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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가룸은 나를 저버린 적이 없어.

by 포뢰

할머니의 집은 오래된 기와집으로 대문을 지나면 마당이 있고, 작은 툇마루를 올라서면 안방으로 연결된 문이 있다. 그리고 안방에는 마루와 연결된 문 반대쪽에 뒷마당으로 연결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할머니. 그쪽 말고 이쪽으로 나가자.”


라희는 할머니의 팔을 잡고 뒷마당으로 나 있는 문을 가리켰다.


“잉? 그려.”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뒷마당에 난 문을 흘끔 보더니 라희의 손을 잡고 조용히 일어섰다.

살며시 모기장을 걷고 기어 나와 뒷마당에 난 문을 열고 맨발로 바닥을 딛는다. 한 켤레 놓인 슬리퍼는 할머니 발에 끼워드리고 조용히 뒷마당에 내려선다. 집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부엌을 지나 별채 사이의 작은 공간으로 마당을 들여다보니 라희의 예상대로 마당에 불이 났다.


그 불은 모깃불 따위가 아니었다.

엄마의 외삼촌, 즉 할머니의 큰 오빠가 이 집에 살았을 때는 집 안에 소와 돼지도 몇 마리 길렀다는 말은

들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외양간이 있다. 할머니의 큰 오빠가 나이가 드신 후에는 가축을 기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남았던 외양간이 불타고 있었다. 어차피 쓰지 않는 공간이지만 불길이 바람을 타고 번진다면 큰일이다. 대체 왜 불이 났을까? 우리는 모깃불도 피우지 않았는데.


그 순간 라희는 서서히 불길로 다가서는 형체를 봤다. 빨간 치마. 나풀거리는 노란 빛이 흐르는 백발의 긴

머리. 여옥이다.

여옥이 라희의 눈에 들어온 순간 라희는 숨을 들이마셨다. 여옥이 결계를 나와 라희의 집으로 와 불을 지른

것이다.

라희는 맨발로 뛰기 시작했다. 집 뒤를 빙 돌아 다급하게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다.


“여옥아!”


라희의 목소리를 들은 여옥은 대문이 있는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여옥의 눈동자는 빨간색이다.

여옥은 악에 받친 표정으로 한걸음에 라희 앞으로 다가섰다.


“가룸 어디 있어?”


여옥이 카랑카랑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나한테 가룸을 앗아가? 가룸을 어디에 숨겼어?”


여옥은 화를 내며 라희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었다. 여옥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고, 눈을 불타올랐으며 금방이라도 라희의 목을 조를 것 같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매캐한 연기가 폐를 파고들었다.

라희는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너한테 빼앗아 간 게 아니야. 가룸이… 가룸이 나오고 싶어 했어. 결계에서…….”


라희의 말을 들은 여옥은 순간 모든 것을 멈췄다. 마치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일그러진 얼굴은 놀라움으로 변했다. 새빨간 눈도 검정색으로 서서히 돌아왔다.


“가룸이 나오고 싶어 했다고?”


라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룸이 나오고 싶어 했어. 가룸은 인간과 살고 싶어 했어.”


한순간 불이 꺼지듯 여옥의 분노가 사그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여옥의 눈빛은 달랐다.

가룸이 결계에서 여옥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분명 여옥에게 무엇이든 여지를 보였을 것이다.

여옥은 지금 머릿속을 헤집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찾아냈을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그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멈춰있던 여옥은 숨을 내뱉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룸이 인간과? 아무 힘도 없는 너희들과?”


라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옥이 이성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가룸도 인간이잖아.”

“가룸은 너희들과 달라. 그는 결계에서 태어났고, 결계에서 자랐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너희 인간들과

다르다고!”


여옥의 말에 라희는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여옥을 달래주려 했다. 뒤로 물러선 여옥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라희가 말했다.


“그래도 인간이야. 그건 달라지지 않아. 여우에게 태어났지만 여우가 아니잖아. 여옥아, 이 불 좀 꺼줄 수

없어?”


라희는 불타고 있는 외양간을 가리켰다. 밤이긴 해도 한 여름이라 화상을 입을 것처럼 열기가 뜨겁다.

나무로 지어진 외양간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타오르고 있다. 오래된 나무인데다 한동안 쓰지 않아서 마른 장작처럼 잘 타고 있었다.

잠시 멈춰 있던 여옥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라희를 쏘아보았다.


“가룸 지금 어디 있어?”


여옥의 물음에 라희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껌벅였다. 여옥에게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라희의 숨이 가빠왔다.


“……가룸은…….”

