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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머무는 호수

만월의 밤

by 포뢰

만월이었다. 커다란 달이 하늘과 호수에 걸려있다.

태하의 말대로 계륜은 보름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는 이미 노쇠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졌다.


만월의 밤. 다른 밤과 마찬가지로 선영은 계륜의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 돌아가야 나오는 학교와 엄마의 도시락. 지난 여름 방학 때 처음으로 다녀본 읍내의 작은

학원. 특별 할 것 없는 소소한 이야기이지만 계륜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중 선영은 계륜의 청색 머리카락이 어딘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머리카락의

윤곽이 희미해지더니 몇 가닥이 순식간에 형체를 알 수 없도록 사라지는 것이다. 이어 다음 순간 또 몇 가닥이 같은 형태로 사라졌다. 선영은 이 기이한 광경에 말을 멈추고 눈에 힘을 주어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몇 가닥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한 줌 정도 되는 머리카락 중 몇 가닥이 풍선이 터지듯 손바닥 위에서

물로 변했다.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하가 근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영이 그를 찾기도 전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슬픈 표정을 지었다. 태하는 조용히 계륜의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 시간이 됐어요.”


노인은 아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웅얼웅얼 거렸고,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하는 마력으로 아버지를 호수 가까이로 이동시켰다. 계륜이 누워있던 층층이 쌓인 나뭇잎들이 마치

다리라도 달린 듯 서서히 호수 가까이로 움직였다. 선영은 태하의 뒤를 따라갔다. 마침내 계륜이 호수 가까이 도착하자 나뭇잎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계륜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태하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던 선영에게 말했다.


“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어요?”


태하의 말을 들은 선영은 주춤거리며 노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선영은 머뭇거리며 태하를 돌아보았다.


“아버지께서 들으실 거예요. 말씀하세요.”


태하의 말을 들은 선영은 다시 노인을 바라보았다. 며칠 간 고마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떼자 울컥 눈물이 흘렀다. 이 노인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에게 따뜻한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한 눈에 자신을 알아보았고,

그녀의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말해 주었다. 이것이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 고마웠어요. ……계륜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영은 눈물을 흘리며 계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허리를 굽혀 그의 상체를 안아주었다.

노인은 미동이 없었다. 잠시 후 선영은 계륜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하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계륜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방은 고요했다. 그리고 바로 그 찰나, 계륜의 몸에서 물방울들이 나오더니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방울들. 무수히 많은 물방울들이 계륜의 몸에서 한 뼘 정도 위의 허공에서 머무르더니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다. 터진 물방울들은 다시 계륜의 몸 위로 떨어지고 물방울의 온기를 받은 몸은 물로 변하여 흐르기 시작했다.

아래로, 아래로 합쳐진 물줄기들은 그대로 호수로 흘러들어 갔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방울들과 물줄기의 아름다움에 선영은 말을 잃고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사방은 조용했다. 물줄기마저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물줄기가 흘러간다. 정령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한 그가 다시 호수로 돌아가고 있다.

계륜이 누워있던 자리에는 그가 입었던 옷 외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지만 물줄기는 계속해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마침내 물줄기가 점점 약해지더니 끊겼다. 계륜의 도포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태하가 계륜의

도포를 들어 호수 가장자리에 앉아 물 위에 도포를 내려놓는다. 아직 계륜이 도포를 입고 있기라도 한 듯

조심스럽게 도포를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살이 도포를 호수 한 가운데로 이끈다. 호수 한 가운데에

흘러간 도포는 만월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선영은 앞으로 걸어 나가 태하의 손을 잡았다. 물에 젖은 도포가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태하가 선영을 찾아 숲으로 들어섰다. 선영은 사산했다던 여우 곁에 앉아 있었다. 계륜이 죽고 낮달맞이꽃이 두 번이나 피었다가 졌다. 여우는 태하의 기척을 느끼자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선영도 여우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태하가 서 있었다.


“잠깐 걸을까요?”


선영은 태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배가 부르기 시작한 선영은 아랫배를 잡고 일어섰다.




“이 곳에서 나와 함께 있을래요?”


태하가 선영에게 물었다. 선영은 뜻밖의 제안에 놀랐다.


“……이 곳에요?”


태하는 대답 대신 선영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그의 담청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선영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영은 곧 시선을 떨구었다.


“아니요. 저는…….”

“저는 당신이 이 곳에 남길 바라요.”

“네?”


놀라웠다. 이 아름다운 남자가 자신을 원한다니.

태하는 선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선영은 당황하며 거절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요. 태하님. 그럴 리가 없어요. 전…… 예쁘지도 않고, 뭐 하나 내세울 것도 없어요.”


선영의 변명에 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무엇을 갖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전…… 언니라면 모를까 저는…….”


선영의 말에 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선영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의 손길을 받은 선영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한테 요술 부리지 마요.”


선영은 그의 손길을 떨쳐냈다. 태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영은 내처 말했다.


“난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과 어울리기에는 너무 평범해요. 태하님 주변에는 항상 아름다운 정령이 많잖아요. 그에 비해서 저는…….”

“맞아요. 그녀들은 아름다워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원해요. 당신은 계속…… 외형만을 이야기 하는 군요.”


태하가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아름다워요. 정령들 중 누구도 나에게 이런 마음을 품게 만들지 못했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태하의 거듭되는 제안에 선영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태하님, 잊으셨어요? 태하님과 저는 남매예요.”

“저는 이 곳에 있는 모든 정령과도 가족이에요. 모두 호수에서 태어났죠. 뿌리가 같아요. 저에게는 오히려

인간인 당신이 더 새로워요.”


태하의 대답에 선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곳에서 겪은 모든 일은 신비롭고, 놀라워요. 밖에 나간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죠. 하지만……

이제 가야할 것 같네요. 우리가 약속한 시간이 지났어요.”


선영은 도망치듯 말했다. 태하의 제안이 너무 뜻밖이라 자신이 서두르는 건지, 결계를 정말 벗어나고 싶은 건지 확신이 없었지만, 이 상황이 불편했다. 태하는 그저 선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깐이라도 생각해 줄래요? 그래도 같은 결론이 나온다면…… 결계 밖으로 보내줄게요.”


선영은 태하를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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