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맞은 여자
“결계를 나와 산을 내려와 집에 오니 겨울이더구나. 난 아이를 낳고 젖을 먹였는데 결계 밖은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았어. 하지만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단다. 열일곱 여자아이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머리를 박박 깎아서 집에 가두었지. 집안의 수치였으니까.”
단지 기억이 없다고만 말했다. 모두들 집요하게 물었지만 그때마다 머리가 아프다고 둘러댔다. 사실대로
말 해 본들 다른 사람이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식어갔지만, 어머니만은 막내딸이 실종 된 사이 흠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 챘다.
“같은 여자이고, 어미니까 눈치 챘겠지. 다만 시간이 짧아서 내가 아이를 낳았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거다. 아마 전과 같지 않다는 것만 알았겠지.”
더 이상 처녀가 아닐 것이다.
옥순이 집으로 돌아온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급히 혼담이 오갔다. 언니들보다 먼저 혼담이 들어온 것이다. 상대 남자는 허동철. 옥순을 색시로 맞겠다던 아랫마을 소꿉친구 동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자 둘은 혼례를 치르고 부부가 되었다.
“시어매는 지독한 사람이었지. 내가 몇 달 동안 없어졌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들이 워낙 성화라 결혼을
막지 못했어. 내가 누군가와 눈이 맞아서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야.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후후. 그래서인지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했다. 하지만 네 할아배가 있을 때는 그마저도 못했지. 아들을 뺏겼다고 생각했는지 질투가 말도 못했어.”
옥순은 마디가 툭 불거진 손으로 라희의 작고 매끄러운 손을 쓰다듬었다. 농사일로 까맣게 타고, 손등의 힘줄이 튀어나온 거친 손.
“가장 힘든 건 아이였어. 계륜과는 금세 아이가 들어섰지. 그런데 네 할아배와는 아이가 안 생기더구나. 그
사이에 시어매는 별 짓을 다 했어. 손이 귀한 집이거든. 내가 친정에라도 가면, 옆 동네 과부를 데려다 밤에
우리 방에 넣었다. 자고 있던 네 할아배는 깜짝 놀랐지. 자고 있는데 웬 여자가 옆에 있으니. 처음에는 기겁을 했다는 구나. 나한테는 말도 안했어. 알면 내가 속상해 할 테니까. 그런데 그 후에도 그런 일이 몇 번이나 계속 되니까 나중에는 친정에 같이 오더구나. 네 할아배가 다른 여자는 거들떠도 안보니까 이제 나를 내쫓았어.
할아배가 농사일로 집에 없으면 방에 있는 내 옷가지며, 가재도구들을 마당으로 집어 던졌어.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지. 그러면 나는 그것들을 챙겨서 이 집으로 왔단다. 소박을 맞은 거지. 하루 농사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내가 없으면 네 할아배는 묻지도 않고 뒤돌아 나왔단다. 나를 찾으러 처가에 왔지. 그때 큰 오빠가 이혼을 시키려고도 했어. 네 할아배에게 막둥이가 너무 힘들다고……. 막둥이는 우리가 데리고 있을 테니 다시 장가를 가라고도 했었지. 시어머니 때문에 옥순이가 너무 힘들어 한다고…….”
할머니의 눈이 젖어들었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마땅히 아이를 낳아줬어야 하는 시절. 할머니는 갖은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큰 오빠한테 그 말을 듣고 네 할아배는 내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오빠한테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지. 내가 아니면 어떤 여자도 싫다면서. 그리고 집에 가서는 시어머니에게 한 번만 더 이렇게 하면 농약을 먹고 콱 죽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어. 앞으로 손주는 커녕 아들 얼굴도 못 볼 거라고 소리를 질렀지. 그 날 밤 할아배는 울면서 말했다. 다른 여자는 싫다고. 내가 아니면 다 소용없다고. 아이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나를 두고 어디 가지 말아달라고. 그 말을 들으니까 나도 눈물이 나더구나. 그 후에도 시어머니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지만 그 전만큼은 아니었어. 하지만 정말 힘든 건 나였지. 마을에 다른 여자가 아이라도 낳으면 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단다. 이런 걸 모두 잊고 싶었어. 다시 계륜에게 돌아갈까도 생각했었지. 계륜에게는 내가 낳은 아이가 있었으니까.”
