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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그가 있는 곳. 결계 안으로.

by 포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선영은 기가 막혔다. 집에 있던 오래된 외양간에 불이 나고, 엄마가 다쳤다. 다행히 지나가는 소나기에 불은 꺼졌지만 엄마인 옥순은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갈비뼈에 금이 가고, 손목과 발목을 다치고, 팔에는 화상도 입었다. 병원에서는 움직이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엄마. 불 끄려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어?”


옥순은 눈을 감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선영은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아 옥순을 채근했다.


“나이 생각도 해야지. 그러다 라희까지 끌어들이면 어쩌려고 그랬어?”


옥순는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뜨며 대꾸했다.


“라희는 너보다 똘똘하지.”

“엄마!”


선영은 도끼눈을 떴다. 편의점에 들렀다가 병실로 돌아온 라희는 만나기만 하면 다투는 엄마와 할머니를 보자 한숨이 나왔다. 엄마 옆으로 남은 간이의자를 끌고 와 앉으며 선영의 무릎에 편의점에서 사온 물건이 담긴 봉투를 내려놓는다.

봉투 안에는 빵과 우유, 간식거리가 담겨 있다.


“내가 전화 받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선영은 편의점 봉투를 뒤적이며 옥순을 향해 말했다. 옥순은 여전히 눈을 감고 누운 채 미동도 없었다.

뒤적이며 봉투를 헤집던 선영은 카스테라와 두유를 집어 라희에게 건넸다. 라희는 아무 말 없이 빵과 두유를 받아들고 포장을 벗겼다.


“엄마. 집에는 언제 가?”


라희가 빵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글쎄……. 할머니가 이래서 잘 모르겠다. 일단 이모한테도 전화 해놔야지.”


선영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엄마. 오늘은 여기 있을 거지?”

“응. 그래야겠지.”

“그럼 내일은 할머니 집에 가자. 짐 좀 챙기고, 할머니 집에서 하루 자고 오자.”



이튿날, 할머니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이 지나서였다. 선영과 라희는 옥순의 옆을 지키다가 병원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한 시간 후면 하영이 병원에 도착할 참이다.

시골집 옆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마당으로 들어선 선영은 불 탄 외양간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왜 진작 철거하지 않았을까? 사용하지도 않는 오래된 건물이 사고의 원흉이었다.

그나저나 왜 불이 났지? 라희와 엄마인 옥순 모두 자다가 불을 발견했다고 하니 원인은 둘째 치고 둘이 무사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저녁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하늘이 깜깜하다. 시골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선영은 새삼스레 집을 둘러보았다. 라희를 이 집에 놓고 갔을 때도 잠깐 들렀을 뿐이다. 자고 가거나 며칠을 묵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 1 겨울방학 이후로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무언가가 불편했다.




결계를 빠져나온 선영은 쉬지 않고 달려 외삼촌 집으로 돌아왔다. 선영을 본 외숙모와 외삼촌은 깜짝 놀랐다. 대체 어디 있다 온 건지 물었지만 선영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선영은 머뭇거리다 대답을 회피했다.

그런 선영을 본 외삼촌이 놀라운 말을 했다.


“예전에 옥순이도 그랬잖여. 어느 순간 없어졌었지.”


외삼촌의 말을 들은 외숙모도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잉! 맞어. 맞어! 아가씨는 한참 없었지. 여기 일대가 다 난리 났었잖여.”

“……엄마가요?”


선영이 미심쩍은 듯 물었다. 외숙모가 이어 말했다.


“응. 그려. 모내기 할 때 쯤 없어졌어. 동네가 발칵 뒤집혔지.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못 찾았어. 여기서 나가려면 버스를 타야 허는디 버스 타는 걸 본 사람도 없었구. 산을 뒤져도 아무것도 안 나왔어. 자다가 일어나니께 없어졌지.”

“우리는 다 막둥이가 죽은 줄 알았지.”


