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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결계안으로

by 포뢰

“그녀는 임신 한 채로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죽기위해 호수를 찾았다고 하더군.”


태하는 그리움이 가득한 얼굴로 라희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선영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부터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속이 미슥거리고, 잠이 쏟아졌다. 배는 나오지 않았지만

생리가 없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입덧이 시작되자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나 아빠, 마을 누군가가 자신을 의심할까 두려웠다. 마을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다를 떨고 있는

아줌마들을 지나치기라도 할 때면 괜히 위축이 되었다. 등 뒤에서 내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의심스러웠다.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엄마에게 방학이 시작되면 외가댁에 가서 조용히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는 외숙모에게 전화를 해 사정 이야기를 했고, 외숙모는 좋다고 말했다.


“잉. 막내 아가씨 심란한디 선영이라도 보내.”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외삼촌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생전

안하던 멀미와 입덧으로 기진맥진 해있었다. 외가댁에 온 후로는 매일 같이 산에 올랐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고 싶었다.

자신의 처지가 비참했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라니.

손바닥만 한 마을이라 병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학교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미래는? 매일 눈물을 흘렸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나날들.


산에 올라가 볕이 쬐는 바위에 앉아있거나 하염없이 걷다가 저녁때가 되면 외가댁으로 돌아왔다. 농사일이

없는 겨울이라 외삼촌과 외숙모는 의아한 눈길로 선영을 바라보았지만, 특별히 따지거나 어디에 있다왔는지 캐묻지는 않았다.

그 날도 그렇게 산 속을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몸서리가 칠 정도로 몸이 차가워질 때까지.

저체온증에 걸리면 혹시 유산이 될 수 있을까? 막연한 생각을 품고 이리저리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호수를 발견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드리워진 호수였지만 겨울햇살을 받아 넘실거리는 물이 따듯하게 보였다.

선영은 호수 가까이로 다가가 장갑을 벗고 호수에 손가락 끝을 담가 보았다.


햇살을 받았지만 겨울이라 물은 차가웠다. 이 호수에 뛰어든다면 얼마 만에 죽을까?

익사로 죽을지, 동사로 죽을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선영은 천천히 호수 주위를 맴돌았다.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자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아이만 없다면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텐데.

이대로 배가 불러와 임신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어떤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선영은 호수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 곳은 놀랍게도 바람이

멈춘 듯 고요하고, 햇살이 비쳐들어 춥지 않았다. 오히려 봄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찰박. 운동화를 신은 발로 물을 헤치고 호수로 한걸음 걸어 들어갔다.

찰박. 또 한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또 한걸음.

선영은 어느새 울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아이가 미운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말로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운 좋게 발견된다면 아이는 죽고 나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죽을 생각으로 호수에 발을 내딛으면서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우스웠다.

자꾸 이런 생각을 한다면 죽지 못할 것 같았다. 선영은 마음을 다잡고 호수를 향해 거침없이 물살을 갈라

걸어 들어갔다.




온 몸이 흠뻑 젖었지만 춥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젖은 옷을 말려주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아직 숨도 쉬고 있다. 죽지 않은 모양이다.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의식이 돌아오고, 숨을 쉬고 있다. 선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는 온통 검정색이다.

그대로 잠시 누워있자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깜깜한 밤하늘과 별들이 눈에 보인다. 선영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누워있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여전히 깜깜한 밤하늘과 별.

시야 가장자리에 날아다니는 노란 점들도 보인다. 반딧불이다. 한 겨울에 반딧불이라니.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무가 보이고,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호수가 보였다.

선영은 호수 옆 풀밭에 누워있었다. 사방에 노란 작은 꽃들. 달맞이꽃이다. 호수에 뛰어들었지만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왔나 싶다.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이 뛰어들었던 호수임에 틀림없다.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산을 내려가야 할지, 이 곳에서 밤을 보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산을 내려가자니 깜깜한 밤이라 길을 잃을 것 같았다. 게다가 들짐승이라도 만나면…. 하지만 그것은 여기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호수 옆에도 들짐승이 나타날 것이다. 물을 마시러 종종 올 테니.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의 잔잔한 물에 반사된 달의 모습이 아름답다. 달은 반달에서 보름으로

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선영은 잠시 고민한 끝에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달빛이 밝다면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수를 뒤로하고 나무들이 서 있는 풀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무숲으로 들어섰지만 아무리 걸어도 풍경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쪽 길이 아니었나?

그리고 한참을 걸은 후에 깨달았다. 지금 분명 겨울인데 춥지가 않았다. 게다가 호수에 뛰어들어 몸도 젖어있는데 오한은커녕 한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겨울에도 달맞이꽃이 피나? 반딧불도 있었잖아.’


선영은 뒤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걸어 지쳐 나무 둥치에 기대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근처에서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다.

선영은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선영은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아직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호수가 어디에 있었지?’


여차하면 호수에라도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울고 있는 동물이 고양잇과라면 물을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또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선영의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선영은 생각할 틈도 없이 뒤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동물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로 했다. 하지만 달아나기란 쉽지 않았다. 나뭇가지들의 선영의 옷소매를 잡아 당겼고,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이 선영의 발목을 낚아챘다. 선영은 숨을 헐떡이며 나뭇가지들을 꺾고, 풀들을 밟으며 달렸다.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달렸다.


하지만 호수는 보이지 않았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그 동물에게서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을까? 선영은 천천히 달리기를 멈췄다. 자신은 여전히 나무숲 사이에 서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집에도

가지 못하고, 호수도 찾지 못했다. 근처에는 들짐승들이 우글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눈물이 흘렀지만,

손등으로 닦아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으려고 다짐했는데 이런 것들에 겁먹고 울고 싶지 않았다. 무거워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십 여분 걸었을 때 선영은 걸음을 멈췄다.

사람이 보였다.




“그때 나는 나무의 정령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결계 안에 있던 여우 한 마리가 사산을 했거든. 여우는

비탄에 빠져 울부짖었다. 여우가 낮 동안 결계를 벗어나 사냥을 나간 것 같다고 나무의 정령이 말해 주더군. 아마 뱃속의 새끼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엇을 먹었든 간에 새끼들을 모두 잃었다.”




이미 노쇠해진 아버지 계륜을 대신해 태하가 정령들을 만나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던 나무의 정령들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일제히 놀란 눈으로 태하의 뒤를 바라보더니

모두 나무 안으로 숨어들었다. 태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서 있었다. 축축해진 옷을 입고. 지쳐 보이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태하의 눈동자가 또다시 그리움으로 물들었다. 환희에 찬 표정이면서도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긴 속눈썹 사이로 라희를 바라보는 태하는 라희의 얼굴에서 그녀를 찾고 있었다.




선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비단 이 남자 뿐 아니라 오늘 밤에 일어난 모든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큰 키에 짙고 긴 청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도포를 입고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 남자가 나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선영은 오밤중에 산 속을 돌아다니는 미친 남자라고 생각했다. 한 밤중에 산속에 고립되어 있다가 동물 울음소리를 듣고 미친 듯이 산을 뛰어 다녔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고 기뻐했는데 미친 남자라니! 이 사람이 해코지를 하면 어쩌지?

선영은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마음을 졸이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 남자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빌면서. 하지만 자신의 희망은 곧 헛된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가 나무와 이야기를 끝내더니 뒤를 돌아 선영을 바라보았다. 다시 도망쳐야 했지만 너무 지쳐있었다. 이제 걸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는 선영을 향해 걸어왔다.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를 보면서 선영은 손 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나무의 그늘에서 벗어나 달빛을 받은 그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런 남자가 정신이 돌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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