정희 누나가 생각나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갈만한 곳이 없었다.
석헌은 무거운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본 건 흙더미였어. 여기 옆이 산이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멀리 떨어진 도로가 얼핏 보였는데
끊어져 있었지.”
석헌이 종이에 어설프게 그림을 그리며 설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줄 만한 이정표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내가 본 이미지에는 전혀 없어.
시골 어디를 가든 비슷한 풍경이 많을 거야. 너는 뭐 없어?”
석헌과 파랑은 작은 2인용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밖에는 돌풍이 불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베란다 문틈으로 바람이 파고드는 소리가 들린다.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있다.
서울은 조금 늦게 밤 10시부터 영향권에 접어들었다.
의령은 이미 몇 시간 전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봤어요. 들은 소리를.
파랑이 휴대폰으로 글자를 입력해 석헌에게 보여줬다.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게 있어?”
-빗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고, 멀리서 새 소리가 들렸어요. 날갯짓 소리요.
석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파랑이 말한 내용과 동일했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소리가 들렸어요. '쾅' 하고.
파랑은 소리를 떠올리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가로로 저으며 어수룩한 말투로 말했다.
“없어.”
“그리고는 없어?”
석헌의 말에 파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어쩔 수 없지. 일단 좀 기다려보자.”
석헌과 파랑이 있는 서울에도 폭우가 쏟아졌다. 비는 종일 내렸고 석헌은 뉴스에 매달렸다.
기상특보가 나올 때마다 주의 깊게 들었다. 하지만 어디라고 예상할 수 있는 뉴스는 없었다.
강원도와 경기, 경북 일대에 호우경보가 내려졌다.
석헌은 창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의령이 어찌 됐을지 궁금했다.
몇 안 되는 농작물이 다 비에 쓸려 내려갔을까?
문득 좋은 냄새가 난다. 석헌이 뒤를 돌아보자 주방에서 부산히 움직이던 파랑이 작은 오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금방 구운 빵이다. 빵 냄새는 집안을 가득 채우며 공기를 따듯하게 데워줬다.
파랑이 트레이에서 빵을 꺼내 접시에 옮겨 담더니 작은 식탁에 올려놓고 석헌을 바라본다.
와서 먹으라고 손짓한다.
“빵을 만들 줄 알아?”
파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멋쩍게 웃는다. 감미로운 빵 냄새는 긴장됐던 분위기를 다소 누그러뜨려 줬다.
파랑이 휴대폰을 들더니 재빨리 문자를 입력해 석헌에게 보여 줬다.
-아직 뜨거워요.
파랑은 휴대폰을 내려놓다가 돌연 행동을 멈췄다.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더니
석헌을 올려다봤다.
“왜 그래?”
석헌이 빵을 집으려던 손을 멈추고 파랑에게 말했다.
파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떨리는 손으로 내려놓은 휴대폰을 다시 잡더니 문자를 입력했다.
하지만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혹시 방금 들었어요?
“뭘?”
-뉴스요.
“뉴스?”
석헌은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작은 거실을 바라보았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걸음을 옮겨 리모컨을 잡고 볼륨을 올렸지만, 태풍에 관한 이야기만 나올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아까 들었던 내용이잖아. 뭐…… 다른 걸 들은 거야?”
파랑이 텔레비전 앞에 서 있는 석헌의 옆으로 다가와 같이 화면을 응시했다.
뉴스 진행자는 태풍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산사태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석헌이 파랑의 팔을 잡았다. 그때 석헌의 눈에 그것이 보였다.
약해진 지반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어마어마한 양의 흙과 나무가 쓸려와 인가를 덮쳤다.
깜깜한 밤하늘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토양에 휩쓸린 자동차 한 대가 마을 초입까지 밀려 나갔다.
입구에는 보기 드물게 마을 이름을 쓴 커다란 돌이 세워져 있었다.
밀려온 자동차가 아슬아슬하게 돌을 피했다.
<뱀나무 골>. 돌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뱀나무 골…….”
파랑이 석헌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들었어?”
파랑이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랑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 글자를 입력했다.
-뉴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들었어요. 일명 뱀나무골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고.
휴대폰을 본 석헌이 파랑에게 말했다.
“뱀나무 골이 어디인지 알아?”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울에서만 살았던 파랑은 뱀나무골이 어디인지 모른다.
파랑과 석헌은 각자의 휴대폰으로 뱀나무골을 검색했지만 정확한 지명이 아니라서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뒤지던 파랑이 석헌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오래된 신문 기사에서 뱀나무 골을 찾을 수 있었다.
‘예로부터 뱀나무 골이라 부르던 이곳은…….’
석헌은 재빨리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위치는 강원도 횡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