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그냥…… 겨울에 흔히 볼 수 있는 노을일 뿐이야. 하지만 나한테는 좀 달랐나 봐.
일어나라고 채근하는 것 같았어.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됐는데
지금 방구석에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 후로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했지. 공부를 했어. 여러 가지. 색깔의 이름도 알고 싶었고, 숫자와 글도
쓰고 싶었어. 내 옆에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더 쉽게 공부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지.
혼자 해야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파랑은 석헌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지금 그는 아픈 일을 겪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분하고 의연해 보였다.
“모든 것이 신기했지.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내 경험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할아버지가 죽고
내가 볼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눈을 주셨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하지만 답이 없는 질문일 뿐이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지. 그렇게 지내다가 작년 가을에 그게 다시 보이기 시작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가 바뀌어 있었다.
석헌은 글을 읽고 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계절이 바뀌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 솜털처럼 몽글몽글하게 자라나는 목련, 조금씩 길어지는 해.
차갑기만 한 겨울바람이 아니라 봄 내음을 실어 나르는 봄바람.
날씨가 따뜻해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여름은 또 달랐다. 뜨겁게 내리쬐며 작열하는 태양, 짙은 녹음과 어우러지는 작은 들꽃, 집 뒤에 심겨 있는
빨간 앵두. 깜깜한 밤하늘과 대조적으로 반짝이며 쏟아질 것 같은 무수히 많은 별.
색이란 이렇게 다채롭구나. 황홀하고 아름답구나.
석헌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겐 너무 흔한 일상이지만 석헌에게는 달랐다.
먹음직스러운 앵두의 빨간색, 만지고 싶은 들꽃의 노란색, 기운을 돋게 만들어주는 나뭇잎의 초록색.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하늘.
마을에서도 외따로 떨어진 할아버지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석헌은 모든 것을 흡수하고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바람이라고는 하지만 뜨거운 열기의 흐름뿐인 여름 바람이 지나가고 나니 이제 제법 시원한 가을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석헌은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쌀도 남아 있고 면사무소에서 주기적으로 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혼자 먹기에는 넉넉했다. 뽀얀 쌀뜨물이 냄비에 찰랑거린다.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리고 불을 켠 뒤 낡은 냉장고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그때 이미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웅크리듯 누워있는 여자아이. 당시 석헌은 알지 못했다.
어느 텔레비전에서 본 영상이라 생각했다. 최근에 본 드라마에 나온 장면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미지는 연기처럼 흩어졌고 석헌은 금세 잊어버렸다. 냉장고를 열고 몇 없는 반찬들을 확인했다.
그날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누웠다. 석헌의 잠자리 옆에는 항상 할아버지의 베개가 놓여있다.
석헌은 잠들기 전 할아버지의 베개를 손으로 톡톡 쳤다.
그때 다시 이미지가 보였다. 더욱 선명하게.
여자아이는 여전히 자욱한 연기 속에 누워있었다. 청바지와 연한 노란색 상의를 입고.
근처에는 주방 도구처럼 생긴 것들이 나뒹굴고 있다.
이미지는 석헌의 머릿속에 각인 된 채 사라졌다. 뭐지? 이런 장면을 어디에서 봤더라?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이틀 뒤 간소한 저녁밥을 먹으며 석헌은 텔레비전을 켰다. 7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서울의 한 장애인지원센터에서 가스 폭발이 일어났다.
생존자 현재 한 명. 그 외 모두 사망.
다행히 방문객이 많지 않았지만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니.
석헌은 숟가락을 든 채 화면을 응시했다.
현장은 참혹했다. 연기, 콘크리트 조각들. 그리고 어디인지 모르지만, 바닥에 흩어져 있는 주방 기구들.
거품기와 고무 주걱.
석헌은 눈을 깜박였다. 이 장면…… 어디에서 봤지?
텔레비전 화면으로 송출되는 장면은 이상하게 낯익었다.
저게 다가 아닌데? 뭔가 더 있었는데? 그게 뭐였지? 머릿속을 헤집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가만. 생존자 한 명? 장애인지원센터?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정수리가 싸하다.
유일한 생존자라는 서모 양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 후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
……서모 양? 여자아이?
