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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호수로 돌아가다.

by 포뢰

가룸은 앞서 걸어 나갔다. 라희는 가룸을 따라 걸었다.

안개는 더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서 걷던 가룸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쭉 빼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던 가룸은 곧 눈길을 거두고 등을 돌려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가 태하를,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를 돌아보는 거라 라희는 생각했다.


라희는 가룸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하지만 안개는 점차 짙어져서 가룸의 하얀 저고리가 옷인지 안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가룸은 라희의 손을 잡았다.


“이 안개 속에서 어떻게 길을 알아요?”


라희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사방이 너무 고요했다.

무거운 고요함이 라희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아버지 몰래 몇 번이나 와 봤어. 나는…… 언제나 외로웠거든.”


가룸의 목소리로 어림잡아 보건데 그는 아마 씁쓸하게 웃고 있는 모양이다.

라희에게는 형제, 자매가 없다. 라희도 외롭다고 생각했지만 가룸의 외로움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가룸은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 둘러싸여 일평생을 살았다. 언제나 인간을 그리워하면서.


“결계 가까이 오면 다른 바람 소리가 들려. 결계 안에서 느끼는 바람과는 달라. 한 곳에 모여 있는 바람이

아니라 자유로운 바람. 그 바람 소리를 따라가는 거야.”


그들은 한참을 걸어갔다. 이제 안개 때문에 가룸과 잡은 자신의 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물이 싫어. 결계는 항상 호수가 중심이었어. 나는 바람이 좋아.”


가룸의 목소리가 멀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득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드디어 라희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소리. 겹겹이 둘러싸인 안개를 뚫고 들어오는 태양의 빛줄기.


“이쪽이야.”


가룸은 라희의 손을 꼭 잡았다.


“길을 잘 못 들으면 안개를 빠져나가지 못해. 손 놓치지 말고 따라와.”


보이지 않는 벽을 손으로 더듬으면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햇빛임이 분명한 빛도 더 밝게 비추었다. 가룸은 라희를 자신의 가까이로 끌어당기더니

안개 속으로 그녀를 힘껏 밀었다. 라희는 가룸의 힘에 못 이겨 튕겨지듯 앞으로 밀려나갔다.

넘어지지 않게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라희는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균형감각을 잃은 것 마냥 제대로 서기가 쉽지 않았고, 바람을 맞으며 결국 넘어졌다.


다음 순간 라희는 밝게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호수 북쪽에 서 있었다.

결계를 나왔다. 맨발이던 라희의 발에는 흙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갔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들리는 메아리 같기도 하고, 근처에서 웅웅거리며 말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 가룸이다.

라희는 방향을 잃은 채 아무 곳에나 대고 소리쳤다.


“네! 밖이에요!”

“너무 밝아서 눈을 못 뜨겠어. 이런 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 제가 손을 잡아 줄게요!”


가룸은 인간이지만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다. 지금은 아침이지만 곧 해가 강렬해질 것이다.

라희는 가룸에게 소리치며 팔을 뻗었다. 하지만 가룸이 어디에서 나올지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옅은 안개가 낀 허공에서 가룸의 팔이 쑥 뻗어 나왔다. 라희는 오른쪽 시야 끝에 걸린 가룸의 팔을 보고 방향을 틀었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가룸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보였다.


라희는 손을 잡아주기 위해 허둥지둥 가룸의 팔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가룸의 손을 잡고 라희는 힘껏 끌어당겼다.

이상하다. 가룸의 손이 차갑다.

라희는 가룸의 손을 잡은 채 뒤로 물러서며 힘을 빼지 않고 계속 끌어당겼다.


드디어 가룸의 어깨가 보이고 가룸의 얼굴이 어렴풋 윤곽을 드러냈다. 라희는 팔을 뻗어 가룸의 어깨와

겨드랑이를 잡았다. 그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상체가 거의 안개를 빠져나와 아침 햇살을

받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가 빠져 나올 것이다. 라희는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룸의 어깨와 겨드랑이를 잡고 힘껏 당기던 라희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방금 전까지 가룸의 팔이 있던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라희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고 가룸을 쳐다보았다. 가룸은 여전히 눈을 감고 다른 팔로 허공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라희는 얕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안개를 뚫고 나온 그의 다리를 보고 급하게 무릎을 잡았지만 다리는

물로 변하여 흙바닥으로 쏟아졌다.

가룸은 다리를 잃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햇빛을 받은 그의 나머지 왼팔이 물로 변해 호수로 흘러들어갔다.


“아……. 안 돼…….”


라희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룸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허공을 허우적거리려 하지만 그에게 남은 팔이 없었다. 아침 해는 더 높이 떠오르고 더 밝아지고 있었다.


“안 돼!”


라희는 가룸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을 잡고 무릎에 눕히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라희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몸을 이용해 햇빛을 가리기 위해 가룸의 남아있는 몸을 자신의 그늘 아래

두려고 그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물은 호수로 흘러갔다.


“안 돼. 안 돼.”


라희는 가룸의 얼굴을 자신의 팔로 감쌌다. 이제 가룸에게 남은 것은 얼굴과 어깨와 상체 일부분뿐이었다.

라희는 눈물을 흘리며 가룸의 차가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었다.


“안 돼. 아…….”


그리고 마침내 그의 모든 것이 물로 변하여 호수로 흘러갔다.

라희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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