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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푸른 빛의 머리카락과 담청색 눈동자

by 포뢰

태하는 그녀를 내려 보았다. 어려 보였다.


“……너는 인간인가?”


그녀는 태하의 말을 못 알아듣는 모양이다. 대답은커녕 반응도 없었다. 태하는 그녀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손을 들어 옆구리에 떨어져 있는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끝을 갖다 대었다.



아름답지만 제정신이 아닌 남자가 선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지만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인간이냐고 묻는 남자. 이 남자는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냐는 질문을 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선영은 무엇보다 이 남자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렸다. 남자의 음성, 손짓, 표정 무엇 하나 놓칠 수가 없었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피부, 곧은 콧대와 붉은 기를 띤 입술. 바람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는 푸른빛이

도는 머리카락. 감청색의 눈동자와 속눈썹은 달빛 때문에 이렇게 보이는 걸까?

그는 손을 들어 선영의 오른손에 자신의 손끝을 조심히 대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피로와 배고픔이 가셨다. 납덩이처럼 무거웠던 다리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선영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인 모양이군.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지?”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는 산 속이다. 어떻게 올라왔냐고 물어야

하지 않나?


“……산 아래에 외삼촌 집이 있어요.”


선영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대답했다.


“산을 올라왔다가 길을 잃었죠.”


남자와 선영이 서 있는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따스한 미풍이 선영의 옷을 말려주었다. 남자는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선영을 바라보았다.


“호수로 뛰어들었군.”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태하는 바람의 정령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바람의 정령은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말해 주었다.

태하는 그녀를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 날, 여우에게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다면 그녀가 결계를 통과했다는 것을 더 일찍 알아차렸을 것이다.”




계륜은 이미 명이 다 했다. 다른 정령이었다면 이미 물이 되어 호수로 흘러들어갔겠지만 인간과 부부의 연을 맺어서인지 더 오래도록 목숨을 부지했다. 태하가 태어나고 인간의 시간으로 26년이 흘렀다.

아들을 얻고 20년가량 살 수 있는 다른 정령에 비해 오래도록 천수를 누렸다. 태하의 손에 이끌려 계륜의

앞에 도착한 선영은 목숨이 다해가는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데려온 남자는 이렇게나 젊은데 이 노인이 아버지라니!

노인은 나뭇잎을 층층이 쌓아 올린 덤불 위에 누워있었다. 그 역시 짙은 청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지만 듬성듬성 빠져있고, 피부는 탄력 없이 늘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손과 발이었다. 선영은 눈에

힘을 주고 노인의 손과 발을 들여다봤지만 정확한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한 여름 낮, 더위를 식히기 위해 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그 안에 손을 넣으면 물살에 손의 윤곽이 흔들려 보인다. 이 노인의 손이 그때와 비슷하다고 선영은 생각했다.


“아버지. 결계 안에 인간이 들어왔어요.”


남자는 노인을 향해 침착한 목소리로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결계라니…….


마치 자는 것처럼 누워있던 노인이 간신히 고개를 돌리고 눈을 떠 선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짙은 남색이었다. 노인은 선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렸다.

남자가 선영에게 말했다.


“아버님이 조금 더 가까이 와 달라고 하십니다.”

“이 소리가 들려요?”

“아뇨. 전 안 들려요. 바람의 정령이 전달 해 줍니다.”


선영은 미심쩍은 눈초리를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노인을 향해 다가섰다. 노인은 누운 채 눈을 꿈벅거렸다. 이윽고 힘겹게 팔을 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선영은 그 감촉에 깜짝 놀랐다. 흐르는 물 사이에 손을 넣은 것 같은 느낌. 노인은 그렇게 잠시 손을 잡더니 툭 떨어뜨리듯 손을 놓았다.

선영을 쳐다보던 눈이 커지더니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선영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노인은 힘들게 몇 마디 중얼거렸다. 선영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선영은 잠시 기다렸다가 남자를 향해 말했다.


“아버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노인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몇 마디 더 중얼거렸다. 선영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놀라움과 애잔함을 담은 눈으로 선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당신이…… 내 여동생이라는군요.”





라희는 숨을 멈추었다. 태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에 이어 엄마까지 이 결계 안에 들어왔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 자신도 결계 안에 있다!


“엄마가 여기에 왔었다고요?”


놀라움을 담아 라희가 말했다.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몰랐어요. 엄마도 그런 얘기는…….”


라희는 알 것 같았다. 엄마는 아무에게도 말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철없던 시절의 임신사실을 말해야 했을 테니까. 세월이 흘렀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임신에 세상은 여전히 잔혹했다. 심지어 엄마는 당시 미성년자였다. 엄마는 죽기 위해 호수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사랑하셨다.”


태하의 목소리에 라희는 정신이 들었다.


“그런데 떠나보냈던 그녀의 딸이 결계 안으로 들어왔지. 아버지가 염원했던 딸이.”


계륜은 어떤 심정으로 엄마를 바라봤을까? 어떤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을까?


“아버지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딱 한 가지만 물어보았다. 라미가 아직 살아있는지.”





“어머니는 살아 계신가요?”


남자의 질문에 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영은 노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건강하세요. 저와 언니를 낳았고, 제 아래로 남동생도 낳았지만 태어 난지 얼마 안돼서 죽었어요.”


노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힘겹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몇 마디 중얼거렸다.

잠시 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셨어요. 일평생 어머니만을 바라보셨죠.”


남자의 말을 들은 선영은 기분이 묘했다. 어머니가 이 남자와 사랑을 했다고?

눈앞에 있는 노인은 엄마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하지 않았나. 아빠의 옆에는

항상 엄마가 있었다. 그런데 이 노인이 우리 엄마를 사랑한 것도 모자라 옆에 서 있는 요염함을 풀풀 풍기는 이 남자까지 낳았다고?

선영은 혼란스러웠다. 노인은 또다시 중얼거렸다. 노인의 얼굴에 기쁨이 내려앉았지만, 노쇠한 탓에 너무 지쳐보였다. 선영은 노인이 그만 이야기하길 바랐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아버님은 당신을 봐서 기쁘다는 군요.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세요.”

“……허선영이요.”


노인은 웃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남자가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아버님. 낮달맞이꽃이 피고 있어요. 이제 좀 쉬세요. 밤이 되면 다시 그녀를 데리고 올게요.”


남자는 선영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노인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었을 때 남자는 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놀랍군요. 여동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저도 오빠가 있다는 걸 지금 알았네요.”

“어머니는 어떠세요? 여길 나간 후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의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선영은 난감했다.


“저는 엄마가 여기에 온 것도 몰랐어요.”


선영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몰랐다고요? 왜……?”

“그야 저도 모르죠. 저는 외삼촌 집 근처에 호수가 있는 것도 몰랐어요. 산에 못 올라가게 하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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