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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결계 근처에 서 있던 소녀

by 포뢰

노란 달맞이꽃이 사방에 피었다. 선영의 앞에는 담청색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태하가 있다. 선영이 그를 마주보자 그는 짙고 푸른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다가와 웃으며 안아준다. 행복해 보인다.

선영의 정신이 아찔하다.




“엄마.”


라희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다. 선영은 참았던 숨을 내뱉는다. 자신은 지금 외삼촌의 집 안방 모기장 안에 앉아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방문 앞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라희가 보인다. 시선을 돌리자 문 밖에 서 있는 태하가 보인다.


“아…….”


선영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가 그 곳에 있다. 태하.

그를 보자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그를 그리워했는지.

그의 숨결, 짙은 속눈썹, 아름다운 쇄골과 긴 손가락. 무엇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치 어제 그와 헤어진 듯 그는 여전히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를 보자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옷깃을 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이렇게 될까봐 27년 전 도망치듯 결계를 빠져나갔지만 흘러간 시간이 무의하게도 자신은 여전히 결계 근처에 서 있던 소녀에 불과했다. 선영은 조심히 모기장을 벗어나 문가로 향했다. 태하는 그녀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담청색 눈동자로 선영의 모습을 쫓았다. 태하는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선영은 문지방을 넘어서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말…… 당신이군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긴 시간 동안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는데. 하지만 그는 등장만으로 그녀를 열일곱 살 소녀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었다. 태하는 선영에게 가까이 다가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기쁨과 희열, 반가움과 놀라움이 한데 뒤섞인 표정이다.


“다시 볼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태하가 선영을 향해 말했다. 선영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 눈물이 흘렀다. 그의 체온을 느끼자 행복했다.

그를 사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를 사랑했다.


“엄마. 태하님을 따라가.”


라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선영은 놀란 듯 라희를 바라보았다.


“엄마. 나는 아빠가 잘못이라고 생각했어. 집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니었나봐. 엄마가…… 태하님을 사랑하고 있었어.”

“라희야…….”

“엄마. 나한테 누구랑 살고 싶은지 물었지? 난 아빠랑 살래.”


라희의 말에 선영은 말을 잃었다. 딸이 지금 자신을 위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생각을 하자 감정이 복받치면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선영은 팔을 벌려 딸을 끌어안았다.


“아니야. 아니야. 라희야. 엄마는 안 가.”


라희는 엄마의 품에서 함께 울었다.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던 라희는 눈물을 삼키고 엄마를 밀어냈다.


“엄마가 태하님과 가더라도 난 여전히 엄마를 사랑해. 괜찮아 엄마. 엄마가 아빠와 이혼해도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변함없이 엄마를 사랑해.”

“아니야. 라희야. 너한테는 엄마가 필요해.”

“아빠와 이혼하면 어차피 나는 한 명하고만 살 수 있잖아. 난 아빠를 선택할거야. 그리고…….”


라희는 말을 맺지 못했다. 선영과 마주 본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라희야…….”

“내가 보기에 엄마는……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아. 엄마를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엄마가 행복하다면 나는 괜찮아. 엄마가 태하님과 함께 갔으면 좋겠어.”


라희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애써 웃었다. 나 때문에 엄마가 망설이는 것은 싫다. 할머니 집에 불이 나고, 태하를 만난 순간부터 라희는 다짐했다. 엄마를 태하님과 다시 만나게 하겠다고. 그리고 방금 태하를 본 엄마의 반응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한 번도 저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 라희가 살아가면서 엄마가 필요한 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희에게는 아빠도 있고, 이모와 외할머니도 있다. 그렇지만 엄마와 태하에게는 서로만이 있을 뿐이다. 라희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엄마가 만약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면 언제든지 연락해서 볼 수 있을까?


“엄마. 엄마가 보고 싶으면 호수에 찾아갈게.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태하님을 따라가.”


라희는 알고 있다. 엄마가 결계 밖의 세상에 미련이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딸인 자신뿐이라는 것을.



선영은 라희를 바라보았다. 언제 내 딸이 이렇게나 자랐단 말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라희는 선영에게 태하를 따라가라고 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딸을 두고 갈 수 없다. 선영은 자신의 첫 아이를 결계에 두고 왔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다행히도 바로 임신이 됐다. 그렇게 얻은 라희를 선영은 보답이라도 하듯 정성들여 키웠다. 그렇게 하면 첫 아이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첫 아이. 그래. 결계 안에는 자신의 아이도 있을 터였다. 자식을 낳고 키우니 알 것 같았다. 그때는 어려서 결계 안에 아이를 버려두고 왔지만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태하는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 그 아이를 살려주었을 것이다. 선영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두 번째 기회가 온 건지도 몰랐다. 아이에게 사죄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라희의 말처럼 선영은 태하를 사랑하고 있다. 라희를 생각하면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라희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선영은 라희를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딸을 힘껏 안았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한 것은 자신뿐인 것 같다. 선영은 문득 그에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생각하자 불편해졌다. 40대 중반을 향해 가는 자신은 누가 보더라도 아줌마였다. 그에 반해 태하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태하는 선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늙었는데 지금의 나라도 괜찮겠어요?”


선영이 주저하며 태하에게 물었다. 그들은 호수를 보며 서 있었다. 아직은 캄캄한 밤. 날이 밝기 전에 결계로 들어가야 했다. 선영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태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에게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워요.”


이 한마디로 안심이 되거나 행복해지진 않지만 이 남자라면 괜찮다. 언제나 내 걱정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이 사람이라면 괜찮다.





epilogue.

중 3 여름방학이 끝났다. 난 아빠를 따라 이사를 했고, 학교를 옮겨야 했다. 나에게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은 꿈처럼 신비롭고, 아득하기만 했다. 엄마가 태하님을 따라 결계로 들어가고 난 뒤 할머니에게 엄마와 태하님의 관계를 간략히 설명했다. 할머니는 놀랐지만 엄마의 결정을 이해했다. 물론 가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쉽지 않았던 것은 아빠와 이모였다. 이 둘은 결계를 알지 못했다. 둘은 무조건 경찰에 실종신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말릴 줄 알았던 할머니는 의외로 덤덤하게 그러라고 했을 뿐이다. 나는 할머니의 말대로 ‘자고 일어나니 엄마가 사라졌다’고 말해야 했다. 태하님이 내리신 비에 땅이 질척였고 이튿날 여름 햇빛에 땅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경찰들은 땅에서 엄마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자국은 하나였다. 그 발자국은 곧장 호수로 이어졌다. 엄마와 함께 타고 온 차는 집 옆 공터에 주차되어 있었다. 경찰 조사가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아무도 내게 말해주진 않았지만, 나는 최대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어야 했다.



아빠와의 생활은 쉽지 않지만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둘만 있자 오히려 아빠의 몰랐던 부분을 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생각날 때는 가끔 이모에게 연락을 했다. 결혼을 안 한 이모는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고, 말처럼 내가 언제 연락하든 항상 상냥하게 받아주었다. 나의 든든한 조력자다.


엄마가 지금 행복할지 생각한다. 엄마와의 이별을 겪은 후 나는 한층 성숙해졌으며, 엄마와 함께 철없던 내 소녀시절을 떠나보냈다. 다음 방학이 오면 나는 할머니 댁으로 달려가 호수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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