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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Sep 13.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할아버지의 존재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들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누나가 학교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 구급차를 불렀지만 시골의 외진 학교에 구급차가 늦게 도착했다는 것.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오래된 시골 병원에서는 손을 쓸 수 없었다는 것. 

그 일이 있고 이틀 후 누나가 병원에서 죽었다는 것.      


당연하겠지만 그 후로 시설에서도 학교에서도 누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누나가 원래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일상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황 실장은 조금 수그러들긴 했지만, 여전히 아이들을 거칠게 대했고, 원장은 입을 다물었다. 

정희 누나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금기인 것처럼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끔 할아버지 소식이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또한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에게 할아버지가 찾아왔다거나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한기가 스며들어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돌아왔다. 

겨울. 누나가 그토록 싫어했던 계절.     


 “석헌이냐?”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굣길. 

통학버스를 타기 위해 학교 뒷문에서 시설 아이들과 줄을 서고 있다. 

유독 추운 날씨에 발을 동동 구른다. 


 “누구세요?”


조잘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목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는다. 

누구지?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누군가 불쑥 내 팔을 잡더니 그가 있는 방향으로 잡아당긴다. 

갑작스러운 동작에 나는 넘어질 뻔했다.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나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그가 나에게 몸을 붙이더니 조용히 말한다. 


 “할애비다. 조용히 해라.”


이어 그는 거리를 조금 떼더니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어색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가 석헌이구나. 듣기로는 우리 강아지를 구해줬다지? 고맙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라고? 강아지?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정신 나간 사람인가?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지? 

그 사람은 내 손을 잡더니 무엇인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고맙다. 이건 선물이란다. 내일 또 찾아오마.”


공허하게 눈을 깜박인다. 

손끝으로 더듬고 소리를 들어 보니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놓고 간 물건은 사탕 한 봉지다.      



그다음 날도 할아버지는 같은 시간에 나를 찾아왔다. 

어제와 같은 말을 하면서. 

내 손에는 설탕을 묻힌 젤리 한 봉지를 놓고 갔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내 이름도 알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자 아이들 몇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내가 가장 궁금한 질문을 했다. “누구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이 혹시 누나가 말했던 내 할아버지인가? 싶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렇지 않다면 학교와 시설밖에 오갈 수 없는 나에게 대체 무슨 강아지를 구해줬다고 이런 것들을 안길까? 

설상가상,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싫어했다. 

주말 내내 나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그에 대해 상상하고 생각했다. 

월요일이 되면 그가 또 올까? 

작고 소소한 것들뿐이지만 이번에는 어떤 것을 나에게 주고 갈까?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됐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사실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나를 다른 아이와 착각했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는 내가 그리던 할아버지가 아니었다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상실감이 너무 컸으므로. 

정희 누나를 잃고 난 뒤 또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으므로. 


 “석헌아.”


그는 수요일이 지나 목요일에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어느새 안도감에 휩싸였다. 

다음 주가 방학이다. 

시설 밖에서 이렇게 잠깐 만나는 그가 진짜 내 할아버지라면 방학이 시작되고 나면 

그를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다. 

그는 가만히 서 있는 내 손을 잡고 웃음 띤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미안하다. 할애비가 일이 있어서 오늘에야 왔다.”


이 한마디로 나의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나를 다른 아이와 착각한 사람이라면 절대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희 누나가 말해준 나의 할아버지일 것이다. 

하지만 멍청하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이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내 손에 주전부리를 얹어주고 또 사라졌다. 

시설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하기로. 


하지만 주위에는 시설 아이들이 가득하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아버지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    

 

 “석헌아.”


할아버지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처럼 멍청하게 서 있다가 할아버지를 그냥 보내는 일은 

다신 하지 않기로 다짐한 터였다. 

나는 시설 아이들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내 인사를 들은 할아버지는 놀라서였는지,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잠시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곧 할아버지도 나에게 인사를 해주셨다.


 “응, 그래. 석헌아. 잘 지냈지? 지난번에 내 강아지를…….”

 “지난번에 제가 구해준 강아지를 만나고 싶어요.”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할아버지와 말이 겹치고 말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 말뜻을 알고 있으리라. 

아까처럼 잠깐 뜸을 들이시더니 “그래, 그럴래?” 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네, 할아버지. 여기서 멀진 않죠?”

 “그럼, 그럼.”


나는 함께 서 있던 아이에게 30분 정도 강아지를 보고 할아버지와 함께 버스를 타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아이는 별 의심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너무 늦으면 안 된다고 주의만 줬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학교를 벗어났다. 

근처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을 것이다. 이런 시골의 작은 학교 근처에 뭐가 있겠는가.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자신의 차로 갔다. 


차가운 날씨지만 내 손을 잡아준 할아버지의 손은 따뜻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시설까지는 차로 데려다주마.”

 “네.”


하지만 어쩐지 할아버지를 마주하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많던 궁금한 것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냥 이대로 차에 함께 앉아 있기만 해도 좋았다. 


 “미안하다. 석헌아. 이제 와서 정말 미안하다.”


할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저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나는 몰랐다. 네가 있다는 것도 몰랐어. 네 아비가 죽기 전에야 말해줬단다.”

 “……아빠가 죽었어요?”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물어야 했다.


 “아빠가 죽었나요?”

 “그래, 죽었단다. 암이었어. 젊은 나이에 죽었지. 그때 나한테 말해줬단다. 네가 있다고……. 

아들이 하나 있다고. 네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 애미가 너를 남겨두고 집을 나갔다고 하더구나. 

상섭이는 너를 키우려 했지만, 힘에 부쳤지. 돌이 되기 전에 네가 앞을 못 본다는 걸 알고 

시설에 맡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상섭이가 죽고 나서 너를 찾기 위해 네 아비에게 들은 시설에 가봤지만 

너를 데려올 수 없었어.”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구나. 시설에서는 상섭이가 친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너를 보내줄 수 없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너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단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너를 만나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아마 울고 계신 모양이다. 


 “할애비랑 같이 살자. 석헌아. 이제라도 할애비랑 같이 살자.”

 “……네.”


가라앉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아버지랑 함께 살고 싶다. 시설이 아닌 집에서 할아버지와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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