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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죽더라도 좋아요.

by 포뢰

“아버지.”


들판에 앉아있는 태하와 라희에게 가룸이 다가왔다. 가룸이 태하에게 말했다.


“결계를 나가기 전에 뭐를 좀 먹이려고요.”

“그래. 알았다. 그것도 좋겠군.”


태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개가 내려앉기 시작하면 나에게 데려 오거라.”

“예. 아버지.”


태하는 가룸과 라희를 두고 멀어졌다. 잠시 기다렸다가 가룸이 라희의 팔을 잡았다.


“가자. 나무 열매를 좀 모아놨어.”


라희는 가룸과 나란히 걸었다.


“여옥이는요?”

“응. 잠깐 어머니한테.”


조금 더 걸어가자 커다란 잎사귀 위에 과일 몇 개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가룸은 털썩 앉더니 자두를

집어 라희에게 건넸다. 라희는 자두를 받아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새콤한 자두의 과즙이 입 안에 퍼졌다.

맛있게 자두를 먹는 라희를 바라보며 가룸이 입을 열었다.


“나도 너랑 같이 결계를 나가려고.”

“네?”


라희는 놀랐다. 자신과 함께 나가겠다니! 베어 물던 자두를 다시 내려놓았다.


“왜요?”

“왜라니? 난 인간이잖아. 너랑 같은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야지.”


가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가룸의 모습에 오히려 라희가 할 말을 잃었다. 그에게 뭐라고 한단 말인가. 가룸이 이어 말했다.


“너랑 먼저 얘기해 보고 아버지께 말씀 드리려고 해. 난 인간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네가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가룸님. ……여기에서 나가도 괜찮아요?”

“모르겠어. 난…… 이 곳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기에서 자랐어. 줄곧 결계 안에서. 나가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과 함께 살고 싶어.”

“태하님이…… 보내 주실까요?”


라희의 말을 곱씹듯 가룸은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아마 보내주실 거야. 나를 살려주시고, 키워주셨지만 날 막지는 않으실 거야.”


가룸의 얼굴에 잠시 슬픈 표정이 스쳤다.


“난…… 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아니니까.”


라희는 가룸을 바라보았다. 가룸이 태하의 친아들이 아니라니. 그러고 보니 가룸은 인간이라 하지 않았나?

그를 낳은 어미가 인간이라고 했다.


“가룸님.”


라희는 조심스레 가룸을 불러보았다. 가룸은 잘못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룸님은 어쩌다가 이 곳에 들어왔어요?”


가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도 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자코 있던 가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어미가 나를 이 곳에 버렸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의 일이지.”


가룸은 목이 메이는지 억지로 침을 삼켰다. 라희는 숨죽이고 가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나를 아버지가 여우의 아기집에 넣어줬대. 그래서 나의 어머니는 여우지.”


가룸은 고개를 들고 라희를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하지만 웃는 표정과는 반대로 그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아직 세상 빛도 보지 못한 나를…… 어미는 이 곳에…… 나를 이 곳에 버렸다.”


가룸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라희를 보고 있지만 오히려 울지 않으려고 애 쓰는 것처럼 보였다.

가룸의 고개가 다시 떨어졌다.


“항상 궁금했어. 이 곳은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이 없었지. 어미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나를 이 곳에

버렸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난 인간이 아닌 여우에게서 태어났을까?”


가룸의 말을 듣는 라희는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우라는 말이 가슴에 걸렸다.


“가룸님은 여우에게서 태어났어요?”


가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내 어미의 이름조차 몰라. 아버지가 말씀해주지 않았어. 내 어미는 우연히 결계에 들어왔는데 결계를 나가기 위해 나를 남겨두기로 했다고 하더군. 여우인 어머니는 나를 품기 전에 사산을 했대. 아마 독이 든 인간의 음식을 먹은 것 같아. 새끼를 잃고 힘들어 하던 어머니에게 그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품게 해줬대.

그게 바로 나야.”


가룸의 이야기에 라희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말하는 어미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무사히 태어난 나를 태하님이 아들이라 칭해주셨지. 가룸이라는 이름도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가룸이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를 버린 어미가 미웠지만, 그립기도 했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가끔 내가 이 곳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했었지.”


가룸은 눈물이 맺혀 있는 눈을 들어 라희를 바라보았다.


“너와 같이 가고 싶어. 내 어미가 살아있다면…… 만나보고 싶다.”


라희는 대답 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결계를 나가고 싶어 하는지 그 마음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하지만 과연 그와 함께 나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아버지에게 너와 함께 결계를 통과하겠다고 말씀드릴게. 나를 도와줘.”


가룸이 라희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라희는 망설였다. 가룸이 그리워하는 어미는 분명 라희의 엄마인

선영일 것이다. 인간이 정령의 결계에 들어와 자신의 아이를 여우에게 주고 가는 일은 분명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지, 그를 엄마에게 데리고 가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20년도 더 된

일을 엄마는 마주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간절한 가룸의 눈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자신의 오빠가 아닌가.


라희는 망설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결계 밖에서 오빠와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룸은 기뻐했다. 그는 여전히 눈물이

고인 눈으로 활짝 웃었다.





“결계를 통과 하겠다고?”


태하가 놀란 듯 가룸을 향해 물었다.


“네. 아버지. 라희와 함께 가겠어요.”


라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태하는 그런 라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태하는 오직 가룸만을

바라보았다.


“넌 이 곳에서 태어나 이 곳에서 자랐다. 인간이라고는 하나 일평생을 결계 안에서 자랐다. 그녀와 같지

않아.”

“알아요. 아버지. 하지만 전 인간이에요. 인간과 어울려 살고 싶어요.”

“결계 밖으로 나간다 한들 네가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태하의 말에 가룸이 혼란스러워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아들아.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네 어미가 호수에 뛰어들었을 때 이미 죽었어야 했어. 다행히 결계에

닿아서 살 수 있었지만 결계 밖으로 나간다면…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태하는 애절한 눈빛을 담아 가룸에게 말했다. 하지만 가룸은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 저를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그 은혜를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죽는다한들

저는 결계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이 곳에서 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어요.”


가룸의 말에 태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정령이시죠. 저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무런 힘도 없어요. 지어미에게 버림받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지 못한 채로 자랐습니다. 저를 버린 어미가 보고 싶어요. 설령 어미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저와 같은 인간들과 살고 싶습니다.”


가룸의 말을 들은 태하는 가룸을 향해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아들아.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구나.”

“아버지와 결계 안에서 살아 갈 수도 있겠지만…… 저는…….”


가룸은 태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저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요. 라희가 말한 인간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요. 제가 속한 세상은 여기가 아니라 결계 밖에 있어요. 아버지.”


태하는 가룸에게 다가가 그를 안았다. 가룸은 태하의 품에서 울기 시작했다.


“죽더라도 좋아요. 저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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