“가룸 어디 있냐고!”

“아…….”

“너하고 같이 결계를 벗어났잖아! 어디 있어?”

“여옥아. 가룸은…….”

“나와 다시 결계로 돌아갈 거야! 내가 말하면 들어줄 거야! 가룸은…….”


여옥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새빨개진 눈동자가 흔들리며 순식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룸은 나를 한 번도 저버린 적 없어. 그는 내 오빠야.”


눈물을 흘리는 여옥을 보자 라희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라희도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라희의 머릿속에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물로 변한 가룸의 모습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여옥아. 가룸은 결계를 벗어나지 못했어. 결계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어.”


라희는 눈물을 흘리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가룸은…… 햇빛을 받자마자 물로 변했어. ……죽었어.”


눈물로 인해 눈앞의 세상이 모두 흔들려보였다. 여옥도 불타고 있는 외양간도 모두 물방울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거짓말.”


잠자코 있던 여옥이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여옥은 울부짖었다. 여옥을 바라보는 라희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여옥의 사랑은 눈에 보일 것처럼 선명했다. 그 사랑은 오직 가룸만을 향해 있었다. 그 마음을 라희도 알고 있었기에 울부짖는 여옥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미안해. 여옥아. 미안해.”


라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여옥에게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거짓말이지? 나한테서 가룸을 빼앗아가려고 거짓말 하는 거잖아! 가룸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여옥이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치더니 이내 라희에게 다가왔다.


“너 때문이야! 네가 오기 전에는 가룸은 결계에서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어! 네가 꾀어냈지? 다 너 때문이야!”


여옥은 새빨개진 눈동자로 라희를 쏘아보더니 목을 조르려는 듯 손을 올렸다.


“라희야! 안 된다!”


라희와 여옥 사이에 할머니가 뛰어들었다. 할머니는 여옥을 밀어내려는 듯 팔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여옥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들고 있던 팔로 할머니를 내치듯 밀어냈다. 라희는 너무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할머니는 여옥에게 밀쳐진 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다 외양간에 부딪쳤다.


“아! 안 돼! 할머니! 안 돼!”


할머니의 몸에 부딪힌 오래된 외양간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라희는 할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할머니의 팔이든, 다리든 아무거나 보이는 대로 잡고 외양간 밖으로 끌어내려했지만 나동그라진 할머니를 끌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쉽게 일어서지 못하고 버둥거렸고, 다급함에 라희는 눈물을 흘리며 닥치는 대로 붙잡고 외양간 바깥으로 끌어당겼다.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 불의 열기, 라희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나무가 무너져 내릴까 할머니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오열의 소리가 들리고, 매캐한 연기가 눈과 코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 가룸이 물이 되어 죽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라희는 열기 때문에 눈조차

뜨기 힘들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할머니에게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외양간을 떠받들고 있던 기둥과 지붕이 무너지기 전에 할머니를 끌어내야 한다. 할머니도 정신이 돌아오는지 라희의 팔을 잡았다.

할머니는 신음소리를 내며 누워있던 몸을 옆으로 돌려 라희의 팔을 잡고 남은 팔로 바닥을 기면서 조금씩

움직였다.

불이라도 꺼졌으면. 라희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열기를 참기 힘들었다. 할머니의 등과 팔을 안듯이 부여잡고 조금씩 움직여 외양간의 서까래에서 멀어졌다. 1mm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씨름을 하고 있는데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라희의 기도가 통한 모양이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가 외양간을 적셨다. 비는 순식간에 쏴아! 소리를 내며

내리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다. 무언가 이상하다. 라희는 할머니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하다.

태하가 마당 끝에 서 있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쏟아지는 이 비는 태하가 호수의 물을 이용해 내리는 비일 것이다.

여옥은 이미 태하를 향해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태하는 못 박힌 듯 옥순과 라희를 바라보다 라희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려 여옥에게 말했다.


“결계로 돌아가거라.”

“태하님! 저 년이 가룸을…….”

“가룸은 스스로 원해서 결계를 나갔다. 경고했지만 가룸이 원했어.”

“아니에요! 저 년이 꾀어냈어요! 저 년이!”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해주마. 지금은 돌아가거라.”

“태하님! 가룸은 태하님의 아들이에요!”


태하는 여옥에게 몸을 돌렸다.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가룸을 사랑했다. 가룸이 죽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더 이상 지체한다면 너에게 화를 낼 것이다.”


여옥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태하도 가룸도 모두 저 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오직 여옥만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지만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다.

억울하고 분했다. 게다가 가룸이 죽었다니. 그를 다시 만날 수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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