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고리
선영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는 놀란 듯 선영을 바라보았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뺨을 쓰다듬던 선영의 손이 미끄러지듯 그의 뒷목으로 향했다. 팔로 그의 목을 안고 점점 몸을 가까이 맞댄
후 그에게 키스했다. 그의 숨결이 선영의 얼굴을 간질였다.
내칠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선영이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선영을 안으려고 하는 것처럼 선영의 허리 근처에 그의 손이 맴돌았다. 오빠도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일까? 나에게 마음을
돌릴까?
선영은 천천히 그에게 몸을 뗐다.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눈을 들어, 그를 보자 그의 시선은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나는…….”
그의 짧은 사과를 들으니 선영은 화가 났다. 사과의 말이 선영에 귀에 꽂힘과 동시에 당혹스러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질투가 채워졌다. 선영은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더 깊이 그에게 키스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소년과 소녀 모두 당혹스러웠다. 둘은 서둘러 교복의 단추를 채웠다.
소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앞에는 바지를 추어올리는 그가 있었다.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교복
블라우스를 여몄다.
그들은 버스 종점에서 멀지 않은 덤불 뒤에 있었다. 넓지 않은 풀숲과 사방을 가득 채운 풀벌레 소리.
소녀는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먼저 옷을 입은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줬다.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둘은 가방을 챙겨 길가로 나왔다. 그 후 아무 말도 없이 소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소년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헤어지기 전, 소년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끝내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대문 앞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지금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지금 행복한가? 아니다. 화가 나나? 아니다. 오로지 당혹스럽고, 얼떨떨한 기분만 남아있다.
그와 어떤 행위를 했는지도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모든 것이 이성과 의지가 없는 채로 그냥 흘러갔을
뿐이다. 몸이 반응했고, 그래서 기억이 나질 않는 모양이다.
소년과 몸을 겹쳤던 그 시간을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소녀가 소년에게 당돌하게 키스한 시간과 풀숲에서
가방을 챙겨 나온 시간을 맞대어 가운데 시간을 가위로 잘라낸 느낌.
소년과 함께 했던 시간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는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뜨끈한 액체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선영은 그를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작은 동네이다 보니 어딜 가든 마주칠 법 한데,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영의 곁에도 없었다.
전부터 그를 좋아했지만 선영은 점점 더 그가 마음에 걸렸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선영은 그의 집으로 향했다. 둘이 함께 풀숲에서 나뒹굴고 난 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선영은 등교하는 길에 그를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이다.
다니는 학교는 달랐지만 두 학교는 나란히 붙어 있었다. 교문을 향하는 길에 선영을 발견한 그는 어색하게
인사 한 후 서둘러 교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를 보자 처음에는 허탈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났다.
자신이 그에게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와 그런 일이 있었으니 자신은 좀 더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선영은 벼르다가 수학책을 들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집에 혼자 있었다. 시골에서는 현관문을 잠그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선영은 수학책을 옆구리에 끼고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책상에서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던 그는 선영을 보고 놀란 얼굴이다. 선영은 다소 의기양양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책상에는 서울 지하철 노선도가 프린트 되어 있었다.
“이거 뭐야?”
선영의 질문에 그는 황급하게 프린트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친구랑 서울 구경이나 가 볼까 해서.”
그가 당황한 채 대답하더니 선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오빠한테 수학문제 좀 물어보려고.”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 말고 하영이 누나한테 물어봐야지.”
선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언니는 잘 안 가르쳐 주더라고. 오빠가 좀 알려줘.”
선영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내가 먼저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우리는 뭐야?”
선영의 질문을 들은 그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책상에만 눈길을 주었다.
얕은 숨을 내 뱉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미안해. 선영아. 그때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정말 미안해.”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욱 실망스러웠다. 역시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선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에 수학책을 내려놓고 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상체를 뻗어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선영을 바라보며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선영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마침내 선영의 옆에 앉은 그는 시선을 내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거친 숨만 내쉬었다. 선영은 왼손을
그의 옆에 두고 무게중심을 이동해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봤지만 그는
선영의 눈을 피했다. 순간 선영은 마음이 상했다. 자신은 용기를 내어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는데 이 남자는 자신을 내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가 좋다니!