나이가 많은 여자를 이렇게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곳은 서울이다.
석헌이 머물고 있는 의령과는 너무 먼 곳이고, 석헌은 한 번도 서울에는 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낯익지?
이상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석헌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석헌은 서울과 멀리 떨어진 의령이 있지 않은가.
이송됐다는 인근 병원도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서울에 병원이 어디 한, 두 군데여야지. 찝찝하지만 잊기로 했다.
내가 본 환영이 저 사고라고 꼭 집어 말할 수도 없다. 게다가 사고는 이미 벌어졌다.
내가 알았다 한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내 마음대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사고가 나고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석헌은 우연히 한 신문사에서 공개한 CCTV 영상을 보게 됐다.
화질이 아주 안 좋은, 누가 누군지도 구별할 수 없는 영상.
하지만 그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색으로만 구분이 가능한 그 영상에서 한 여자아이가 어떤 여자와 헤어지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두 여자 모두 청바지를 입고, 지원센터로 들어가는 여자아이는 연한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30분쯤 뒤 헤어졌던 여자가 다시 장애인지원센터로 들어가는 장면이 녹화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스가 폭발하면서 벽이 박살 나는 장면이 영상에 찍혔다.
청바지와 연한 노란색 상의를 입고 있던 여자아이. 석헌은 침을 삼켰다.
환영에서 본 그 여자아이와 같은 옷. 뉴스에서 나온 사고 당시 상황.
이 여자아이가 바닥에 누워있었다. 유일한 생존자. 나와 같은 유일한 생존자. 그리고 장애인지원센터.
아니다. 이건 우연일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렇지만 시력을 되찾기 전에, 사고가 나기 전에 할아버지의 얼굴을 환영으로 보지 않았나.
하지만…… 개연성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쳐두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다른 드라마나 영화와 착각했나 보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지나갔다.
석헌은 그사이 운전면허를 땄다. 할아버지 집에 세워둔 오래된 비스토를 스스로 운전하고 싶었다.
시설에 머물렀을 때 할아버지를 만나 이 차를 타고 시설로 갈 때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할아버지가 나이가 들고 무릎이 아파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게 됐을 때, 차를 팔까 고민도 했었지만
이런 쇠붙이 팔아봤자 얼마나 된다고, 여차하면 다시 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겨뒀던 차다.
털털거리고 삐걱거리지만, 그럭저럭 시내 주행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정희 누나가 죽은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1년이 지났다.
계절은 또 흘러 해가 바뀌고 다시 봄이 왔다. 해도 제법 길어졌다.
석헌은 스물한 살이 되었다.
올해는 할아버지 대신 농사를 지어볼까 싶어 의령장에 가서 모종을 사기로 했다.
버스를 타는 것이 아직은 두려워 비스토를 끌고 의령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창문을 열자 봄바람이 들어와 얼굴과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기분이 좋았다.
작은 번화가를 지나자 뜨문뜨문 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이 보호구역보다 노인 보호구역이 더 많은 곳.
석헌은 얼룩덜룩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운전대를 잡고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보지 못해 바로 앞의 장애물도 피하지 못하던 내가 지금은 이렇게 운전하고 있다니.
석헌은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눈을 주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차는 이제 산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십 여분을 더 달려 집에 도착했다.
주차하고 뒷좌석에 놓아둔 모종을 내려놓기 위해 뒷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어떠한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보였다가 사라졌다.
또……. 또 이런 일이…….
석헌은 하던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방금 사라진 이미지를 되찾기 위해 집중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며 가만히 서 있었다. 뭐였지? 방금 그 이미지는?
마침내 이미지가 눈꺼풀에 새겨지듯이 다시 떠올랐다.
석헌은 눈을 떴다. 이번에는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미지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사고. 하지만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일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암흑 속에서 그리고 시설에서 지냈고, 시력을 되찾은 지는 고작 1년 남짓이다.
석헌이 알고 있는 세상은 너무 좁았다.
하지만 사고는 일어날 것이다.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석헌은 천천히 자동차 뒷문을 열고 장에서 사 온 모종을 내렸다.
이 모종들이 자라날 때 내가 옆에 있을지 자신이 없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석헌은 다시 차를 몰고 의령도서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