할머니의 이야기는 절절했다. 듣고 있는 라희는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할머니의 잘못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모든 짐은 할머니가 져야만 했다.
“하지만 네 할아배를 배신 할 수가 없었단다. 이런 영감을 버릴 수가 없었어. 내가 어디에 가서 이런 사랑을 받겠니? 마을에서는 내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한참 전부터 수근 대고 있었지. 농사를 짓던 사람이 그 자리를 버리고 떠난다는 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어. 하지만 네 할아배는 나를 위해서 이사를 가기로 했단다. 물론 시어머니가 난리였지만 할아배는 듣지 않았어. 집터가 안 좋아서 아이가 안 들어서는 거라고 하자 시어매도 별 대꾸를 못했지. 그런데 이사를 하고 얼마 안 있어 정말로 임신이 됐단다. 하영이가 들어섰을 때에는 나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단다.”
울고 있던 할머니는 눈물을 그대로 둔 채 웃음을 지었다. 라희가 알기에는 할머니가 결혼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임신을 했다.
“거의 8~9년이 되어서야 아이가 들어섰지. 영감은 기뻐했다. 물론 아이가 생겨서도 그렇지만 이제 내가 마음고생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더구나. 어렵게 갖은 아이라 매사 조심했지. 시어매는 말 할 것도 없었고. 후후.”
할머니는 딸을 낳았다. 라희의 엄마인 선영의 언니인 하영. 비록 딸이지만 하영이모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아이가 똘똘했거든.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아이였지. 어머니는 아들이 아니라 안타까워했지만 이제 곧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어. 딸도 낳았으니까 이제 아들을 낳기만 하면 된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시어매가 정정해서 하영이는 지 할매 무릎에서 자랐지. 그리고 얼마 안 돼서 둘째를 낳았는데 그게 네 어매야.”
할머니는 라희를 바라보았다. 집 안의 사랑받는 막내딸로 태어나 할머니는 모진고생을 했구나.
“할머니. 외삼촌도 낳았죠?”
“응. 그럼. 아들도 낳았지. 건강하게 낳았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어. 시어매는 선영이를 낳고 셋째를 임신했을 때 죽었다. 결국 손자는 안아보지 못했어. 선영이까지 낳았을 때는 시어매가 내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서 마누라를 바꿔야 한다고 또 방방 뛰었지. 그러는 자기도 결국 아들 하나밖에 낳지 못했으면서. 물론 네 할아배는 듣는 척도 안했지만. 후후. 선영이를 낳고 몇 달 안 지나서 또 임신을 했지. 그게 죽은 외삼촌이야. 아이가 죽었을 때는 이런 생각도 들었지. 시어매가 손자를 데리고 갔나? 아니면 내가 정령의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은 낳을 수 없는 건가? 모르겠더구나. 그때는 어린 아이가 죽는 일이 허다했거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라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라희도 형제나 자매 없이 혼자 자랐다. 하지만 라희 본인이나 엄마인 선영도 이런 일로 속앓이를 하지는 않았다.
“……태하는 잘 있니?”
할머니가 망설이다가 라희에게 물었다.
“네. 건강하게 잘 계세요.”
라희는 더 이상 말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그리워하는 아들 태하가 어머니인 자신을 그리워하고, 딸인 선영을 사랑했고, 오늘 손자인 가룸을 잃었다고.
“그런데 계륜님은……”
“그래. 그렇겠지.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으니…….”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은 벌써 오후가 되어 가고 있었다. 라희와 할머니는 이른 저녁을 먹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모기장을 치고 할머니와 나란히 누운 라희는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와 더욱 가까워진 기분이다. 할머니가 더 좋아져 라희는 할머니의 팔을 끌어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한 밤 중. 라희는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할머니가 다급하게 라희를 흔들어 깨웠다.
“라희야. 일어나라. 빨리.”
비몽사몽에 눈을 비비고 일어난 라희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 왜?”
“라희야. 내가 밖에 나가보고 올 테니 방에서 기다려라. 잉? 알았지?”
“왜? 무슨 일인데?”
할머니는 말없이 창호지를 바른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밖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할머니. 도둑이라도 들었으면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라희는 할머니 팔을 잡으며 방문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호지 너머로 붉은 빛이 언뜻 보였다.
도둑이 아니다. 불이 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