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각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다정했다.
시설에 데려다주는 길에도 할아버지는 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셨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렸을 적 꿨던 한낱 꿈처럼 그들이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변변찮은 인생이었겠지만
그래도 나에게 가족이, 할아버지가 있음에 감사했다.
“다음 주 수요일이 방학이에요. 방학하면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망설이며 말하자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잡은 내 손에 더욱 힘을 주셨다.
“그래, 그렇겠지. 그때까지 매일 기다리마.”
주말 내내 또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시설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얘기해 학교가 끝나고 할아버지의 차를 타고 그냥 가 버릴까?
무모한 것 같지만 이 방법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시설 사람들이 나를 찾을까?
혹시 나를 그냥 데리고 갔다가 할아버지가 유괴범으로 몰리거나 하진 않을까?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월요일이 왔다.
이날도 나는 할아버지의 차를 타고 시설로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갈 마음이 있다면 이대로 시설이 아닌 집으로 가도 되지 않을까?
“아니다. 그러면 안 돼. 언제 너를 다시 뺏길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고 싶진 않구나.
지금은 이렇게 잠깐이라도 같이 있어서 할애비는 행복하단다. 내 손자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단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하마.”
할아버지의 말에 마음이 따듯하게 잦아들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했나. 나도 할아버지처럼 지금에 만족해야 할까?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에도 할아버지는 나를 찾아오셨다.
우리가 함께 시설로 돌아오는 길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시설에서 조금 떨어진 굽이진 골목길에 나를 내려줬다.
앞도 보지 못하는 내가 혼자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에게는 걱정거리였지만
나는 이 방법이 마음 편했다.
할아버지의 차는 내가 시설을 향해 걸어가기 전까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뒷모습을 할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왼손으로 시설 벽을 훑으며 정문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곳.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면 지금까지 익숙했던 이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적응해야 했다.
설렘과 두려움이 섞인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까?
갑자기 교복 목덜미가 잡힌 채 끌려 올라간다.
나는 놀라 버둥거린다.
“너 이 새끼. 어디 갔다가 쥐새끼처럼 지금 기어들어 와?”
황 실장 목소리다.
나는 버둥거리다가 팔을 뒤로 돌려 교복을 잡고 있는 황 실장의 손을 잡는다.
교복이 목을 졸라 대답하기가 어렵다.
컥컥대며 기침하자 황 실장이 나를 바닥에 내던졌다.
나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차갑고 단단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디가 앞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흔들렸다. 왜 이러는 거지?
“너 말 해 봐. 어디 갔다 왔어?”
대답하지 못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황 실장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내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어딘가로 끌고 갔다.
익숙한 발소리와 냄새, 아이들의 소리.
아마도 시설 안으로 데리고 간 것 같지만 정신이 없어 시설 어디인지는 모른다.
어딘가에 도착하자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여전히 거칠게 이리 저리 끌려 다니고 있었다.
미리 알려주지 않아 어딘가에 계속 부딪히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황실장이 나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침내 황 실장이 내 팔을 놓더니 어깨를 내리눌렀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의자에 앉은 모양이다.
어디인지 가늠하기 위해 내 손이 닿는 곳을 더듬어 보지만…… 모르겠다.
손에 닿는 감촉은 매끈하지만 차갑다.
푹신하고 깊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황 실장이 나를 소파에 던져둔 것 같다.
정신을 차리자 은은한 달콤한 향이 느껴진다.
그리고 어디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근처에서 황 실장이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근처에 있는 모양이다.
잠시 뒤 드르륵 하며 바퀴 소리가 들리더니 구두를 신은 발소리가 들린다.
또각거리는 소리.
아마도 여자 구두인 것 같다.
“거기 앉아. 얘가 그 아이야?”
“네, 이모.”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멈춘다.
여자가 내 오른쪽에 있는 소파에 앉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황 실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 오늘 학교 끝나고 어디 갔다 왔는지 원장님한테 솔직히 말해.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황 실장과 원장이 알아버렸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말하라고! 우리도 다 알고 있으니까!”
황 실장이 소리를 지른다. 그 순간 정희 누나의 말이 생각난다.
-실장님이 너희 할아버지가 가고 나서 도둑놈이라고 욕했거든. 내 돈 줄 훔쳐 간다고.
나는 두려웠지만 가능하면 감정을 숨기고 어디 서 있는지 알지 못하는 황 실장을 향해 말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지난번에 강아지를 구해줬는데…… 그 주인 할아버지가 와서
잠깐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고 왔어요.”
“강아지?”
원장이 물었다.
“네. 강아지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지금 내가 주눅 든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어디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갑자기 누군가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긴장하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공격에 어안이 벙벙했다.
“거짓말하지 마! 이 새끼야! 앞도 못 보는 새끼가 무슨 강아지를 구해? 너 그 할아버지 만나고 왔잖아!
어디서 나이도 어린 새끼가 거짓말이야?”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내 폐는 쪼그라들었다.
간신히 얕은 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다.
이들이 할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온 것을 알고 있다니…….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랑 만난 지 얼마나 됐지?”
원장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묻지도 않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가죽 소파가 놓인 곳은 시설에서 원장실뿐이라는 것을.
황 실장과 원장이 내가 할아버지와 만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내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근육은 긴장되어 갔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원장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황 실장이었다.
“말해! 원장님이 물어보시잖아! 아까 현수가 다 대답했어! 그 할아버지가 너한테 매일 왔다면서?
너한테 줄 먹을 것들을 잔뜩 갖고 왔다면서?”
순간 얼굴과 몸이 달아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황 실장과 원장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내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채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분해지려 노력했다.
그들 눈에는 내가 보이고, 나는 그들을 볼 수 없지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네, 맞아요. 할아버지가 매일 사탕이랑 과자를 사 주셨어요.”
“네가 거지새끼야? 왜 그런 걸 받아먹어?”
황 실장과 대화를 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가 원래 이렇게 흥분을 잘하는 건지,
아니면 원장 앞이라 이러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길길이 날뛰는 황 실장에 비해 원장은 조용했다.
정희 누나가 생각났다.
누나는 왜 이런 하찮은 놈한테 속아 넘어갔을까?
대체 무슨 말로 그녀를 꼬드겼을까?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어 원장이 앉아 있을 법한 곳을 향해 말했다.
“할아버지가 저를 찾아오셨는데 왜 원장님은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해주셨어요?”
“뭐?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누구한테 들었지?”
날뛰는 황 실장의 목소리가 원장의 한마디에 누그러진다.
그는 호랑이를 만난 개 마냥 꼬리를 내린다.
시끄럽게 떨거덕거리는 황 실장은 바람잡이에 불과하다.
내가 집중해야 할 사람은 원장이다.
-원장은 아무 말도 안 했대. 정희한테는. 황 실장이 죽여 버리겠다고 했나 봐.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내가 대답이 없자 황 실장이 참지 못하고 또 언성을 높인다.
“야! 대답 안 해? 원장님이 묻잖아!”
“정희 누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