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놓고 가다.
태하는 가룸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사랑한다. 아들아.”
가룸을 안고 있는 태하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가룸은 태하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태하를 바라보고 있던
라희는 가슴이 아팠다.
태하는 가룸에게 선영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한 선영이 아니더라도 태하는 가룸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들아. 네 이름은 가루다에서 가져왔단다. 인간과 나란히 설 수 있도록 지어준 이름이다. 네가 원한다면…… 가거라.”
태하의 말을 들은 가룸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태하를 마주 보았다.
가룸의 얼굴은 여전히 눈물범벅이지만 기쁨에 찬 표정이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다음 안개가 짙어지기 전에 너에게 해 줄 말이 있구나.”
“네. 아버지.”
“이 곳에서 인간이 태어나 자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네가 결계를 통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넌 인간이지만 오랜 세월 결계에서 숨 쉬고, 먹고, 자랐다. 게다가 말 했듯이 네 명이 다 했을 것이다. 결계를 통과해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밖으로 나가겠느냐?”
“네. 아버지.”
태하는 가룸을 바라보았다.
“네 어미는…… 너도 알다시피 너를 갖은 채로 결계에 들어왔다. 그녀가 결계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 네 어미의 이름을 알고 싶으냐?”
태하는 그리움이 가득한 눈으로 가룸을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 가룸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네 어미의 이름은 허선영이다. 라희의 어머니이지.”
가룸의 기대에 부푼 표정은 놀라움으로 변했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라희를 바라보았다.
라희는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가룸의 눈길을 피했다. 가룸은 라희에게 다가갔다.
“네가 ……내 동생이라고?”
라희는 오빠인 가룸을 마주보지 못했다.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알고 있었어?”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라희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가룸님의 말을 듣고 예상했지만 확신하지 못했어요. 먼저 말하지 못해 미안해요. 라는 말을 가까스로 목구멍으로 삼키는데 가룸이 라희를 덥석 안았다. 그는 힘주어 라희를 끌어안았다.
“네가 내 동생이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라희는 당황한 채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룸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이라니! 그래! 네가 결계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어!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동생인 네가 온 거야!”
“네?”
라희는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가룸은 안고 있던 라희를 풀어주고 얼굴을 마주했다.
“어머님은? 아직 살아계셔?”
“……네.”
“혹시…… 어머님께 가끔 내 얘기도 들었니?”
“……아니요.”
라희의 대답에 가룸의 얼굴에 드리워진 기쁜 표정이 사라졌다. 가룸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 얘기를 못 들었어? 한 번도?”
라희는 대답하기 미안했다. 가룸의 이야기는커녕 호수에 관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네. ……미안해요.”
가룸은 잠자코 라희를 바라보더니 이내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이제 곧 어머니를 직접 볼 텐데. 뭐. 나를 한 번도 못 봐서 그러셨을 거야. 너와 함께 결계를 통과하면 어머니도 나를 반겨주실 거야.”
가룸은 다시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라희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엄마가 가룸을 반겨줄까?
라희를 바라보던 가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태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래. 안개가 내려앉기 시작했구나.”
가룸은 웃음기 담은 눈으로 라희를 내려다 봤다. 라희의 손을 잡고 힘을 주었다.
그의 얼굴은 기쁨과 설렘,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아들아,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 무엇을 내 놓을 것이냐?”
들뜬 가룸과 달리 태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여전히 가룸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생각을 해 봤는데 저는…… 저는…….”
가룸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지금까지 줄곧 기쁨에 찬 표정이었는데 어쩐지 미안해하는 표정이다. 가룸은 망설이다가 마음을 다잡은 듯 태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버지. 저는 이 곳에서의 기억을 놓고 가겠습니다.”
가룸의 말에 놀란 것은 라희였다. 태하는 놀랍다기보다 슬픈 모습이었다.
“……결계를 통과하면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구나.”
태하는 슬픈 얼굴로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인간들과 어울려 살려면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았어요. 결계니, 정령이니 이런 기억은…… 저만 갖고 있으니까요.”
가룸은 미안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말했다. 태하는 그런 가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계를 통과하는 길을 알아야 할 테니 근처까지 데려다 주마. 하지만 네 기억은 모두 결계 안에서의 기억이니 결계를 통과하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너는 …괜찮겠느냐?”
가룸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아버지.”
태하는 체념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룸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는 시선을 내리고 라희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두고 갈 것이냐?”
“저는……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정령의 피요.”
라희가 대답했다.
“여기부터는 가룸이 안내해줄 것이다.”
태하가 라희를 보며 말했다.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라희는 태하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이제 라희가 태하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정령’이고, 자신은 결계 밖의 세계에 속한 ‘인간’이니까.
“태하님. 감사했어요.”
라희는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열자 이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말끄러미 라희를
바라보던 태하는 아주 잠깐 미소를 지었다. 라희는 태하가 미리 알려준 대로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라희에게 다가가 라희의 팔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라희의 팔에서 물방울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물방울들은 두둥실 떠올라 라희의 팔을 따라 허공에서 움직이는 태하의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라희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계륜은 옥순을 결계로 데리고 들어오기 위해 자신의 피를 먹였다. 그리고 옥순은 계륜의 아들을 낳았다.
그 피는 옥순의 딸인 선영에게 이어졌고, 라희에게 대물림 되었다. 옥순의 피를 결계 안에 두고 간다면 라희는 태하의 마중 없이는 다시는 결계 안으로 들어 올 수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우연히 결계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태하의 담청색 속눈썹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어머니를 잃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아들을 잃을 차례다. 모두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를 떠났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라희의 마음이 아파왔다.
태하는 가룸에게 몸을 돌렸다. 안개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가룸은 뒤로 한 발 물러나 태하를 향해 절을
올렸다.
“아버지.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곳을 떠나면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제가 속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부디 이해해 주세요.”
태하는 눈을 감았다. 그의 눈 속에는 작고 어린 가룸이 보였다. 가룸은 선영에게 느낀 감정과는 다른 사랑을 자신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고, 이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태하는 눈을 뜨고 가룸을 바라보았다. 가룸은 어쩌면 선영의 풋사랑으로 끝난 그 남자를 닮았을 것이다.
시원한 이목구비. 서글서글한 성격. 누구를 닮았든 간에 태하는 가룸을 사랑했다. 태하는 가룸에게 다가섰다.
“이해한다. 아들아.”
태하는 오른손을 들어 가룸의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가룸은 눈을 감았다. 가룸과 태하는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태하는 팔을 내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가룸은 천천히 눈을 뜨고 앞에 서 있는 태하를 바라보았다.
“아들아. 시간이 얼마 없다. 네 기억은 결계를 통과함과 동시에 없어질 것이다. 서둘러라.”
가룸은 태하를 기억하려는 듯 잠시 그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라희를 보며 말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