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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당신 이야기를 해 줄래요?

by 포뢰

선영의 말을 들은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실망한 표정이었다.


“엄마는 팔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어요. 항상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하셨어요. 어렸을 때 이야기는

이게 다 예요. 말씀하시는 어머니가 저희 엄마가 맞아요?”


남자는 눈을 들어 선영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말씀이라면 맞아요. 어머니를 결계 안으로 데리고 오신 분이 아버지니까요. 어머니의 기색을 못

알아볼 리 없어요. 지금은 연로하시지만…… 지금까지 어머니만 사랑하신 분인걸요.”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선영은 더더욱 난감했다. 당장 엄마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곧 알아차렸다.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

선영도 임신을 하고 죽기 위해 호수를 찾았다. 엄마가 살던 시절에는 더욱 보수적이고 억압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0대 시절 남모르는 남자에게 이끌려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면?

현재 아이가 없다면 그 이야기는 묻어두었을 것이다. 선영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빠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이름이 있어요?”


남자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태하예요. 난 호수의 정령이죠.”

“정령이요?”


선영의 물음에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수는 이 산을 지키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도 알겠지만 나의 어머니는 인간이에요. 아버지는 정령이고요. 난 그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이 말을 믿어야 하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선영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 엄마 이름 알아요?”


남자는 짧게 웃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라미라고 불렀어요. 인간 세상에서의 이름은 최옥순이죠. 어머니의 아버지가 특별히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들었어요.”


선영은 할 말을 잃었다. 태하의 말이 맞다.

엄마는 팔 남매 중 늦둥이 딸로 태어나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다른 형제들의 이름에는

모두 돌림자가 들어가지만 외할아버지는 엄마의 이름만은 따로 지어주었다.

비록 엄마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이름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 이름이 최옥순이다.

태하가 선영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봐서 알겠지만 아버지의 명이 다 해가요. 다음 보름이 오기 전에 호수로 돌아가실지도 모르죠. 아버지는

딸을 원했어요. 그때까지…… 여기에 있어줄 수 있어요? 그 후에는 내가 결계 밖으로 보내줄게요.”



선영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생전 처음 보는 노인이 엄마를 사랑했던 남자라는 말은 믿기 어려웠지만

어차피 결계 밖으로 나간다 해도 고민거리만 가득한 세상이다. 잠시 이 곳에서 현실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선영은 노인의 곁에서 기억을 쥐어짜 엄마의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름 가득한 노인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선영의 느낌이 맞다면 노인은 대체적으로 즐거워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가끔은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노인은 간혹 입을 오므리며 뭐라고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지만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태하가 있다면 바람의 정령이 전달해주는 말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선영은 인간인지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노인이 쉴 때면 선영은 태하와 함께 있었다. 태하는 선영과 가급적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역시 선영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끔은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는데 항상 ‘별로 궁금하지는 않겠지만’ 이라는 말을 전제조건으로 달았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다르게 태하의 이야기는 언제나 신비로웠다.

그는 담청색 눈동자로 선영을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는 귓가를 간질였다. 이런 날이

며칠 간 이어지자 선영은 내가 혹시 이 남자에게 홀린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안 된다. 그건 안 돼. 엄연히 말하면 그는 나의 오빠가 아닌가.



쉬고 싶어 하는 노인을 떠나 선영이 호수 가장자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태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선영은 태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선영이 태하의 곁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태하는 선영의 기척을 눈치

채고 뒤를 돌았다. 그는 선영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선영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태하는 선영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선영의 손을 잡고 그 위에 무언가를 얹어 놓았다. 태하가 손을 치우자

동그랗고 딱딱한 나무 열매가 보였다. 도토리였다. 선영은 ‘이게 뭔가요?’라는 표정으로 태하를 바라보았다. 태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도토리예요.”

“알아요.”

“당신을 닮았어요.”

“도토리가요?”


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태하는 그런 선영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겉이 딱딱해요.”


선영은 그의 말을 기다렸다. 태하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선영에게 말했다.


“인간세상 이야기 말고, 당신 이야기를 해 줄래요?”



선영은 망설였지만 그에게 마음을 열기로 했다.

우선 언니 이야기로 물꼬를 텄다. 무엇이든 잘하는 언니와 항상 느린 나. 그리고 언니 주위를 맴돌았던 현우. 그런 현우에게 마음이 갔던 자신의 이야기. 용기를 냈지만 결국 언니를 따라가게 된 그 남자.

태하는 묵묵히 선영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죽기 위해 호수로 걸어 들어갔던 그 날의

이야기까지 모두 마치자 선영은 허탈했다. 내내 고민하고, 가슴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는데 말로 내뱉으니

이렇게 별 일이 아니었나 싶었다.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후련하게 가슴 밖으로 끄집어낸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태하는 선영의 손을 잡았다. 그의 온기가 선영에게 위로가 되었다.

별 일 아니라고, 너의 긴 인생을 봤을 때 지금 네 고민은 큰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 걱정 없이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선영은 잠깐 이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쳤다.


‘지금은 잠깐 쉬고 있는 거야. 평생 여기에서 이렇게 살 수는 없어.’


하지만 태하의 마음이, 그의 체온이 선영에게 힘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영은 고마운 마음에 태하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태하는 그런 선영을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러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마음의 짐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그는 선영을 책망하지 않았다. “여자가 헤프게….”라는 소리로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저 선영을 안고 가볍게 등을 쓰다듬어 줄 뿐이다. 선영의 눈물에 그의 화려한 도포가 젖어들었지만, 그는 오로지 선영에게만 관심을 두었다.

시간이 지나고 울음이 잦아들자 선영은 그제야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태하에게 몸을 떼고,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태하의 담청색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영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태하는 선영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떼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마음에 다시 태하를 올려다본 선영은 그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바람의 정령일 것이다. 잠시 후 태하가 선영에게 말했다.


“잠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하는 선영의 뺨을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더니 미소를 지어주고 일어섰다. 멀어지는 태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선영은 한 숨을 내쉬고, 그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바닥을 손으로 집었다. 작고 딱딱한 것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도토리였다.





“태하님은…… 우리 엄마를 사랑했어요?”


라희가 태하에게 물었다. 태하는 대답 없이 라희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의 애잔한 눈빛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토리가 엄마예요?”


라희가 결계 안으로 떨어졌을 때, 태하는 라희를 토리로 착각했다. 엄마인 선영에게 할머니인 옥순의 기색이 남아있듯이, 라희에게도 엄마인 선영의 기색이 남아있을 것이다.

태하의 아버지인 계륜은 옥순에게 라미라는 이름을 주었다. 사랑하는 여인이었으므로.

그렇다면 선영을 사랑한 태하 역시 선영에게 자신만의 이름을 주었을 것이다. 토리.


라희는 놀라운 사실에 기운이 빠졌다. 자신이 어떻게 결계를 통과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라희와 태하를 둘러싼 들판의 꽃들은 어느새 분홍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호수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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