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계를 벗어나다.
여우는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새끼를 사산한 그 자리에서 여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태하는 여우 근처에 다다르자 선영의 손을 놓고 여우에게 향했다. 여우는 자신을 찾아온 태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하가 여우 근처에 앉아 여우의 머리와 등, 배를 쓰다듬으며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태하의 손길을 받은 여우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한 듯 보였다. 마치 태하와 대화라도 하듯이 태하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태하가 입을 열었다. 그는 여우에게 눈을 떼지 않고 선영에게 말했다.
“여우가 좋다는 군요. 당신에게 고맙다고 하네요.”
태하의 말을 들은 선영은 주춤주춤 여우의 곁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우는 고개를 돌려 선영을 바라보았다.
선영은 여우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지금 여우가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여우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선영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자 선영은 왈칵 눈물이 났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가슴에서 퍼져나갔다. 선영은 여우와 같은 고갯짓을 하며 여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지금 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안으로 결계를 빠져 나갈 수 없어요. 시간이 지체되면…… 내가 당신을 붙잡을지도 몰라요.”
태하의 말에 선영은 또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그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했지만, 이 결계와
그는 내 것이 아니라고 되뇌었다. 선영이 침을 삼키며 태하에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여우와 마주보고 누워요.”
선영은 태하의 말을 따랐다. 여우를 마주 보고 누워 여우를 바라보았다. 여우 역시 선영을 마주보았다.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렀다. 태하는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 무언가를 외우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태하가 같은 말을 읊조리자 태하의 몸에서 은은한 달빛 같은 실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 실은 한 가닥에서 두 가닥으로, 두 가닥에서 네 가닥으로 점점 수가 불어나더니 급기야 태하의 몸을 감쌌다.
여우는 어느새 눈을 감았다. 마치 자신이 이 광경을 보고 있으면 불경하기라도 한 것처럼. 선영은 여우를 따라 눈을 감았다. 눈꺼풀 밖으로 빛이 새어들지만 두 눈을 꼭 감고 눈을 뜨지 않았다.
태하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사방이 고요하고, 어두워졌다. 선영은 조심히 눈을 떴다. 적막함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무의식적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숨을 참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자 어두운 배경 위로 노란 꽃들이 보였다. 달맞이 꽃이다. 선영은 조심스레 배를 만져보았다. 불룩하게 나오기 시작한 배가 들어가 있었다.
놀란 마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일어나 앉아 앞에 누운 여우를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우의
배가 부풀어 있었다. 선영은 주저하며 손을 내밀어 옆으로 누워있는 여우의 배를 만졌다. 태동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여우의 배는 따뜻했고, 생명이 느껴졌다.
“토리, 아까 우리가 왔던 길을 기억해요?”
선영은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 눈에 봐도 피로해 보이는 태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피부는 창백했고, 내내 붉은 빛을 띠던 입술도 새파랬다.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옅어진 담청색 눈으로 태하가 선영을 올려다봤다. 선영은 태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안았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저와 아기 모두 살았어요.”
태하는 잠시 그대로 가만히 앉아있었지만 곧 선영에게 결계를 빠져나가기 위한 방법을 설명했다.
“늦으면 안 돼요. 난 이제 힘이 많지 않아서 당신을 데려다 줄 수 없어요. 정령임에도 빛을 너무 많이
사용했어요.”
그의 지친 목소리를 듣자 선영은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괜찮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선영은 양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피부는 차가웠다. 자신의 온기를 그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감싼 채로 선영의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토리. 이제 시간이 없어요. 안개가 옅어지면…….”
“알아요. 어디로 가야해요?”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요. 결계 가장자리에 도착해 가장 안개가 짙은 곳으로 가요. 그 곳까지는 꽃의
정령이 길을 알려줄 거예요.”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선영은 눈물을 흘리며 태하에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입맞춤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시라도 망설인다면 꿈같았던 이 결계를, 아름다운 태하를 떠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선영은 태하와 왔던 길을 따라 뛰어갔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만약 결계에 들어서기 전이라면 꽃들이 길을 알려준다는 말에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계에서 태하와 계륜을 만난 선영은 그의 말을 믿었다. 태하와 함께 있던 결계 근처까지 선영은 쉬지 않고 달려갔다. 마침내 그 자리에 도착하자 선영은 자리에 멈추어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를 믿었다. 그가 자신을 도와주리라 믿었다.
선영은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시선을 내리자 들판이 보였다. 그 위에 피어난 노란 달맞이꽃.
일부는 꽃이 피었고, 일부는 봉오리 져 있었다. 노란 달맞이꽃들은 선영에게 길을 알려주듯 길을 따라 꽃이 활짝 피었고, 길옆에 있는 무수히 많은 꽃들은 힘겹게 봉오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선영이 피어 있는 꽃을 따라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자 길이 아닌 들판에 피어 있는 봉오리들이 꽃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선영의 발걸음 뒤에 있는 봉오리들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다시 꽃을 피웠다.
선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또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선영은 피어 있는 달맞이꽃을 따라 달렸다.
달릴수록 안개가 짙어져 달맞이꽃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선영은 달리기를 멈추고 무릎을 꿇고
달맞이꽃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며 앞으로 나아가야했다.
그리고 마침내 안개가 짙어져 앞을 더듬는 자신의 손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비릿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안개를 뚫고 햇살이 비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선영은 앞을 더듬어가며 햇빛을
따라 걸었다. 햇빛은 창호지를 겹겹이 댄 것처럼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선영은 계속 걸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걸은 후, 마침내 살갗에 닿는 공기가 달라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한 순간 휘몰아쳤다.
결계에서 빠져 나온 순간이다. 호수의 북쪽. 겨울 햇빛이 그녀를 내리쬐고 있었다. 쌩쌩 부는 차가운 바람에 그녀는 문득 한기를 느꼈다.
결계를 벗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