선영은 그의 입술을 바라봤지만 망설였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피어났다. 이 다음 어떤 전개가
벌어질지 너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게 과연 옳은지 모르겠다. 그와 얼굴을 맞댄 채 생각했다.
그 역시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 알게 된 쾌감으로 그녀를 밀어낼 수 없었다. 선영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이대로 몸을 떼고 멀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를 놓칠까 두려웠다. 지금까지 내내 좋아하는 마음만 품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워질 기회가 또 있을까?
그런데 그때 그가 움직였다. 그가 한쪽 팔로 선영의 허리를 그러잡고 상체를 밀착시키더니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소녀의 얼굴 위에 소년의 얼굴이 겹쳐있다. 소년이 소녀의 목에 얼굴을 묻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소녀의
얼굴을 간질인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소년과 소녀는 하나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정신없었던 일련의 과정도 이제는 햇살 아래 하나씩 기억에 새길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소녀와 몸을 맞대고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흐르고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옷을 다 입고 난 뒤에도 소년은 돌아보지 않았다. 소녀는 민망함에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은 뒤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앉아있었다. 소녀는 기다렸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기다렸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소년의 말을 들은 소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지 않으면 화를 낼 것 같았다.
오빠는 나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야? 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나 서울로 가.”
이어지는 말에 선영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뭐?”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말이 이것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대답이 없었다.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
그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그가 결심한 듯 선영이 앉은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가 힘겹게 말했다.
“……누나. 하영이 누나가 수시 넣은 대학교……. 그 근처에…… 이모가 살아. 그쪽으로 가려고.”
그는 여전히 선영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인다. 침대에 앉아있는 그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사이도 없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내 입이 벌어지고 알 수 없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선영은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떨 군 채 선영을 향해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결국…… 결국 오빠는 언니를…….”
선영은 마음이 아팠다. 가슴 속에 불이 번진 것처럼 뜨겁고 화끈거렸다. 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대충 옷을 여미고 방문을 열었다. 그가 일어서는 기척을
느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미 충분히 들었다. 그가 자신에게 해 줄 말이 그 말 뿐이라면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운동화를 꿰어 신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지만 그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선영은 허리를 펴고 숨을 들이마셨다. 여자로써의 처음을 그에게 주었지만
되돌아온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의 맹목적인 사랑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 그에게
들은 것이 없었다.
선영은 서둘러 눈물을 닦고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갔다. 모든 것이 저주스러웠다. 언니가 그의 마음을
받아줬다면 자신은 더 행복했을까? 진작 그를 포기했을까? 의미 없는 생각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뒤돌아보지 말자.’
그의 집을 나서면서 선영은 다짐했다. 언니도, 그도, 자신도 모두 한심했다. 이제 자신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애증의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는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의 마음은 너무나 명확했고, 자신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로부터 삼일 뒤,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가 거실에 앉아있는 선영에게 수학책을 건넸다.
“현우 집에 놓고 왔다며?”
선영은 씁쓸한 기분으로 수학책을 건네받았다.
“야, 남자 혼자 있는 집에 왜 가냐? 미쳤어?”
잔소리를 하는 하영을 뒤로하고 선영은 방으로 들어갔다.
한 달 뒤, 그는 서울로 갔다. 나중에 들으니 집에서는 진작 서울로 유학을 보낼 참이었지만 그가 싫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아마 언니 때문이었겠지. 그가 떠나고 얼마 후 언니는 무난하게 수시에 합격했다.
그가 바라던 대로 그는 언니 곁에 머물 수 있겠지. 언니는 여전히 관심 없겠지만.
선영은 씁쓸한 뒷맛을 느꼈다. 허탈했다.
고1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선영은 도망치듯 외가댁으로 달려갔다. 입덧이 시작되었다.