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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아이가 죽나요?

by 포뢰

“엄마는 결국 결계를 나가기로 했군요.”


라희의 말에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하와 라희는 호수 바로 옆, 노란 달맞이꽃이 피어 있는 들판에

앉아있었다. 라희가 결계를 들어온 지 하루가 지났다.

태하가 눈을 내리고, 옆에 피어 있는 꽃들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을 받은 꽃들은 춤을 추듯

흔들렸다.


이모에 대한 엄마의 열등감은 라희도 익히 알고 있었다. 엄마는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이모와

엄마의 대화에서 언뜻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이모는 엄마에 비해 쉽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모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라희에게 이모는 항상 즐거움을 주고, 사랑을 주는 존재였지만 엄마에게 언니는 다르게 다가왔으리라.




그들은 결계 근처에 서 있었다. 정령인 태하는 결계 근처로 다가갈 수 없지만 선영을 위해 배웅을 하고

싶었다.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르니.

선영은 자신의 결정에 대해 태하에게 설명하려 했지만 태하는 괜찮다고만 말했다.

인간인 태하의 어머니도 결계를 떠나지 않았던가. 어쩌면 선영의 선택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령이라 결계 가까이 갈 수 없어요. 물론 결계를 벗어날 수도 있지만 쉽지 않아요. 마력이 필요하고, 피로해지죠.”

“괜찮아요. 이해해요. 여기까지 데리다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태하는 선영의 손을 잡았다.


“토리. 알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요.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어요?”


선영은 손을 잡은 채 그의 눈을 피했다.


“미안해요.”


둘은 아무 말 없이 침묵 속에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주변에 서서히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태하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령과 인간의 혼혈인 태하.

정령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 지금까지 결계에서 살았다. 그에게 인간은 미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에게 날아오듯 선영이 그의 영역에 들어왔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과 피를 나눈 존재였다. 상처받고, 날개가 꺾인 가냘픈 새 같았던 그녀. 그녀를 보듬어 주고 싶었고, 사랑을 나눠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제 자신이 속한 세계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태하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동안 고마웠어요. 이 곳에 더 있으면……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았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태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영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가족이 있고, 여러 가지 일이 있어요. 그들을 저버릴 수 없어요. 나는… 어설프게나마 사랑을 했고, 이런 결과가 생겼죠. 하지만 언제까지 결계에 머무르면서 현실을 회피할 수는 없어요. 제 가족은 지금도 저를 걱정할거예요. 이런 몸이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해요.”


선영은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태하는 그녀의 배에 눈길을 돌렸다.


“지금도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선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선영을 태하는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결계에서 나가려면 당신은 무언가를 두고 가야해요. 알고 있죠?”


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뭘 두고 가야할지 모르겠어요.”

“아이가 없으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죽기 위해 호수로 뛰어들기 전으로?”


태하의 말을 들은 선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의미는 점점 명확해졌다.

그녀는 작게 숨을 헐떡이며 태하를 바라보았다.


“그게…… 가능해요?”


태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이가 죽나요?”


선영의 질문에 태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걱정하는군요?”


선영은 숨을 들이마셨다. 눈은 태하에게 고정되어 있지만 머릿속은 바삐 움직였다.


“아이가 죽어요?”


재차 물어보는 선영의 말에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이를 여우에게 줄 거예요. 얼마 전에 새끼를 사산한 여우의 자궁에 아이를 넣어 줄 생각이에요.”

“그게…… 가능해요?”

“아버지라면 더 쉽게 해냈겠지만, 지금의 저로써는 그 방법이 최선인 것 같네요.”


태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 같은 거죠.”




태하는 선영의 손을 잡고 서둘러 여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안개로 인해 약해진 결계의 마력이 다시 강해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선영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아이를 결계 안에 두고 자신은 결계 밖으로 나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니! 게다가 아이가 죽지 않아도 된다니!

이런 생각에 몰두하며 자신의 손을 잡고 앞서 걷고 있는 태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짙은 청색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는 자신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다.


죽기 위해 호수의 물살을 갈랐을 때도 그의 결계로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힘겨운 지금도 그는 자신을 구해주려 하고 있다. 우연과 필연이 섞였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 선영은 깨달았다. 선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선영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듯이, 자신도 그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다는 것을.

그의 걸음을 따라가는 선영의 가슴이 뜨거워지더니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다. 선영에게는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사랑보다 지금까지의 소소한 일상과 앞으로의 삶이 더 중요했다. 그녀의 세계는 결계 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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