외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지금 같은 겨울에 돌아왔지. 그때는 대문도 없었는디 거기 거기에 서 있었어. 한 겨울이었는디 얇은 잠옷 하나만 입고 오돌 오돌 떨고 있었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선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엄마가 태하의 어머니라는 것은 결계에서 계륜에게 들었다. 하지만 엄마의 실종 소식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엄마 역시 결계 안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결계 안에서 선영은 그들에게 주로 엄마의 이야기를 했다. 태하와 계륜은 선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미처 태하가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엄마가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 무엇을 내 놓았는지를. 그리고 자신이 결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엄마도 똑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넌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 무엇을 내 놓았니?”


아니다. 말 할 수 없다.

임신을 했고,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 아이를 두고 왔다는 말은 절대 엄마에게 할 수 없다. 비록 같은 일일지라도 말 할 수 없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선영은 외삼촌 내외를 바라보았다.


“제가 없어졌다고 엄마한테 연락했어요?”

“잉. 그럼. 혔지. 근디 너도 알겄지만, 지금 동철이가…….”


외삼촌은 말을 맺지 못했다. 외삼촌 말대로 그때쯤 선영의 아버지는 암 투병 중이었다. 대장암.

엄마는 아빠의 곁을 지켜야 했다. 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매일 외삼촌 집으로 전화를 해 소식을 물으면서도 선뜻 올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딸도 자신처럼 결계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방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선영은 결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엄마도 선영이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어디에 있었는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결계는 모녀의 공통점이면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뜨거운 감자였다.




라희와 선영은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이 집에서 누운 것이 얼마만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누워 안방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다.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이 있다. 라희다. 라희는 오늘따라 선영에게 붙어있다. 이럴 나이가 아닌데 방학 동안 떨어져 있던 것이 외로웠나싶다.

더운 여름 밤. 지금도 모기장 안에서 라희는 선영의 손을 잡고 누워있다.


“엄마. 아빠랑은 대강 마무리 됐어?”

“응. 거의.”


선영은 딸에게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최대한 솔직히 모든 과정을 말해주고 공유하고 싶었다. 이혼은 너의 잘못이 절대 아니며,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어?”


선영은 옆에 누운 딸을 바라보았다.


“그랬겠지? 그래서 결혼했겠지?”

“엄마.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라희와 선영은 미소 지었다. 이런 사사로운 이야기를 이제 앞으로는 하지 못할 것이라고 라희는 생각했다.


“엄마. 아빠 말고 생각나는 다른 남자는 없어?”

“응? 무슨 소리야. 없어.”


웃음 띤 목소리로 선영이 대답했다. 벌써 이런 질문을 할 나이라니. 선영은 예상치 못한 딸의 말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엄마. 내가 엄마 엄청 사랑해. 알지?”

“응. 그럼. 알지.”


선영은 손을 들어 라희의 이마에 있는 머리를 넘겨주었다. 딸과 오랜만에 이런 시간을 갖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미안했다. 이제 곧 고등학생이지만 선영의 눈에는 여전히 아이처럼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소나기가 지나가나 보다.


“비 오나 보네. 그래서 라희야, 누구랑 살지 생각해 봤어?”


선영은 가능한 가볍게 라희에게 물어보려했다. 라희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꽉 잡은 손을 놓더니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선영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라희를 바라보았다. 라희는 모기장을 살짝 열어 밖으로 기어나갔다.


“왜? 화장실 가려고?”


선영이 물었지만 라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안방 문으로 향한 라희는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은 약한 물비린내를 방 안으로 불어넣었다.

선영의 예상대로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원하게 내리는 소나기는 아니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한 여름 밤의 열기를 잠깐 식혀준다. 라희가 대답이 없자 선영은 왼쪽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세웠다. 라희는 밖에 나가지도 않고 방문 앞에 앉아있었다.


‘더워서 문을 열었나?’


선영은 앉기 위해 자세를 고치려고 양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때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토리.”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선영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이름.

그의 음성, 그의 몸짓, 모든 것이 선명했다.

선영은 어느덧 열일곱 살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그가 있는 곳, 결계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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