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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열일곱 소녀의 사랑

by 포뢰

라희는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가룸이 남기고 간 물줄기로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태하의 말이 옳았다. 라희는 인간인 자신이 가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흐느낌이 잦아들 때 쯤 라희는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라희는 고개를 들고 주위을 둘러보았다. 해는 이미 하늘 높이 올라와 있었고, 라희를 감싸던 안개는 사라졌다. 라희는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자 라희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명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눈물을 닦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을 내딛었다.

소리는 이미 가까워 있었다.


“할머니?”


라희를 찾는 소리는 옥순인 외할머니의 목소리였다. 호수 주변을 맴돌며 라희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라희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도 라희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다급하게 라희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라희냐? 라희야?”


할머니다! 할머니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 라희는 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할머니는 잃어버렸던 라희의 가방과 신발을 들고 허겁지겁 라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할머니!”


라희는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도 라희를 향해 달려왔다. 마침내 가까워지자 둘은 서로를 껴안았다.

라희는 할머니 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입에서는 두서없는 말들이 쏟아졌지만 본인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울음과 함께 발음이 뭉개져 버렸다.

할머니는 라희를 별다른 말없이 꼭 안아주고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할머니의 체온에 라희는 점차 안정되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라희는 포옹을 풀고 지금까지 겪은 일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할머니가 라희를 저지했다.


“괜찮다. 라희야. 그렇게 급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할머니는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네가 어제 호수 얘기를 했잖니.”

“어제라고?”

“그래. 그래. 어제란다. 네가 밤이 되도 돌아오지 않아서 새벽이 되자마자 이리로 올라왔지.”

“어제라니. 그것보다는 시간이 더 많이 지났는데.”

“시간이 다르게 흐르잖니.”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라희에게 말했다. 할머니의 말을 들은 라희는 놀라웠다.


“할머니. …… 알고 있어?”


할머니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웃으며 라희를 바라보았다. 라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희, 네가 호수에 갔다면 계륜과 태하가 널 지켜줄 거라 믿었다.”


라희는 놀란 눈으로 할머니를 보았다. 태하의 말이 사실인가?


“할머니. ……정말이야?”

“라희야. 이제 집으로 가자. 집에 가서 할미가 얘기해 줄게.”


집에 오는 길은 라희 혼자 산을 타고 호수를 찾으러 갔을 때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산을 내려와 양 옆으로 펼쳐져 있는 작은 밭을 지나 라희와 할머니는 집에 도착했다. 라희는 샤워를 하고

그 사이 할머니는 라희가 먹을 아침밥을 준비했다.

결계에 있는 동안 먹은 거라고는 가룸이 준 자두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런데 결계를 통과해 집에 오자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 라희는 할머니가 끓여준 된장찌개에 하얀 밥을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할미는 이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지.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계륜을 봤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보지는 못했지만 항상 주변에 있었지.”


밥상을 옆으로 치우고 할머니가 라희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이가 들고 계륜을 봤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했어.”


계륜은 할머니를 사랑했다. 할머니도 계륜에게 마음이 갔다. 할머니가 집에 숨어있는 계륜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때는 할머니의 소꿉친구인 동철에게 고백을 받은 날이었다.





열일곱 살 소녀와 열아홉 살 소년의 풋사랑.


“나는 너랑 결혼 할 거다.”


목련 나무 아래에서 소년이 소녀에게 말했다.

위, 아래 동네에서 살며 매일 얼굴을 마주했던 소년과 소녀. 그들은 함께 자랐고, 어느새 이성에 눈을 뜬 나이가 되었다. 소녀도 소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자신의 마음에는 확신이 없었다.

소년의 말을 들은 소녀는 얼굴을 붉혔다. 이제 그들은 일곱 살과 아홉 살이 아니다. 소년이 소녀에게 한 말은 이런 작은 시골마을에서는 진짜로 이뤄질 수도 있는 말이었다.



봄비가 내리는 밤. 소녀는 잠에 들지 못했다. 소년의 고백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말을 떠올리면 슬며시 웃음이 배어나오기도 했고,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소녀는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열기를 식혀야 할 것 같았다. 옆에서 자고 있는 두 명의 언니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방문을 열고 작은 쪽마루에 걸터앉아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골의 작은 마을은 다들 일찍 결혼한다. 자신도 몇 년 후에는 아이 엄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벌써 여섯째 언니에게 혼담이 들어오지 않았던가. 옥순을 특별히 예뻐했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큰

오빠 내외와 언니 두 명, 조카들과 이 집에 살고 있지만 자신도 머지않아 이 집을 떠날 것이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한 밤중의 쌀쌀한 봄바람이 옥순을 지나갔다.


그가 왔다! 옥순은 코끝에서 조금 비릿한 호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옥순은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확한 형태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거기에 있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옥순은 망설이지 않고 툇마루를

벗어나 신을 신고 바람이 불어 온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가 있었다.



“결계에서의 시간은 잊지 못하지. 항상 어두운 밤인데다 들판에는 작은 꽃들이 피어있었어. 그리고 계륜은

나를 무척 사랑해주었단다.”



가끔 정령들의 시샘을 받기도 했지만 계륜이 있어 옥순은 행복했다. 게다가 계륜이 라미라는 이름을 준

후로는 시샘을 하던 정령들마저 옥순을 어찌하지 못했다.

꿈같던 시간들. 옥순은 금세 아이를 갖았다. 계륜은 옥순을 닮은 딸을 원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바랐다.


달이 차고 배가 부풀었다. 산달이 가까워오자 옥순은 불안했다. 엄마가 그리웠다. 그리고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도 무서웠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계륜은 부드럽게 옥순을 달래주었다.

드디어 진통이 시작되고 옥순은 아들 태하를 낳았다. 딸은 아니었지만 계륜은 기뻐했다. 무엇보다 아이를

낳고도 옥순이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옥순은 그런 계륜이 고마웠지만 마음 속 어딘가가 공허했다.

이제 어둡기만 한 결계가 아니라 밝은 태양이 그리웠다. 여름이 그립고, 한 낮의 햇빛이 그리웠다.

저녁나절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마저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럴수록 눈물 흘리는 날이 많아졌다. 계륜은 옥순을 걱정했지만, 특별한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지. 고작 열일곱 살이었잖니. 그 나이에 아이도 낳고 결계에 갇혀있었어.”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엄마와 언니들, 오빠들과 조카들까지도.

옥순의 이야기를 들은 계륜은 마음 아파했다. 그녀의 마음을 돌려 아들 태하와 함께 결계에서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옥순은 더더욱 힘들어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야위어갔다. 계륜은 눈물을 흘리며 옥순을 결계 밖으로 보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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