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달빛이 머무는 호수

어머니와 아들

by 포뢰

여옥의 기억에는 언제나 그녀의 옆에 가룸이 있었다.

여옥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여우와는 다르게 태어났다. 그녀는 백여우였다.

그리고 그녀만이 사람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


어쩌다 백여우로 태어났는지, 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태하님 마저도.

아마 여옥이 태어나기 전에 사산된 형제가 여옥에게 축복을 내려주었을 수도 있고, 바로 전에 태어난 가룸이 인간이여서 여옥에게 인간의 기운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모두 추측일 뿐,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옥이 만약 다른 여우들과 어울려 자랐다면 분명 다 자라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고 이따금씩 어머니가 말씀해주셨다.


다행히 여우는 무리생활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여우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를 따라 아주 가끔 결계 밖으로 나가 사냥을 배우거나, 좋아하는 열매를 먹기도 하는데 우연히 다른 여우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들은 항상 여옥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같은 여우이지만 다른 생김새에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박탈감. 나도 차라리 그들처럼 붉은 여우였다면.


하지만 오빠인 가룸은 달랐다. 그는 여옥에게 소외감이 아닌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너 같은 여우는 본 적이 없어. 너는…… 뭐라고 할까? 음…… 아름다운 것 같아.”


호수가 보이는 들판 가장자리. 가룸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지나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그의 말에는 쑥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런 가룸의 말을 들은 여옥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응. 다른 여우와 달라.”

“오빠가 다른 여우를 언제 봤는데?”

“나는…… 가끔 결계 주변을 다녀와. 그 곳은…… 깜깜한 것은 아닌데 앞이 보이질 않아. 그런데 길 잃은

여우를 볼 때가 있어. 그들이 다시 결계를 나가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어. 어머니 같은 붉은 여우들 말이야. 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그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아름다워.”


여옥은 눈을 깜박였다. 가룸의 말과는 다르게 여옥이 마주친 여우들은 자신을 향해 서슴없이 적대감을 드러냈다. 몸집이 작은 여옥은 항상 움츠러들었고, 어머니 없이는 결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가룸만이 자신을 그렇게 봐 주는 것일까?


“지저분한 붉은 털이 아니잖아. 넌 곱고 윤기 있는 하얀 털이야.”


가룸은 쑥스러움을 털어내고 진지하게 말했다. 갑작스레 여옥은 부끄러워졌다. 항상 초라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한 자신의 하얀 털을 아름답다고 이야기 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여옥은 눈을 들어 몰래 가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인간이었다. 자신과 어머니는 같지만 그는 여우가 아니었다. 여우가 아닌 그에게 자신이 그렇게 비춰지고 있었단 말인가? 흉하고 볼썽사나운 외모가 아니라 아름답다고? 어느새 여옥의 시선은 가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선을 느낀 가룸이 미소를 지으며 여옥을 마주보았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신경 쓰지 마. 아마…… 시샘을 하는지도 모르지.”


그럴까? 나에게 시샘을?

어쩌면 가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윤기가 흐르는 노란 빛을 띠고 있는 흰 털을 갖고 있으니까.

푸석푸석해 보이는 붉은 갈색털이 아니라. 여옥은 새삼스레 자신의 털을 내려다보았다.


“게다가 그들은 너처럼 사람으로 변하지도 못하잖아. 나한테 너는…… 굉장히 소중한 동생이야.”


가룸은 겸연쩍게 웃었다.



태하의 말을 들은 여옥은 분했다. 아버지라고는 하나 그는 가룸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자신만큼 가룸을

알지 못했다. 여옥의 눈이 붉게 변했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말아 올라갔다. 그리고 누가 저지할 사이도 없이 저주의 말들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가룸은 당신을! 나를! 그리고 결계를 사랑했어! 그런데 당신은 그깟 계집애한테 눈이 멀어서 아들이 죽어나가는 것도 몰랐잖아!”


여옥은 손톱을 세우고 태하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도 가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그가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배운 사냥기술을 생각하며 여옥은 본능적으로 태하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그때, 여옥이 미처 태하에게 닿기도 전에 멀리서 동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산 속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울음소리를 들은 여옥은 동작을 멈췄다.


