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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Oct 15.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산사태

 횡성으로 가는 동안 비스토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지 않기를. 한시라도 일찍 도착해 한 명이라도 대피시킬 수 있기를. 

하지만 내리붓는 비로 인해 시야가 막혀 가시거리가 짧아지고, 빗물에 길이 미끄러워 속도도 낼 수 없었다. 

다행히 도로는 한산했지만 그럼에도 비스토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리던 석헌은 마음이 급했지만,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주변은 더욱 어두워지고 차 안에는 삐걱대는 와이퍼 소리와 비가 차를 때리는 소리, 라디오 소리만이 

맴돌았다. 석헌이 사이드미러를 보다가 조수석에 앉은 파랑을 흘끔 쳐다봤다. 


 “긴장 안 돼?”


석헌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파랑이 흠칫하더니 석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안 된다니 다행이네. 석헌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사실 파랑은 긴장이라기보다 놀라움이 앞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처음 석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사를 진지하게 말하는 석헌에게 파랑은 차마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내심 할아버지를 잃은 충격이 컸나보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던 눈이 시력을 찾은 것도 사고 당시 머리를 부딪치면서 죽었던 시신경이 살아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파랑의 청력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 말고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그것도 앞으로 일어날 특정 사고에 대해서만?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고는 매일, 어디서나 일어난다. 

뉴스만 틀어도 온종일 사고가 일어나지 않던 날이 있던가?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모르는 사고는 어디에선가 항상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석헌이와 파랑이 보는 사고는 대체 무슨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정말 사고를 막기 위한 것일까? 

그렇다면 한 명의 생존자는 왜 남겨두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파랑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념이 너무 커서 파랑은 지금 사고를 막기 위해 횡성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본 석헌은 파랑이 침착하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일어날까?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던 비스토가 원주를 지나 횡성으로 들어섰다.      


횡성으로 들어선 후에도 한참을 달려 비스토는 외곽에 있는 2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다. 

여주를 지나자 하늘에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와이퍼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비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골길로 접어들자 곳곳에 나무가 쓰러져 있기도 하고, 흙이나 돌이 떨어져 있기도 해서 

속도를 내기 더욱 힘들었다. 도로에 가로 누워있는 나무를 치우기 위해 처음 몇 번은 우비를 입고 벗었지만, 그것도 여의찮아 나중에는 둘 다 우비를 입은 채 차에 탔다. 

할아버지의 차이긴 하지만 어차피 오래된 차가 아닌가. 


운전을 하던 석헌이 돌연 차를 멈췄다. 

파랑은 또 도로에 누워있는 나무를 치워야 하나 하는 생각에 안전벨트를 풀었다. 

뱀나무 골까지는 앞으로 10분 정도 더 가야 했다.


 “잠깐만.”


석헌이 내리려는 파랑의 팔을 잡았다. 

파랑이 안전벨트를 손에 잡은 채 석헌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할 것 같아.”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는데? 차로 10분 거리라면 걸어서는 한참 더 걸릴 것이다. 

파랑의 의아한 표정을 본 석헌이 전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비스토의 전조등은 어둠과 쏟아지는 비로 인해 멀리까지 비추지 못했다. 

전조등의 빛은 불과 1미터 남짓 비추고 있었는데 그 빛이 끝나는 곳에는 더 이상 도로가 없었다. 

남은 옅은 빛으로 보이는 것은 끊긴 도로 뒤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흙탕물이었다. 

갈수록 경사진 이 도로의 아래쪽에 비스토가 서 있다. 

도로는 중간에 유실되었고, 경사가 더 높은 반대쪽 도로에서 흙탕물이 흘러오고 있었다. 

흙탕물은 유실된 도로로 인해 비스토가 서 있는 곳까지 흘러오지 못하고 

끊어진 도로에서 마치 폭포처럼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반대차선 일부만 붙어 있었는데 이곳으로 물이 흘러들어 도로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차를 뒤로 빼자. 그리고 걸어가야겠어.”


석헌의 말에 파랑은 고개를 저었다. 

유실된 도로와 넘쳐흐르는 토사와 빗물을 보자 그제야 상황이 현실로 다가왔다. 

석헌의 계획은 위험해 보였다. 파랑이 안 된다는 뜻을 담아 석헌을 바라보았다. 


 “알아, 위험해 보이는 거. 하지만 우리는 사고를 미리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가서 사람들을 구해야지.”


말을 마친 석헌이 후진기어를 넣고 차를 막 움직이려고 할 때, 멀리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땅이 떨리더니 바로 눈앞에서 도로 일부가 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석헌은 클러치를 밟고 급히 차를 후진시켰다. 

파랑은 두려움에 주먹을 쥐었다. 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반대편 차선 안쪽에 차를 세우고 석헌이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었다. 


 “트렁크에 라이트가 있을 거야. 작긴 한데 없는 것 보단 나을 거야.”


비닐 구겨지는 소리를 내면서 석헌이 서둘러 차에서 내려 트렁크로 향했다. 

파랑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유실된 도로 끝에 간신히 이어진 도로를 걸어 둘은 끊어진 도로 맞은편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작은 라이트에서 빛이 흘러나왔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퍼붓는 비로 라이트는 멀리 비추질 못했다. 

밤인데다 내리꽂히는 차가운 비 때문에 둘의 체온은 점점 떨어져 갔다. 

하지만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한동안 칩거 생활을 했던 파랑의 체력은 석헌에 비해 월등히 떨어졌다. 


산에서 흘러내려 쌓인 토사에 발이 빠지고 퍼붓는 비로 눈도 뜨기 힘들었지만, 

석헌은 파랑을 다독이고 끌어서 함께 걸어갔다. 중간에 유실된 도로가 있어 이들은 길을 찾아가거나 

그마저도 여의치않을 때는 서로의 손을 잡거나 나무를 잡고 위험한 산행을 해야 했다. 

평소라면 더 빨리 도착했을 거리를 이들은 한참이나 걸려 도착했다. 


저 멀리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포장된 도로는 U자처럼 앞으로 쭉 뻗었다가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도로가 유실되지 않았다면 마을 입구로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인적이 없는 길에서 드디어 인가에 도착한 모양이다. 

가로등 불빛 한쪽 끝에 환영에서 보았던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던 큼직한 돌이 보이기 시작했다. 


석헌은 급한 마음에 거의 뛰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석헌과 파랑이 도착한 길은 마을 입구의 뒤편이었다. 

석헌은 숨을 몰아쉬며 몇 걸음 더 뛰었다. 뒤에는 파랑이 따라오고 있었다. 

길을 따라 크게 돌아 뛰어가자 라이트가 흔들렸다. 

그리고 흔들리는 라이트 불빛에 돌의 옆면과 자동차 일부가 비춰졌다. 


석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리도 점점 느려졌다. 

자동차! 환영에서 본 자동차.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손에 들고 있던 라이트 빛의 각도가 달라졌다. 

마을 초입에 세워진 <뱀나무 골>이라고 쓰인 커다란 돌. 그리고 그 돌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자동차. 

자동차는 토사에 휩쓸려 왔는지 바퀴 아래 흙과 나무들이 뒤엉켜 앞 범퍼가 들린 채로 경사진 채 서 있었다. 들린 앞 범퍼는 찌그러져 있었다. 


라이트를 들고 있는 석헌의 손이 떨려왔다. 서둘렀지만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어느새 파랑이 뒤에 다가왔다. 파랑도 라이트에 비친 자동차를 보았을 것이다.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 석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을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119에 신고해.”


파랑이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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