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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Sep 20.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노란색 USB

대답을 들은 황 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놀랐을까? 원장은 어떨까? 둘은 어떤 생각을 할까?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가 불편한지 뽀득 이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 자세를 고쳤다. 

아마 황 실장일 것이다. 

원장이 있는 방향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정확하게 무슨 말을 들었지?”


원장이 말했다. 

황 실장은 계속해서 자세를 고치는지 가죽 소파 마찰음만 들렸다. 


 “전부 다요.”

 “……그 아이가 왜 너한테 그런 말을 했지?”

 “시설에서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니까요.”

 “가족?”


원장이 되물었다. 

단지 되물었을 뿐인데 내 귀에는 ‘너희가 가족이 뭔지나 알고 하는 말이야?’라고 들렸다.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이 쥐어졌다. 


 “네. 저희는 그랬어요. 그래서 누나가 저한테는 얘기 해줬어요.”

 “예를 들면…… 어떤 거?”


원장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정말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가?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저들에게 가능한 강력한 펀치를 먹이고 빠져야 했다. 


 “황 실장님이 엄마를 찾아준다고 하면서 누나를 당직실로 불렀던 거요.”


소파에서 짧은 마찰음이 들린다. 


 “야! 너 거짓말하지 마! 내가 뭐라고 했다고? 내가…… 왜 그런 앞도 못 보는…….”


황 실장은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욕설과 함께 의미 없는 소리들을 질러댔다. 

하지만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원장의 눈치를 보는지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그 틈에 나는 이어 말했다.


 “누나가 원장님이랑 병원에 갔다 온 것도 말해줬어요.”


이제 황 실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순간 방에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몇 분간 우리는 침묵 속에서 앉아 있었다. 

이윽고 원장이 입을 열었다.


 “네 말을 믿을 수가 없구나, 석헌아. 정희는 그저 사고를 당한거야.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라 사고로 떨어진 것뿐이야. 너도…… 알지 않니?”


원장은 분명 우리가 매일 다니는 학교에는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원장의 말대로 우리는 장애가 있어 고작 2층에 교실이 있을 뿐이다. 

2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지 않는다. 

주먹이 쥐어졌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아니라면…….”


원장이 마치 망설이는 것처럼 말끝을 길게 끌었다.


 “그래,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어. 너는 모르겠지만 다른 안 좋은 일도 있었단다. 

황 실장의 도움으로 엄마를 찾았지만, 엄마가 정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래서 그 충격으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고. 어찌됐든 황 실장은 정희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이란다. 아무래도 황 실장의 말처럼 정희가 너한테 거짓말을 했거나…… 네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 그래. 나는 정희에게 엄마를 찾아주려고 노력했어.”


황 실장이 항변하듯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억울했다. 누나는 죽어서까지 누명을 쓰고 있구나.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할아버지가 저를 찾으러 왔다는 것도 누나가 말해줬어요. 

황 실장님이 우리 할아버지에게 도둑놈이라고 말했다고 누나가 알려줬다고요. 이래도 거짓말이에요?”

 “아니!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네 할아버지가 너를 돌려받으러 왔을 때…… 나는…….”


황 실장의 말이 뚝 끊겼다. 

그가 스스로 말을 그만둔 건지, 원장이 그만하라고 지시를 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가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긴 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정희 누나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정희 일은 우리도 골치가 아프구나, 석헌아. 그 아이가 없는 이야기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 모양이야. 

너도 그 아이가 한 말을 모두 믿지 않는 것이 좋겠어. 게다가…… 지금은 당사자도 없으니 

확인도 할 수 없잖니? 아무래도 허언증이 있었던 모양이야.”


다시 화가 나려 했다. 분을 삭이기 위해 침을 삼켰다. 

그들의 치졸한 변명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판세를 뒤집으려면 무엇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갖고 있는 카드가 고작 말뿐이라면 이들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원장님, 누나한테 받은 게 있어요.”


그 순간 아무도 그게 무엇인지 나에게 묻지 않았다.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나와 누나를 매도할까? 

하지만 공기의 흐름이 달랐다.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해져 있었다. 


 “……그게 뭐야? 뭘 받았지?”


원장이 처음으로 주저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USB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오늘 대화는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어질 듯 간신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제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황 실장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노란색 USB?"


사실 누나에게 받은 USB가 무슨 색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누나가 나에게 말 해 준적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그 USB를 보여 준 적도 없었다. 

기죽은 채 황 실장이 말하는 노란색 USB. 

솔직히 말한다면 난 노란색이 무슨 색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누나는 USB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냥…… 필요할 거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네.”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는, 제어되지 않은 신음소리. 


“아……. 제거예요.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정희가 훔쳐 간 모양이에요.”

 “뭐가 들어있지?”


원장이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뭐 이것저것.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이모.”


원장이 깊은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각이는 그녀의 발소리는 사무실을 가로 질렀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잠깐 멀어졌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그 USB 어디 있니? 석헌아.”

 “…….”


회유하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갖고 있다고 하면 당장 빼앗아 갈 것 같았다.


 “USB 어디 있냐고!”


대답이 없자 윽박지르면서 원장이 물었다.


 “……할아버지요.”

 “당장 가지고 와.” 


원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방에 들어온 후로 가장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내 남은 운과 용기를 모조리 그러모아 누나가 남겨 준 마지막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저를 할아버지에게 보내주세요. 그러면 USB를 돌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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