‘어머니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울부짖음. 이제는 죽을 때가 가까워진 어머니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가룸의 죽음을 알게 됐을 것이다. 여우로 태어난 이번 생에 두 번이나 자식을 잃었다. 그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후비고,

애가 탈 정도로 안타까웠다.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은 여옥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태하는 방금 자신을 위협했던 여옥에게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에게 가 보거라.”


여옥은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태하를 보았다.

태하의 얼굴은 슬픔으로, 비통함으로,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왜 나만 가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까? 여옥의 검게 변한 눈동자는 쉬지 않고 눈물을 쏟아냈다.

여옥은 시선을 떨구고, 태하를 지나쳐 집을 떠났다.


여옥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태하가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태하의 얼굴은 슬픔이 가득 차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놀라움과 그리움도 퍼져 있었다. 그는 옥순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옥순은 여전히 외양간 근처에 누워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아들의 음성을 듣고 옥순은 고개를 들고 태하를 바라보았다.


“아……. 태하니?”

“네. 어머니.”


태하는 옥순의 손을 잡았다. 태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태하와 손을 맞잡은 옥순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태하. 갓난아기였던 아들을 결계에 놓고 와야만 했던 옥순.

긴 세월 동안 모자는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옥순은 잡고 있던 태하의 손을 놓고 팔을 들어 태하의 얼굴과 팔을 쓰다듬었다.


“태하구나. 태하야.”


옥순은 눈물을 흘리며 연신 태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버지와 닮았구나. 보고 싶었다. 태하야.”

“예. 어머니.”


비가 그쳐가고 있었다. 외양간에 붙었던 불은 어느새 꺼져있었다. 태하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던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잠시 옥순을 응시하던 태하는 몸을 돌려 라희에게 말했다.


“내가 잠시 정기를 넣어줄 테니 어머니를 살려줄 수 있는 사람에게 데리고 가거라.”


라희는 태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말을 알아들은 라희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으로 모시고 갈게요.”

“내 정기는 오래 가지 못해. 서둘러야 할 거야.”

“네.”


라희는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태하는 다시 옥순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항상 그리웠습니다. 이렇게나마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살아계셔서 고맙습니다.”

“미안하다. 태하야. 너를 두고 와서. 나는…….”


옥순은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말을 멈췄다.

옥순 역시 눈앞에 앉아있는 아들의 모습을 믿기 어려웠다.


“괜찮아요. 어머니. 저를 살리려고 그러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태하는 깊이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옥순의 얼굴은 방금 전보다 혈색이 돌았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강녕하세요.”

“다시 결계로 돌아가려고 그러니?”

“네. 어머니. 마력을 많이 썼어요. 이제 돌아가야 해요.”


옥순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지금 돌아가는 아들을 다신 못 볼지도 모른다.

모자는 한평생 그리움을 안고 살았고, 찰나의 마주침을 뒤로하고 다시 헤어져야 했다. 옥순은 태하의 손을 놓지 못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태하 역시 그런 어머니를 두고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윽고 태하는 어머니의 손을 부드럽게 떼었다.


“어머니. 저는 돌아가야 해요. 어머니도 라희를 따라가서 치료를 받으셔야 하고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태하가 말했다.


“그래. 그러마.”


옥순은 힘겹게 침을 삼키며 태하의 손을 놓았다. 태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서 있던 마당 끝까지 걸어가면서도 줄곧 뒤를 돌아 옥순을 바라보았다. 옥순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태하를 눈으로 쫓았다. 마침내 태하가 옥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옥순은 꼼짝 못하고 누운 채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다.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며 라희는 태하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태하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태하는 외할머니 집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태하님!”


라희는 놓칠세라 태하를 불렀다.

라희의 목소리를 들은 태하는 몸을 돌려, 다가오는 라희를 바라보았다.


“태하님.”


라희는 발걸음을 재촉해 태하에게 다가갔다. 태하는 눈은 여전히 젖어 있었고, 평생 그리던 어머니를 만난

반가움을 잊을 만큼 슬퍼보였다. 라희는 그런 태하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싶었다.


“태하님.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고 갈 거예요. 119에 신고 했어요.”


태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라희를 말끄러미 보았다. 라희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꼭 쥐었다.

다짐한 듯 숨을 삼키고, 태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한테 전화할거예요. 할머니가 다쳤다고 하면 엄마가 올 거예요. 이틀 뒤, 엄마를 이 집으로 데리고 올게요.”

keyword
이전 18화달빛이 머무는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