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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Sep 24.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도박

 그 후에도 원장과 황 실장은 나를 할아버지에게 보낼 수 없는 이유들을 설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 귀에는 변명처럼 들렸다. 

그들은 할 수 있다. 그들만이 나를 할아버지에게 보내줄 수 있다. 

누나 말대로 돈줄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USB가 할아버지에게 있다는 말은 내가 생각해도 그럴듯해 보였다. 

어떻게 그 짧은 순간, 그런 말을 생각해냈을까?


 “석헌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일단 너한테는 친권이 있는데 네 아버지가 너를 여기에 맡기면서 그것을 포기했단다. 

그걸 할아버지가 되찾기란 정말 어려워.”

 “알아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하실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에게 할아버지도 중요하겠지만 너는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시설에서 살았어. 

네가 이렇게 클 때까지 우리가 먹여주고, 재워줬다고.”

 “네, 맞아요. 하지만 누나 말로는 제 앞으로 지원금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원장님, 저를 할아버지에게 보내주세요.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일단 방으로 돌아가. 황 실장과 이야기해보마.”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체취로 보아 아마 황 실장인 것 같다. 

황 실장이 나를 잡고 끌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원장실 밖으로 나를 밀어냈다. 


 “방으로 돌아가라.”

 “네.”


나는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걸음 걷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너…… 내가 너 죽일 거다. 조심해.”


황 실장의 목소리. 

등 뒤로 질질 끌며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황 실장이 원장실로 들어간 모양이다. 


 “하아.”


그제야 나는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원장실 안에 있는 동안 얼마나 긴장한 채로 앉아 있었는지 지금에서야 알았다. 

내가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었다. 

만약 잘못된다면 나는 시설을 나가기 전까지 황 실장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석헌아, 황 실장한테 혼났어?”


현수다. 

할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왔었다는 것을 고자질한 아이. 


 “아니.”

 “황 실장이 별말 안 했어?” 

 “원장실로 데리고 가긴 했지만 별일 없었어.”


나는 말을 아꼈다. 

누나도 나에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이곳은 질투가 난무하는 곳이다. 

나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현수에게 말했다.


 “네가 황 실장한테 얘기한 거야?”


현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그깟 과자나 사탕이 부러워서 고자질한 거라면 나에게 그 주전부리를 안겨 준 사람이 

친할아버지라는 것을 안다면 더한 시샘을 할 것이다. 


 “통학버스에서 내렸는데 인원수가 안 맞는다고 난리를 쳐 대서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어.”


황 실장이 먼저 아이들을 체크했는지, 현수가 황 실장에게 쪼르르 달려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건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할아버지가 네 후견인이라도 되어 준대?”


현수가 질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후견인? 이 아이들에게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느껴졌을까? 

친할아버지라는 것을 숨겨야 하는 지금, 후견인이라는 말이 달콤하게 들린다. 

할아버지를 위한 얇은 가림막이 되어 줄 것이다. 


 “아직 그런 말은 안 했지만 생각하고 계실지도 몰라. 음…… 우리 내일 방학식이잖아. 

할아버지가 마지막이라 내일은 더 많이 가져다주신다고 했어.”

 “아……, 그래?”


떨떠름한 말투로 현수가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 할아버지한테 간식거리를 받으면 너한테도 좀 나눠줄게. 

네가 말을 잘 해줘서 오늘 무사히 넘긴 것 같으니까.”

 “정말? 나한테도 준다고?”

 “응. 근데……”


나는 말을 멈췄다. 망설이듯이. 


 “근데 뭐?”

 “대신 오늘은 나랑 자리를 바꿔서 자자.”

 “왜?”


그럴듯한 이야기를 생각해내자. 


 “너 창가 자리잖아. 나 그쪽에서 자보고 싶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겨울에 창가 자리라니. 

새벽이 되면 바닥은 차가워지고 한기가 든다. 

그나마 아이들 틈에 끼어서 자는 것이 낫다. 

어쩌면 조금만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현수는 그만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럴까? 그럼 우리 오늘 바꿔서 잘까? 네가 내 자리에서 자고, 나는 네 자리에서 자면 되겠다. 

그러면 내일 나도 좀 나눠 주는 거지?”

 “응. 오늘 자리만 바꿔준다면.”


현수는 좋아했다. 한기가 시린 벽이 아니라 아이들 틈에 껴서 잘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게다가 덤으로 다음날 간식까지 받을 수 있다니. 

아마 현수는 내가 모자란 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가 왔다.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현수와 나는 원래 자리에 누워있다가 잠자기 직전 자리를 바꿨다. 

선심 쓰듯이 자리를 내어 준 현수. 그리고 예상대로 그가 왔다. 

오늘은 그가 당직이 아니지만, 당직을 바꿔서라도 나에게 화풀이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가 모두 잠든 밤을 타 아이들이 자는 방으로 들어왔다. 

내 몸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물론 지금 이 방에 들어선 이방인이 그가 아닐 수도 있다. 

당직을 바꾸지 않고 퇴근을 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안심할 수 없다. 

살금살금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딛는 소리가 들린다. 


딸깍이는 소리가 난다. 손전등일까? 

소리는 내가 원래 자는 자리에서 서성인다. 

나는 얼굴을 아래로 하고 엎드린 채로 잠든 척을 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한동안 여기저기를 살피던 그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이들은 쌕쌕거리며 잠에 빠져 있다.      



 시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할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리고 정희 누나가 나에게 남긴 USB를 할아버지 손안에 떨어뜨린다. 


 “석헌아, 너는 용감하고 영리한 아이구나.”


할아버지의 칭찬에 부끄러워진다. 


 “할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어요.”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는다. 


 “그래, 그러자. 이건 내가 잘 보관하고 있으마. 네 말대로 일이 모두 끝나면 그때 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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