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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6시간전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추락

중 3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 의령. 

산골 시골에서 시작하는 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행복했다. 

방학이 끝나고 난 뒤에는 할아버지의 차를 타고 통학했다. 


가끔 집에 마을 어르신이 찾아와 나를 보고 가거나, 동네 꼬마들이 놀려대곤 했지만, 

시설을 벗어나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자유와 안락함을 

동시에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매일 싱글거리며 할아버지와 잠자리에 누웠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간 밀렸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남들이 들으면 사사로운 일이라고 하겠지만 매일이 행복했다. 


 “너한테 그 노란 물건을 받고,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구나.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확고하던 원장이 그걸로 무너질 수도 있다고 하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원…….”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

 “네? 시설에요?”

 “그래,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다.  


 “가능한 한 빨리 내 손자를 보내달라고 했지. 그렇지 않으면 이걸 방송국에 갖다주겠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황 실장도 원장도 나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잡힐 것도 없는 까까머리를.


 “너는 아무래도 나를 닮았나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열아홉. 고 3. 

겨울 방학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할아버지가 함께 의령장에 가자고 하신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나는 훌쩍 자라고 할아버지는 작아졌다. 

무릎이 아픈 할아버지는 이제 운전은 꿈도 꾸지 못한다. 


 “석헌이가 커 가는데, 마땅히 찬으로 줄 게 없구나.”

 “괜찮아요, 할아버지. 저 아무거나 잘 먹어요.”

 “의령장에 가서 국수 한 사발 먹고, 간식거리도 좀 사 오자꾸나. 무릎에 붙일 파스도 좀 사고.”


할아버지와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굽이진 길을 따라 달렸다. 

파스와 돼지고기 조금, 할아버지의 두꺼운 양말 몇 켤레, 만지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얇은 솜이 들어간 매끈거리는 패딩, 간식으로는 설탕을 묻힌 꽈배기를 샀다. 

빵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할아버지에게 나는 아직도 단 것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모양이다. 

사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콜라와 컵라면인데. 


할아버지의 키는 무릎과 허리가 굽어가면서 매해 작아졌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만약 앞을 볼 수 있었다면 할아버지를 업고 다녔을 텐데. 

의령장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를 기다린다. 

처음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이고 행복이었지만 

지금은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만 든다. 

난 몸이 불편해진 할아버지를 업고 다닐 수도,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알려줄 수도, 돈을 벌어다 줄 수도 없다. 할아버지는 정말 나와 함께 살아도 되는 걸까? 내가 할아버지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닐까. 


가끔 이런 뜻을 내비치면 할아버지는 머리가 굵어졌다고, 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넉넉지 못한 형편과 매해 작아지는 할아버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를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다. 


 “석헌아, 저기 버스 왔다.”


할아버지가 맞잡은 손의 손등을 두드린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일어선다. 

왼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버스에 타고 난 후에도 할아버지는 내 자리를 먼저 잡아주신다. 

버스의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진다. 

할아버지는 조금 더 걸어 내 뒤에 자리를 잡으셨다. 

사람들이 계속 타는지 버스는 출발하지 않고, 발소리가 들린다. 


 “영감님! 장 보러 오셨서예?”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같은 마을에 사는 아주머니 목소리다. 반갑다. 


 “석헌이도 왔네?”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아주머니가 가까이 있는지 초겨울 바람 냄새가 난다. 

사람들이 타는 사이 할아버지는 아주머니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다. 

뭘 샀는지, 언제 출발했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약한 경상도 사투리, 힘에 부친 노인들의 신음소리. 

버스가 서서히 출발한다. 

나는 손을 더듬어 앞자리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잡는다. 

그런데 그 순간 무엇인가가 눈앞에서 번쩍인다. 

찰나의 이미지.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한 번도 내 눈으로 무엇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꿈조차 꿔 본 적이 없었으므로. 


영상과 이미지는 나에게 달나라 동화나 마찬가지다. 

순식간이기도 했지만, 시각적인 경험이 전혀 없던 나에게 그것을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버스 좌석에 붙은 손잡이를 잡은 채 나는 얼어붙었다. 

장날이라 의령장에 사람이 많은지 버스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보였던 이미지가 무엇인지 생각하려 머릿속을 뒤지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버스가 직선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리더니 회전 교차로에 들어선 모양이다. 

한쪽으로 기운다. 그리고 또다시 눈앞에 이미지가 스쳐 지나간다. 

아까와 같은 그림. 하지만 여전히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해되지 않는다. 환각? 아니다.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버스에서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기도 하고, 노래를 틀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라디오가 아닌 주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지금까지 사용한 적 없는 눈에 힘을 주고 있다. 

혹시 주변에 나와 같은 이미지를 본 사람이 있는지,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는지, 

그것들이 다시 보이지 않을까 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하지만 없다. 내 기대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조용히 버스를 타고 갈 뿐이다. 

내가 앉은 자리 뒤에는 할아버지가 있고, 오른편 뒤쪽에는 아주머니 두 분이 앉아계신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의령의 작은 번화가를 벗어나자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외진 시골길에 들어선 모양이다. 


손을 들어 버스 유리창을 더듬어 만져본다. 

이 유리창 너머에는 지금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까? 

쌩하며 버스를 지나치는 차들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맞부딪히는 바람에 버스의 창문이 덜컹거린다. 

버스 안에서는 괜찮지만, 밖에서는 손끝이 시렸지. 겨울이 시작되려나 보다. 

나는 지나친 이미지를 붙잡으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때 코너를 도는지 좌회전하는지 알 수 없지만, 버스가 기우뚱한다. 

어깨가 왼쪽으로 세게 부딪힌다. 

나는 손을 더듬어 잡을 것을 찾는다. 

왼쪽으로 기울어졌던 버스가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하게 오른쪽으로. 

반대쪽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의자에서 떨어졌는지 ‘쿵’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 어!”하는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 바닥에 놓아두었던 짐들이 한쪽으로 쏠리며 내는 소리, 아주머니들의 비명이 한데 섞여 들린다. 

버스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는지 ‘쿵’ 소리가 나더니 충격이 전해진다. 

타이어 마찰음이 들리고 버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나는 뒤를 돌아 할아버지를 애타게 찾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다.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버스는 속도가 늦춰지나 싶더니 앞쪽으로 기운다. 

방금 전까지 잡고 있던 앞좌석 손잡이가 내 가슴을 강타한다. 

나는 ‘헉’하고 숨을 몰아쉰다. 

통증으로 숨을 쉬기 어렵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할아버지를 부르려 애쓴다. 

손을 더듬어 손잡이를 잡고 할아버지를 외친다. 

몸이 점점 앞으로 쏠린다. 

버스 바닥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짐들도 소리를 내며 앞쪽으로 떨어진다. 


 “흐윽.”


할아버지 목소리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쪼그리고 앉아 

주변을 미친 듯이 더듬는다. 


 “할아버지!”


손에 무언가 닿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잡을 새도, 확인할 새도 없이 앞으로 떨어진다. 

기우뚱하며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버스도 함께 떨어진다. 

할아버지와 나도 함께 곤두박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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